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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좋은 음악

작은 거인,이 시대의 가왕,조용필! 운명같은 사랑을 했던 부인 안진현을 잃고 목놓아 울다!

by skyrider 2012. 1. 20.

새해 첫눈 오는 날 떠난 조용필의 아내, 안진현씨 가다| 감동을 주는 글
재너미 | 조회 901 |추천 0 | 2003.02.28. 00:30
새해 첫눈 오는 날 떠난 조용필의 아내, 안진현씨 가다
“그래도 마지막 이틀을 아내와 보내 다행이다”

마지막 날 아내 안진현씨는 조용필이 끓여준 미역국을 맛있게 먹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미국에서의 장례식은 뷰잉(Veiwing)으로 끝을 맺었다. 조용필은 희고 붉은 장미꽃으로 가득 찬 아내의 관을 덮었다. 그리고 서울로. 유해와 영정이 놓인 장례식장은 눈물바다였다. 화성의 장지에서 진행된 하관식까지 오열은 이어졌다. 그러나 이젠 떠날 때, 사랑하는 이여, 안녕!

워싱턴
장례식, 불교식으로 진행되고 뷰잉으로 마무리
이별은 바람처럼 가볍지 않았다. “잘가오. 당신….” 조용필은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가는 아내에게 짧은 작별 인사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아내의 다정하던 얼굴은 자꾸만 눈가에 어른거렸다.

국민가수 조용필의 부인 안진현씨(미국명 웨덜리 안)의 장례식이 열린 지난 1월 7일(현지시간) 오후 3시.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 인근 페어팩스시티의 에버리 장의사(Everly Funeral Home) 안은 그를 보내고 싶지 않은 이들의 무겁고 슬픈 마음으로 가득했다.

의식은 불교식으로 진행됐다. 향 내음과 독경 소리가 식장의 허공을 채웠다. 집례자인 고성스님(메릴랜드 저먼타운 소재 한국사 주지)은 영문 설법을 통해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그를 보내고 싶지 아니하다”면서 쉰다섯, 업장을 소멸하고 사바세계를 떠나는 여행자의 영혼과 유족의 위로와 평안을 간구했다.

고인의 유족 대표로 샌디에이고에서 온 사촌동생은 “모든 고통 다 잊으시고 좋은 세상으로 가시길 바란다”면서 누구보다도 따뜻했던 누님을 회고하다 자꾸만 목이 메었다. 고인의 친동생인 안진영씨(40·미국명 제니퍼 안)는 “지난 12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병원에서 받은 심장수술이 잘돼 언니가 올 봄에는 형부와 여행도 함께 다니며 쉬고 싶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며 애통해했다.

안씨는 일요일인 지난 5일(현지시간) 저녁 6시 15분 워싱턴 인근 메릴랜드 주의 포토맥 자택에서 요양하다 유명을 달리했다. 이날 오후 3시경 심장에 이상을 일으켜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병원으로 옮겨 심폐소생술을 받고 엑스레이 촬영을 위해 방을 옮기던 중 심장이 완전히 멎은 것. 바깥에는 새해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장례식에는 남편 조용필과 그의 처제 안진영·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부부를 비롯한 처갓집의 9녀 1남의 형제들이 참석, 고인이 가는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 식장을 메운 1백50여 명의 조문객들은 그가 누구보다도 풍성한 삶을 산 여인이었음을 말해주었다. 유족뿐만 아니라 고인이 절친했던 미국인 친구들, 남편 조용필의 벗들도 참석해 돌아오지 않을 긴 여행을 떠나는, 다감했던‘웨덜리’에게 꽃을 바쳤다.

조씨의 처갓집 식구들의 애도는 조문객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장모 안병옥씨(74)는 든든한 맏딸의 급작스런 죽음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손만 내젓다 탈진상태를 보였다. 그러자 조용필이 다가가 장모를 얼싸안고 위로했다. 슬픔의 극치는 그녀와 전남편 사이에에서 태어난 딸 웨인 양이었다.

조용필은 초췌했다. 중년의 세월에 상심이 덮씌워져 그의 얼굴은 깊은 주름을 만들었다. 그는 검은 양복 차림의 상복에 흰 장갑을 끼고 조문객들을 맞았다. 몇몇 기자들이 다가가 위로를 건네고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그는 손사래만 칠 뿐이었다. 기자들도 차마 더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조용필은 조문객들을 맞는 틈틈이 아내가 누워 있는 관으로 다가가 고인이 좋아했던 장미꽃을 놓아주고 옷깃을 여미며 마지막 사랑을 바쳤다. 아내의 얼굴에다 귀를 대고 그의 음성을 들으려는 듯도 했다. 1년의 6개월은 처갓집이 있는 워싱턴에서 보낸 조용필이었다. 함께 골프도 치고 한국 마켓에서 김치도 사던 친구 같던 아내는 그러나 아무 말이 없었다.

장례식은 미국식 의식인 뷰잉(Veiwing)으로 끝을 맺었다. 조문객들은 관 앞으로 다가가 고인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조용필은 조문객들이 바친 희고 붉은 장미꽃으로 관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관은 덮였다.

