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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오바마(상)-"연설은 좀 하는데 상원은 잘 몰라요"

by skyrider 2008. 11. 2.

  "연설은 좀 하는데 상원은 잘 몰라요"
  다큐멘터리로 보는 오바마의 정치역정 <상> 시카고와 하버드
  2008-10-31 오전 7:51:53
  미국 대선 현황을 집대성해 보여주는 '리얼클리어폴리틱스닷컴'의 30일 집계에 따르면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는 현재 311명의 대의원을 확보하고 있다. 142명을 얻는데 그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를 더블 스코어로 압도하는 것이다.
  
  당선에 필요한 대의원 수가 270명이기 때문에 매케인이 미확정 대의원 85명을 다 가져간다고 해도 오바마의 승리는 확실시된다.
  
  대선의 저울추가 일찌감치 기울면서 이제 관심은 오바마에게 집중되고 있다. 그는 과연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왔나.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어떤 정책을 펼 것이며 정말로 미국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지난 29일 <EBS>가 방영한 다큐멘터리 '인종을 넘어 백악관을 꿈꾸다, 버락 오바마'는 그의 출생과 성장, 정치입문과 대권 도전을 조명하며 그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제공했다.
  
  미국 공영방송 <PBS>가 제작해 <EBS>에 의해 국내에 소개된 이 다큐의 내용을 세 차례에 걸쳐 지면 중계한다.
  
  28일부터 4일간 밤 11시 10분에 방송되는 <EBS>의 대선 특집 다큐멘터리는 30일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를 소개한데 이어, 31일에는 대선 결과를 종합 전망하는 다큐를 방영할 예정이다.<편집자>

  
<'오바마 스토리' 연재 다시보기>
  
  <상> 오바마, 아버지의 이름으로 - 몸으로 역사를 가르쳐준 그들
  <중> 흑인, 위대한 유산 영광스러운 짐 - 흑인으로 산다는 것
  <하> 미국 정가에 느닷없이 등장한 흑진주 - '바위' 같은 아내 미셸

  
전당대회의 소음이 사라진 까닭
  
  2004년 7월 존 케리를 대선 후보로 지명한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다. 일리노이주에서 연방 상원의원에 출마한 버락 오바마.
  
  그의 혜성 같은 등장은 그로부터 한 달 전 케리 캠프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됐다. 케리 후보의 보좌관들은 전당대회에서 카리스마로 청중을 사로잡을 연사를 원했고 일리노이에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는 오바마를 지명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바마의 수석 전략가로 일하고 있는 데이비드 액셀로드는 "전화를 받은 오바마는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정해져 있어요. 미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내 인생 얘기를 할 겁니다'고 말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자리에 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건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내 아버지는 케냐의 작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뒤 하와이로 유학 온 학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지구 반대편인 미국 캔자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부모님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미국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선 저는 제 인생 얘기가 미국의 이야기에 속해있음을, 내가 선조들에게 빚이 있음을, 제 얘기가 다른 나라에서 불가능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눴던 믿음은 우리 모두 한 국가의 국민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의 아이가 글을 모른다면 제 아이가 아니라도 저는 걱정이 됩니다. 아랍계 미국인이 부당하게 가택수색을 당한다면 저의 자유도 위협을 받습니다. 저에게는 근본적인 신념이 있습니다. 나는 내 형제와 자매의 보호자이고 그런 생각이 미국을 움직인다는 신념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진보적인 미국, 보수적인 미국은 없습니다. 미합중국이 있을 뿐입니다. 흑인의 미국, 백인의 미국, 라틴계의 미국, 아시아계의 미국이 아니라 미합중국입니다.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맙시다. 불안 속에서도 담대한 희망을 가집시다. 우리 모두는 성조기에 충성을 맹세하고 미합중국을 지키는 미국인입니다."
  
▲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 장면 ⓒ로이터=뉴시스

  전당대회 연단에 선 오바마는 자신의 인생 얘기를 끌어와 미국의 정치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말했고, 낡은 사고방식에 어떻게 도전할 것인지를 역설했다.
  
  1984년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게리 하트는 2004년 보스턴 전당대회의 풍경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당대회장 안을 걸어가고 있었어요. 전당대회란 건 정신없는 행사죠. 청중들은 쉼 없이 웅성거리고 와글거립니다. 연설은 십중팔구 소음에 묻히죠. 하지만 오바마가 연설을 시작하자 사람들은 조용해졌고 귀를 기울였고, 오바마의 말에 공감했습니다."
  
  연단 뒤에서 감동의 연설을 듣던 오바마의 부인 미셸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번졌다. 그 눈물은 다른 청중들에게 이어졌고 "이건 역사적인 사건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날 전당대회의 주인공은 존 케리가 아니라 오바마였다.
  
  살림 무와킬 <시카고트리뷴> 칼럼니스트는 "물론 현실은 다릅니다. 흑인의 미국도 백인의 미국도 없다는 말에 전 얼굴을 찡그렸어요. 흑인의 미국은 존재하니까요. 물론 오바마가 말하려는 게 뭔지는 분명해 보였죠"라고 말했다.
  
