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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글라이더 사고 중도장애인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훌륭한 분이네!

by skyrider 2011. 4. 21.

"장애인 아들 위해 아버지가 자살하기도 했죠"
[인터뷰]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11.04.20 14:35 ㅣ최종 업데이트 11.04.20 14:35 김조경민 (laborworld)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 노동세상
박경석

 

인터뷰 : 이춘자 <노동세상> 발행인

정리 : 김조경민 객원기자  

 

드라마 <추노>의 주인공은 '노예'라는 신분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다가, 결국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한다. 현대엔 그런 일이 사라졌을까.

 

박경석(51)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은 "'장애인'이라는 딱지는 노예처럼 하나의 신분으로 적용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꿈꾸는 걸 넘어서 희망을 일구는 사람들의 터전, 노들장애인야학의 박 교장을 지난 3월 20일 서울 대학로에 위치한 노들야학 사무실에서 만났다. <노동세상>에 실린 박래군 인권재단사람 상임이사 사진을 보고 박 교장이 빙그레 웃었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은 건 에바다 재단 정상화 투쟁이었단다.

 

"당시 인권운동사랑방이 혜화동 로터리에 있었는데 계단이 많아서 장애인에겐 반인권적이었죠.(웃음)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했죠. 도움 많이 받았어요. 구 비리재단의 실세를 몰아내려고 둘이 같이 용감하게 학교 앞에 갔다가 똥물을 뒤집어썼죠. 난 휠체어 타서 도망도 못 가고 더 많이 맞았지."

 

오랜 투쟁 끝에 사회복지시설 법인을 유일하게 바꾼 에바다 투쟁은 지금도 혁명 같은 일로 기록돼 있다.

 

이날 장애인 자립생활 투쟁을 하다 사망한 한 열사의 2주기에 다녀왔다고, 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이끌며 지하철 선로에 목숨 걸고 내려갔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저 원래 조용한 사람이에요.(웃음)"

 

늦은 오후, 박 교장의 호탕한 웃음이 섞인 재치 있는 말솜씨로 그의 삶과 장애인 운동사를 들었다.

 

"군대 다녀오고 나서 1983년에 사고로 척추장애 입어"

 

- 비장애인으로 살았을 때도 장애인 문제를 고민하셨나요?

"저는 중도장애인입니다. 1979년에 대학교 1학년 다니다 군대 다녀오고 나서 1983년에 사고로 척추장애를 입었어요. 비장애인이었을 때는 장애인 문제를 거의 몰랐죠. 다만 고등학교 때 클래식 기타를 쳐서 연주회에 갔다가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기타 치는 걸 보고 '아, 장애인도 잘 치는구나'라고 생각했던 적은 있어요.

 

장애인이 되면 기분이 좋지는 않잖아요? 인생 종쳤다고 생각하지.(웃음) 저도 6개월 병원 치료받고 나서 5년 동안 집구석에만 있었어요. 그러다 1988년 서울장애인복지관에 가서 직업훈련을 받으면서 그 당시 장애인 운동 하던 사람들을 만났고요.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과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적인 노력을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란 걸 알게 됐죠."

 

당시 대학생들은 필수적으로 1년에 한 번씩 문무대에 입소해 군사 훈련을 받았다. 박 교장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부터 머리를 길렀는데, 교관이 그걸 자르고 때리려 한 것을 피해 도망친 게 '훈련거부'가 되어 강제징집을 당할 뻔했단다. 엎친 데 덮친 격,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서 그냥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고. 비교적 일찍 간 군대에서 낙하산 타는 재미를 알게 된 그는 제대 후 행글라이딩 동아리에 들었는데, 첫 경기에서 그만 사고를 당했다. 당시 나이 스물 넷. "잘 노는 게 인생의 기쁨이라고 생각했는데 놀다가 인생을 조졌으니 얼마나 허무했겠습니까?"하고 그는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 집에만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계기가 있을 텐데.

