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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컬럼,글

문제는 그런 악인을 포장해 주는 언론에 세뇌되어 있는 어리석은 서민들!

by skyrider 2010. 12. 13.

'자이언트' 조필연, 그는 시퍼렇게 살아있다

미디어오늘 | 입력 2010.12.13 18:59 | 누가 봤을까? 40대 여성, 광주

 




악인이 응징받지 않는 시대의 판타지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미디어오늘 황정현·독립영화 프로듀서 ]

SBS < 자이언트 > 최종회는 거대한 판타지였다. 국무총리 후보자의 과거가 까발려지고 최후의 순간 몰락에 이르는 인사청문회 장면은 적어도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쾌감을 느꼈을 수는 있지만, 그 장면을 목격하는 시청자 중 그 누구도 조필연과 같은 현재 한국사회의 악인(심지어 국무총리까지 노릴 정도의)이 그런 식으로 권좌에서 끌어내려 질 것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얼마 전 60부를 끝으로 종영한 < 자이언트 > 는 양심적인 건설기업가의 눈으로 본 강남, 한국 개발사를 그린 드라마다. '강남'이라는 지역은 그곳의 개발사가 곧 현 대한민국의 흥망사가 될 정도로 상징적인 공간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개발이 그렇듯, 강남 또한 권력과의 유착을 통한 개발이 주를 이뤘던 곳이다. 서울의 과밀화 해소라는 정책적 목표는 단지 허울이었을 뿐, 실제로는 토지 매입, 개발, 그를 통해 확보한 막대한 현금 차입 등 대한민국의 부 축적 방식의 원형이 만들어진 계기였다. 이 과정에서 권력이 폭력과 선전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은 물론이다. < 자이언트 > 가 보여준 이런 부의 축적과 권력의 태동은 드라마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디테일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조필연(정보석)이 있다.

조필연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파괴적인 한국적 악인이다. 그가 살인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 대한 단죄가 미뤄지면서 '워너비'들을 양산한 것 또한 그리 결정적인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그가 치명적인 악인인 이유는, 그 악행의 일부를 우리가 조금씩 벤치마킹하고 있으며 그가 보여준 악행의 전형을 현재 한국인들이 '분노하지 않은 채' 목격하게 만든다는 점 때문이다. 어느 순간엔가 자신이 정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고서도 그것을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시키는 일종의 '룰'을 만들었다는 점, 그것을 통해 조금씩 다른 사람들을 공범자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의 비근한 예인 부동산 '투자'가 결국엔 한국사회의 거품을 지탱해서 그 '공범자'들을 위험에 빠뜨리긴 했지만 말이다.









▲ 양심적인 건설기업가의 눈으로 본 강남, 한국 개발사를 그린 드라마 < 자이언트 > 의 한 장면.

탐욕은 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제1의 기본원칙이다. (자본을) 욕망하는 기계는 부수적인 수단으로 폭력을 양산하며, 결국 가장 큰 폭력이라 할 수 있는 권력을 또한 욕망한다. 부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혹은 부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권력에 탐닉하는데, 이는 불가피한 것이다. 욕망하는 것을 멈추는 순간, 즉 기계가 작동을 멈추는 순간 자본주의의 속도는 멈춘 이들을 압살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개발'로 이루어진 땅 값 상승의 폭과 비례해서 '발전'해왔다. 그리고 그를 통해 축적된 자본은 권력 획득을 위한 자원 혹은 획득에 따른 과실로 되돌아갔다.

한국에서 악인이 되려면 단순히 한 개인을 죽이거나 하는 식으로 일시적 피해를 입혀서는 부족하다. 적어도 수백만 명에게 피해를 주거나, 그럼에도 떳떳하게 언론에 얼굴을 비치고 다녀야 한다. 흔히 '보스'라 일컬어지는 그런 '거인'들은 자신들의 몰락이 곧 한국사회의 몰락인 것처럼 떠벌리고 다닌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그런 몇몇이 몰락한다고 해서 동반 몰락하지 않는다는 건 그들이 더 잘 알고 있다.

< 자이언트 > 는 영화 < 이끼 > 처럼 한국사회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천용덕'을 보여주었다. 서울의 조필연이 지방의 천용덕과 함께 한국사회를 뒤틀리게 만든 그 결과가 지금의 한국사회를 낳았다. 그들의 가장 나쁘고도 무서운 점은 단지 폭력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 그것을 또 폭력과 탐욕으로 유지시켰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수법을 복제하고 선전해 널리 유통시킴으로써 그들과 같은 방식의 부의 창출을 '사회적 표준'으로 용인토록 해 같은 부류를 양산해내고, 반복되는 기만을 통해 패배의식을 조금씩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는 점이 더욱 무서운 것이다.

사실 권력과 폭력이 공존한다고 말로 들었을 뿐 그것을 실제로 한 화면에서 보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임에도 그에 오롯이 분노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 폭력의 과정에서 거의 도둑맞듯 국민들이 낸 세금이 여기저기로 흩어져 그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는데도 그렇다. 설사 현재 한국사회의 모든 조필연을 단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각자의 자리에서 분노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 분노마저 없으면, 우리는 < 자이언트 > 처럼 그런 악인의 몰락을 판타지로 밖에 즐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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