  연설이 끝나자 정치평론가들과 기자들은 오바마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됐다. 방송에서는 "타이거 우즈를 보는 것 같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감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온다"라는 멘트가 흘러 나왔다.
  
  오바마가 연방 하원의원에 출마했던 2000년 선거대책본부에서 일했던 윌 번스는 "전당대회 연설은 가두 선거운동에서 늘 하던 것이었어요. 2004년 전당대회 때 TV를 보며 그걸 줄줄 읊었죠. 그리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청중 앞에서 하던 연설하고 똑같다며 재밌어 했어요. 오바마는 교회에서도 그 연설을 많이 했죠"라고 말했다.
  
  풋내기 상원의원 주변에 모여든 정치 거물들
  
▲ 2004년 1월 연방 상원의원이 된 오바마가 상원의장인 딕 체니 부통령 앞에서 선서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민주당 전당대회 연설로 일약 전국적인 스타가 된지 5개월만인 2005년 1월 오바마는 일리노이주에서 선출된 연방 상원의원이 되어 워싱턴에 입성했다. 한 기자는 이에 대해 "초선의원이었지만 오바마는 스타로 상원에 들어갔어요. 힐러리 클린턴의 당선 때와 비슷했죠"라고 말했다.
  
  2004년 총선 결과 민주당은 상하원 모두에서 다수당 지위를 얻지 못했다. 그런 민주당의 입장에서 오바마는 새로운 슈퍼스타였고 당의 미래였다. 가능성을 직감한 민주당 중진 의원들은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를 지냈던 톰 대슐은 "대다수 선배들이 오바마한테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출세 가도를 달릴 사람이란 걸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슐은 2004년 재선에 실패했다. 상원을 떠나게 된 그는 당의 새로운 보물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 주기로 한다. "오바마는 보좌관을 찾고 있었고 저에겐 상원 최고의 보좌관이 있었어요."
  
  대슐은 수석 보좌관이자 '101번째 상원의원'으로 불리는 피트 라우스(현 오바마 후보 비서실장)를 설득해 오바마 의원실로 들어가게 한다. 라우스는 "내가 연설은 좀 하는데 상원에서 자리를 잡는 법은 잘 모릅니다"라고 소탈하게 말하는 오바마의 '마력'에 끌려 은퇴 결심을 번복했다.
  
  제프 젤리니 <뉴욕타임스> 기자는 "보좌관들이 가장 중점을 둔 건 오바마를 진지한 상원의원으로 보이게 하는 거였어요. 그게 1차 고려사항이었죠"라고 말했다.
  
  오바마와 측근들은 세밀한 2개년 계획을 세웠다. <오바마-약속에서 권력으로>를 쓴 데이비드 멘델은 "그 계획의 목표는 2008년 대선이 오기 전까지 오바마의 입지를 최대한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그 때부터 오바마는 논쟁에 휘말리는 걸 최대한 피했고, 차근차근 정치 경력을 쌓아 나갔다.
  
  라우스 비서실장은 "첫 9개월간 일리노이주 밖에서 연설도 하지 않았어요. 토크쇼에도 안 나갔죠. 맡은 일은 게을리 하면서 인기만 얻으려는 정치인으로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바마한테는 훨씬 큰 야망이 있었죠. 당내 지지기반을 넓히고 대중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신경을 써야 했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 상원의 전통에 적응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상원에서는 뭐든 연장자가 먼저이기 때문이었다. 신참중의 신참인 오바마가 질문을 하려면 최소한 2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은 오바마의 러닝메이트가 된 조지프 바이든 당시 상원 외교위원장이 진행했던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인준 청문회는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흑인과 히스패닉, 진보적 백인을 묶어라"
  
  물론 오바마에게는 다른 면도 있다. <뉴요커>의 라이언 리자 기자는 "오바마는 정치가 어떤 건지 잘 압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그 점을 잊어버리죠. 한 번의 뛰어난 연설로 정치무대에 등장했다는 것이 그런 사실을 잊게 했죠. 하지만 정치인 오바마는 2004년에 태어나지 않았어요. 시카고 정계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정치적인 기술을 배웠어요. 덕분에 아주 유능한 정치인이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시카고는 흑인들의 수도 같은 곳이다. 반유대주의 성향의 흑인 이슬람 지도자 루이스 파라칸의 사무실이 있고, 흑인 민권운동의 대부격인 제시 잭슨 목사의 사무실이 있으며, 남쪽엔 제레미 라이트 목사의 트리니티 유나이티드 교회가 있다. 시카고는 또 최초의 흑인 시장이었던 헤럴드 워싱턴의 도시이기도 하다.
  
▲ 제시 잭슨 목사와 오바마

  오바마는 1961년 하와이에서 태어나 인도네시아에서도 자랐고, 캘리포니아와 뉴욕에서 대학을 다녔다. 대학 졸업 후 시카고 정착을 결심했고, 1984년 23세 때 시카고 흑인들의 공동체에 발을 들여 놓았다.
  