"일단, 5년 동안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잖아요. 그러던 중에 뭔가 해봐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생겼어요. 기독교 집안이라서 몸은 망쳤어도 죽고 난 뒤에 하늘나라는 가야 한다고, 꼭 교회는 데려갔어요. 일주일에 한 번은 외출을 하면서 살았던 거죠. 어떻게 보면 교회가 세상과의 끈이었어요. 교회 소개로 1주일에 한 번씩 영어 선생님도 오셨거든요. 지금은 형수님이 됐는데, 그분 덕에 대학을 다시 갈 정도로 실력이 늘었죠.

 

그리고 병원에 치료받으러 다니다 만난 친구와 잠깐 연애도 했어요. 그 친구가 장애인 특수교사라서 서울장애인복지관을 소개해줬어요. 거기서 전산과 공부를 했는데 정태수라는 친구를 만났어요. 운동도 제대로 못하면서 운동권 노래만 불러댔던 친구죠. 또 목공 수료생 박흥수 선배를 만났어요. 청계천에서 장애인 노점상투쟁, 빈곤투쟁, 88년 서울장애인올림픽 거부투쟁 등을 조직하셨던 분이죠. 저는 뭣 모르는, 한 번 살아보려고 직업훈련 받으러 갔던 순진한 사람이었는데….(웃음)"

 

- 복지관에서 직업훈련을 받은 뒤에는 취업을 하셨나요?

"서울장애인복지관을 1년 다니고 수료한 뒤에 흥수 형, 태수와 함께 점거농성에 들어갔어요. 이유가 있어요. 복지관에서는 서울시에 졸업생 90% 이상이 취업했다고 보고했는데, 당시 제가 동문회장을 맡아서 설문조사를 했더니 전혀 다른, 비참한 결과가 나온 거예요. 취업률도 정말 낮고, 취업해봤자 5만 원 정도 주고 3개월 다니라는데, 3개월 다니면 잘려서 다시 돌아오고. 그러고는 그건 너희 장애인 탓이라고 하는 게 현실이었어요. 이런 걸 알리는 소식지를 냈더니 복지관에서 그걸 압수해 버려서 농성에 들어갔죠.

 

계기는 그랬지만 목표는 대책 없는 장애인복지에 대한 문제제기였어요. 복지관에서 그렇게 보고 안 하면 실적이 없다, 그러면 예산을 못 받는다, 그러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복지관을 이해할 수는 있어요. 효율의 잣대로 고용을 보는 사회구조가 원인이니까요. 의무고용률도, 장애인고용촉진법도 없던 시절이잖아요. 농성을 한 달 넘게 했는데 답이 안 나왔죠. 서울시가 변해야 하는 문젠데, 끄떡이나 하겠어요? 그래서 제도 문제는 제도 문제로서 푸는 투쟁을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생겼고, 90년 '심신장애자복지법 개정'과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이라는 양대 법안투쟁을 진행하는 계기가 됐어요."

 

- 그 후 장애인문제를 깨닫게 된 과정이 궁금하네요.

"흥수 형이 술을 사준다기에 열심히 따라다니며 먹었죠, 일명 알콜약물치료.(웃음) 그러다 장애인 문제를 알게 되고, 권유를 받아 태수랑 같이 공부했어요. 1981년 전두환의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구호 아래, 공무원·국민연금 등 복지제도의 근간이 만들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선 사회적 약자에겐 해줄게 없나 해서 만든 게 바로 심신장애자복지법입니다. 당시 일본에 있던 법안 하나를 그대로 베낀 건데, 우리는 쓰레기 같다고 평가했어요. 전혀 실효성이 없었거든요.

 

그때 서울장애인올림픽 거부투쟁을 하고 나서 장애인단체도 많이 만들어지고 조금씩 인식도 변화하고 조직적 노력이 이루어지면서 1990년에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장애인복지법'으로 개정이 돼요. 그리고 그해에 '장애인의 날'을 만들어줘요. 비가 잘 안 오는 4월 20일로. 굉장히 '은혜로운' 날을 만들어서 장애인복지를 한다고 선전했죠. 팔 잘린 사람들이 스포츠를 하면 아름답게 보이잖아요? 장애 극복했다고 눈물 막 짜내고. 개인적인 인간승리를 장애인복지로 포장했죠. 같은 해에 '장애인고용촉진법'이 만들어지는데 200명 이상 사업장에 2% 의무고용이 핵심이에요. 이렇게 양대 법안투쟁을 했죠."