  시카고에 온 오바마는 의미 있는 일자리를 찾다가 공동체 조직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그게 대체 뭐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채 "변화가 필요하다. 변화는 위에서 오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풀뿌리가 만든다"고만 답했다.
  
  당시 제럴드 켈만 등 시카고 지역에서 활동하던 공동체 조직가들은 동료를 구한다는 광고를 냈다. 그들은 특히 흑인이 필요했다.
  
  오바마를 선택했던 켈만은 "그는 비쩍 마른 청년이었죠. 오바마가 일하는 지역엔 싱글맘이 아주 많았는데 그를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곤 했어요. 똑똑한 엘리트 청년한테 자기 딸이나 손녀들을 소개해주고 싶었던 거죠. 그러면서 그는 시카고를 고향처럼 느끼게 됐습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러나 오바마가 시카고에서 늘 환영만 받은 건 아니었다. 교회 지도자들과 일 할 때가 많았는데, 그 중에는 오바마가 시카고고 토박이도 아닌 아이비리그 출신이라고 안 좋은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공동체 조직가인 마이크 크루글릭은 "연고 없이 흘러온 사람은 환영하지 않는 곳이 시카고"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겐 소수민족을 결집시켜 성공을 거둔 역할모델이 있었다. 시카고 시장 헤럴드 워싱턴이었다.
  
  시카고 시의원인 토니 프렉윙클은 워싱턴에 대해 "대단한 시장이었어요. 시카고 시민 모두를 위한 시장이 될 준비가 돼 있었죠"라고 말했다. 오바마의 보좌관인 카산드라 버츠는 "워싱턴은 흑인, 히스패닉, 진보적 백인 유권자를 조직시켜 연합전선을 구축해 기존 세력을 눌렀죠. 그 전략은 오바마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어요"라고 말했다.
  
  하버드에서 쌓은 '초당적' 이미지
  
  공동체 조직가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지만 오바마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시카고 정착 후 2년 반이 지나자 그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절감한 것이다. 공동체 조직가의 힘만으로는 빈곤 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오바마는 빈곤 퇴치라는 목표를 다른 방향에서 이룰 수는 없을까 고민하다가 시카고 공동체의 시각이 아니라 한 단계 높은 시각에서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기로 하고 법학대학원(로스쿨)에 갔다.
  
  오바마는 학자금 융자를 받아 하버드 로스쿨에 입학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하버드 로스쿨의 정치적 분위기는 격렬했다. 진보와 보수로 완전히 갈라져 있었고, 차별 철폐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다. 토론도 많이 하고 싸움도 많이 했다. 하버드 로스쿨은 불만에 가득 찬 대가족처럼 돼버렸다.
  
  오바마도 열심히 참여했다. 은사인 하버드 로스쿨의 흑인 교수 데릭 페이를 위한 집회에서 연설도 했다. 당시 한 동료는 "오바마는 캠퍼스의 유명인사였죠. 모르는 사람도 없고,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지도자 같은 존재였어요"라고 증언했다.
  
  인종차별에 관한 논쟁이 격화되면 오바마는 중재자·조정자 역할을 도맡았다. 흑인과 백인, 진보와 보수처럼 완전히 다른 집단에서도 그는 균형을 잘 잡았다고 평가받았다. 데이비드 멘델은 "줄타기 묘기를 하는 것처럼 아주 능숙했다"고 말했다.
  
▲ <하버드 로 리뷰> 편집장 시절

  오바마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흑인이면서도 외조모부가 모두 백인이었던 가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완전히 다른 두 집단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몸에 뱄기 때문이라고 분석된다.
  
  하버드 로스쿨의 치열한 이념 대립의 중심에는 법학 전문 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가 있었다. 당시 오바마의 한 친구는 훗날 "나는 대법원과 백악관, 워싱턴 정계에서 20년 가까이 일했지만, 내가 목격했던 가장 치열한 정치싸움은 <하버드 로 리뷰>에서 있었다"고 회상할 정도다.
  
  당시 하버드 법학대학원의 보수파는 진보파에 비해 수적으로 크게 밀렸다. 그러나 오바마는 보수적 성향의 학생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러면서 <하버드 로 리뷰>의 편집장에 도전했다. 하루 종일 걸린 편집장 투표에서 오바마는 지지를 꽤 받았지만 압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보수적인 성향의 한 편집자가 "<하버드 로 리뷰>가 이렇게 양분돼있으니 둘을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 편집장이 돼야 한다"며 오바마 지지로 돌아서면서 마침내 편집장에 당선됐다.
  
  흑인 학생이 처음으로 <하버드 로 리뷰>의 편집장이 됐다는 사실은 전국적인 뉴스거리였다. 오바마의 당선에 흑인들은 기뻐했지만 오바마는 오히려 보수파를 필자로 더 많이 기용했다. 이에 많은 흑인들은 아주 섭섭해 했다.
  
  로스쿨 졸업 후 시카고에 돌아온 오바마는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다.
   
 
  황준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