 

- 양대 법안투쟁이 갖는 의미가 있을 텐데요.

"그 전에는 명망 있는 장애인 한 명이 대통령 부인한테 가서 울고불고 봐달라는 식이었어요. '성한 사람이 불쌍한 사람들 돌보자.' 이런 식으로 선전했던 시기였으니까. 그런데 양대 법안투쟁은 많은 장애인단체가 조직되면서 스스로 주도해갔어요. 각 장애인단체들 성격이 다 다른데 흥수 형이 있던 곳은 그 중에서도 '빨갱이' 같은 데였어요. 장애인문제를 계급적인 문제와 같이 바라보고 노점상투쟁 같은 실천적인 노력을 현장에서 만들어가려고 했죠.

 

당시 중증장애인이 가난을 해결하는 방식이 주로 '앵벌이'였어요. 그런 사람들을 모아서 리어카로 노점상 만들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을 했어요. 도로의 턱도 그냥 없애달라면 안 해주니까 직접 망치 들고 가서 깨부수는 투쟁도 했었죠. 이런 장애인 청년운동들을 조직하는 과정을 흥수 형이 했어요."

 

- 장애인 청년운동은 어떤 운동이었나요?

"법안투쟁이 끝나면서, 조직돼 있던 장애인계가 나뉘기 시작했어요. 그 중 결국은 계급적 문제 해결 없이 이것만 달랑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쪽에서 1990년에 활동가 조직인 장애인청년운동연합회(이하 장청)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활동가만 모인 거예요. 현장과 대중조직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1993년에 만든 게 바로 노들장애인야학이에요. 제가 대학 동기들 꼬셔서 야학 교사하라고 했죠. 전 처음에는 안 했는데, 제가 꼬신 교사들이 자기들만 구렁텅이(?)에 몰아넣었다고 뭐라 하기에 저도 교사대표 등 여러 가지를 했죠. 1997년에는 교장까지 되고.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했던 대다수가 노들야학에서 함께 공부했던 장애인들, 교사들, 그리고 단체들이에요."

 

"삶에 전환점 마련해 준 사람들이 모두 세상 떠났을 때 가장 힘들었다"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 노동세상
박경석

 

박 교장은 사고 다음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절로 2002년을 떠올렸다. 중증장애인의 이동권을 위해 외롭게 투쟁했던 그해, 박 교장과 함께 선로에 내려가 이동권 투쟁을 했던 중증장애인 최옥란씨가 사망했다. 그의 곁을 떠난 사람이 더 있었다. 삶에 전환점을 마련해 줬던 박흥수씨와 정태수씨였다.

 

"같은 해 3월에 태수가 죽고, 흥수 형은 그 전 해 10월에 돌아가시고…. 정신이 없었죠, 뭐."

 

박흥수씨는 청계천노점상투쟁과 빈민장애인문제를 위해 일하다 병을 얻었고, 장애인단체를 조직하던 정태수씨는 과로로 인한 뇌출혈로 사망했다.

 

"집 근처 아파트에 정자가 있었어요. 거기서 세 명이 소주 한 잔 할 때 흥수 형이 '열심히, 장애인 해방 그날까지 가자!'라고 하면 저도 좋다고 '건배!'하곤 했는데…."

 

일명 '정자결의'를 같이 했던 동지 둘을 잃고 나서는 함께 운동에 대한 고민이나 위로를 나눌 곳이 별로 없다고 박 교장은 말했다. 시종 차분하고도 시원스럽던 그의 말이 한동안 끊겼다.

 

- 대중적인 장애인운동은 어떻게 진행됐나요?

"앞서 말했던 활동가 중심조직인 장청이 만들어진 후에 좀 더 대중적으로 장애인운동을 하자고 만든 게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이하 전장협)예요. 주로 소아마비 장애인조직인데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전국으로 흩어져서 친목 목적으로 만든 거였어요. 이후 93년 9월에 장청이 전장협에 통합됐어요. 그해 8월에는 노들야학이 만들어지고. 그러면서 대중조직을 굉장히 많이 건설했어요.

 

그러다가 제가 전장협 조직국장을 맡았던 1997년, DPI(Disabled Peoples´International·국제장애인연맹)에서 한국지부를 만들면서 전장협과 통합 논의를 했어요. 통합하면 상당한 활동자금이 동원될 것이고 좀 더 국제적으로 인텔리하게 놀면(?) 정치적 영향력도 생길 거라고 다수가 찬성했죠. 틀린 말은 아니지만, 현장조직으로서의 전망을 못 가졌다고 봐서 저는 반대했죠. 그래도 결국 통합하는 거로 결정됐어요. 2001년에 통합하면서 "왜 장애인이 노점상 투쟁을 해야 하냐, 야학은 집회만 하면 되지 않냐"며 현장조직들을 정리해버리는 걸 겪으면서 노들야학만 따로 나왔죠."

 

- 2001년 이동권투쟁은 이동권이 권력(권리)이라고 생각하지 않던 일반인들에게 충격이었어요.

"지금도 끝난 투쟁은 아니에요. 2004년에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이라고 만들어졌지만 한계가 있어요. 예산 문제죠. 국가가 2012년까지 저상버스를 50% 도입하겠다고 했지만 이명박 정부로 오면서 50%는커녕…. 서울은 수도이고, 투쟁을 많이 했으니 그나마 있지, 지방은 정말 열악해요. 서울도 내년까지 50%로 만들기로 조례는 만들었는데, 과연 오 시장이 할까 의심스러워요. 지금도 잘 안 되고 있거든요. 예를 들어 계획에 따르면 500대가 필요한데 올해까지 300대 밖에 없으면, 과연 내년 가서 다 채울까요? 사람으로서 가질 최소한의 권리를 시혜로 보고, 돈의 논리로 늦추고 있는 거죠."

 

  
장애인 권리 보장 시위
ⓒ 노동세상
장애인

 

장애인운동사는 2001년을 중증장애인이 전면에 선 시기로 기록한다. 장애인 이동권투쟁을 벌인 해다. 그해 1월, 서울 오이도역에서 수직형 리프트를 이용하던 장애인 노부부가 추락사한 것이 계기였다. 중증장애인들이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 저상버스 등을 요구하며 지하철 선로를 점거했다.

 

"나만 해도 장애 오고 나서 절망으로 5년을 집에만 있었는데, 당시 장애인 75.5%가 한 달에 5번도 외출하지 못한다는 보건복지부 통계가 있었어요."

 

장애인이 버스를 못 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하철 타려다 죽어도 장애인 탓으로만 돌리는 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고 박 교장은 힘주어 말했다.

 

"그 전엔 장애인을 동정하는 기사 한 줄 나가면 시민들이 불쌍하네, 하고 넘어갔죠. 그런데 지하철을 막아서 자기 시간 1시간이 늦어지니까 그제야 관심을 가지더라고요."

 

시민들의 손가락질도 받고, 집시법 위반과 교통법 위반으로 벌금도 냈다고 한다. 지하철 선로 점거 시위, 장애인 버스타기 운동 등 목숨을 건 장애인들의 투쟁으로 교통약자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장애인의 이동은 투쟁만큼이나 목숨을 담보해야 하는 실정이다.

 

"장애인 아들 수급자 만들려고 아버지가 자살하기도"

 

- 장애인 운동의 큰 획으로 지금 민생 3대 법안을 제·개정하자고 하고 있는데.

"첫째가 기초생활보장법 개정, 부양의무제 기준을 폐지하자는 거예요. 이건 먼저 복지개념을 가족의 책임으로 묶어 놓는 문제가 있어요. 실제로, 부양기준 문제 때문에 빈곤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이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게 장애인 문제와 연관이 많아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일용직 부모가 발달장애인 아들을 키우다, 소득은 불안정한데도 그 때문에 아들이 수급자가 될 수 없으니까 아버지가 자살한 거예요. 그리고 시설에는 가족관계가 없는데, 거기서 나오게 되면 가족관계를 다시 따지니까 수급권을 박탈당해요. 그럼 결국 시설에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개인소득으로 보자고 저희는 주장하는 거죠."

 

- 제 지인 중에도 중증장애인이 있어요. 그 분 남편이 월급 130만 원일 때는 수급권자가 되었는데, 월급이 140만 원으로 오르니까 수급권이 박탈되더라고요.

"맞아요. 월급은 올랐지만, 결과적으로 가계소득은 줄어드는 거예요. 둘째는 장애인활동지원법 개정이에요. 원래 2006년에 투쟁을 통해 활동보조서비스를 제도화하면서 만든 법이에요. 서비스 받는 사람을 3만5천 명에서 5만 명으로 늘렸는데, 사실 지원이 필요한 장애인이 30만 명이 넘어요. 그런데 기껏 1만5천 늘려놓고, 신청자격도 장애1급으로만 제한하고. 자부담도 4만 원에서 8만 원으로 올리고는, 이번에는 15% 비율로 적용시켰죠. 그럼 최대 21만 원까지 자부담을 하게 돼요.

 

물가상승률도 이 정도로 뛰진 않아요. 이처럼 투쟁을 통해 국가가 책임지게끔, 사회서비스를 시장화하려 하는 걸 막으려고 싸우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장애아동복지지원법 제정. 그동안 장애아동에 대한 지원이 파편적이고 열악했어요. 이걸 관련법을 제정해서 체계적으로 통합하고, 양도 늘리자는 거예요."

 

- 요즘 '자립생활'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장애인운동에서 이건 어떤 의미인가요?

"대개 경제적인 걸 떠올리겠지만, 장애인운동에서는 장애인의 자기결정과 선택을 굉장히 중요시하는 운동이에요. 장애인들은 대개 집에 있거나, 저희는 '수용시설'이라고 부르는 생활시설에 갇혀서 방치되고 있어요. 그런 수동적인 삶을 거부하고 자기의 선택과 결정으로 서비스를 받고 일상생활을 하는 것. 이게 본질적인 자립생활이죠.

 

그런 운동이 이동권투쟁과 결합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고, 활동보조서비스로도 이어졌어요. 시설에서 사는 장애인들을 예로 들면, 그들에게는 24시간 생활교사가 붙어서 화장실, 식사 등 생활지원을 해줘요. 하지만 장애인 당사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결정할 게 없어요. 한꺼번에 데려다 놓고 밥 먹이고 하니까. 그리고 내가 영화 보고 싶어도 자원봉사자 시간과 맞춰야 갈 수 있잖요. 장애인도 성격이 다양한데 일부러 착한 척 해야 하고.(웃음) 이렇게 자기 일상생활에서 나보다 주위의 결정이 더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활동보조서비스는 1:1관계죠. 그래서 활동보조서비스를 보장하라는 투쟁을 2006년에 시작했어요. 서울을 시작으로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 말년에 6시간 동안 한강도로를 막고 기면서. 이걸 전국적으로 하면서 활동보조서비스를 권리로써 선언적으로, 제한적으로 보장받게 되었죠. 그러면서 자립생활운동이 많이 일어나게 됐어요."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 노동세상
박경석

 

일본의 한 뇌병변 장애인이 '자신의 몸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를 거부한다'라고 얘기했단다. 비장애인이 8시간에 100을 생산한다면, 중증장애인은 10을 생산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100을 생산할 수 있는 시간을 더 요구할 것인가?

 

박 교장은 자본주의와 장애인 문제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봐주기를 바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반자본주의 투쟁과 장애인은 본질적으로 연결돼 있어요. 효율과 경쟁의 잣대로 가치를 척도하는 것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전체 사회적 약자와 함께 연대를 통해 투쟁을 확장시키는 게 어떨까요. 물론, 그러면 머리 아프고 골치 아프겠지만.(웃음) 장애인 운동도 그런 투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노동세상>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