아랫동서인 김창준 전 의원과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면서 조용필은 기자들에게 두 마디를 건넸다.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져 남긴 말이 없어 더 안타깝다.” “그래도 마지막 이틀을 (아내와) 함께 보냈다.” 그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차에 올랐다.

안씨의 유해는 다음날 고인의 뜻에 따라 화장됐다. 그가 머문 지상의 마지막 순간, 겨울볕은 따뜻했다. 조용필은 지난 1월 9일 아내의 유골을 안고 달라스 공항의 트랩에 올랐다.
글·사진 / 이종국(재미 언론인)

“갑작스런 죽음에 할 말 잃어, 남편 오는 날을 기다렸던 듯”
조용필의 처제인 안진영·김창준 전 연방 하원의원 부부

김창준(전 미국 연방 하원의원)
오후 3시경 처제한테서 전화가 왔다. 처형이 토하는 게 체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급히 조지워싱턴 대학병원으로 옮겼다. 5시에 다시 처제한테서 전화가 왔다. 처형이 안 좋다는 것이었다. 농담인 줄 알았다. 아내와 서둘러 병원으로 가는데 숨이 멎었다는 연락이 왔다. 저녁 6시 15분경이었다. 처형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심장이 멎어 심폐소생술을 받고 깨어났다가 다시 엑스레이 사진을 찍으러 가는 도중에 숨이 멎었다.

너무나 급작스런 죽음이다. 우리는 죽음을 맞을 아무런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처형과 동서(조용필)는 금슬이 너무 좋았다. 처형은 유서를 남겼다. 독실한 불교도라 평소 화장을 원해 화장을 택했다. 건강이 회복되면 동서와 여행도 다니고 사회봉사도 많이 할 것이라고 했다. 동서뒷바라지도 열심히 할 거라 했다. 동서가 올 때까지 기다리다 간 게 아닌가 싶다. 동서가 온 다음날 죽었다. 너무 가슴 아프다.

안진영(워싱턴의 광고대행사 이미지미디어서비스사 대표)
최근 들어 언니 심장이 안 좋아 심장병에 권위 있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병원에서 지난 12월 19일 수술을 받았다. 한동안은 수술을 망설였다. 그러나 수술을 받으면 내년 봄부터는 형부와 여행도 함께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응했다. 의사는 수술이 잘됐다고 했다. 언니는 2주 만에 집(워싱턴 D.C. 인근 메릴랜드 주 포토맥으로 부촌)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몸이 안 좋아져 D.C.의 조지워싱턴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언니는 이 대학의 이사다. 그후 음식도 잘 먹고 얼굴도 환해져 역시 언니는 강한 사람이라며 농담도 했다. 형부(조용필)는 토요일(4일) 오후에 이곳에 도착했다. 시간이 허락되는 한 달 반 동안 간호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이모가 간병해온 언니는 “이제 형부가 해주는 밥 먹게 생겼다”며 좋아했다. 사망한 날인 지난 1월 5일 아침에는 형부가 끓여준 미역국을 맛나게 다 비웠다.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고 해 엄마가 갔더니 밥 잘 먹었다고 자랑도 했다 한다. 눈이 많이 온 날이었다.


서울
인천공항 침묵으로 조용필을 기다린 팬들
지난 1월 10일 인천공항. 조용필이 입국하는 F 게이트 앞에는 슬픈 침묵이 흐르고 있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위대한 탄생’ 팬클럽 회원 40여 명과 취재진 30여 명이 그를 기다렸다.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팬클럽 회원들은 하얀 국화꽃 한 송이씩을 든 채 가슴에 ‘근조’라는 리본을 달고 침묵 속에서 조용필를 기다렸다.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기 때문에 침묵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팬클럽 운영위원 김동익씨의 말처럼….

가수 데뷔 3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계획하던 팬클럽 회원들에게 안진현씨의 소식은 날벼락과 같았을까! 밀려드는 슬픔을 주체하지 못한 채 눈시울을 적시고 있는 팬들은 터져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오후 5시 20분에 도착 예정이었던 비행기는 오후 5시 44분에야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조용필의 입국 시간이 다가올수록 팬들과 취재진의 숫자가 점차 늘어났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슬픔을 가슴에 묻은 듯 고개를 푹 숙인 조용필이 고 안진현씨의 유해와 영정을 앞세우고 입국장으로 들어섰다. 그는 울음을 참고 있던 팬들의 ‘힘내세요’라는 외침과, 한꺼번에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뒤로한 채 3~4분여 만에 인천공항을 빠져나갔다. 고인의 영정과 유해는 인천공항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실렸고, 조용필도 서둘러 차에 올라탄 후 장례식장이 있는 강남성모병원으로 출발했다.

강남성모병원 슬픔에 주저앉아 울어버린 국민가수
오후 7시 40분, 조용필이 고인의 유해와 영정을 앞세우고 장례식장으로 들어섰다. 이상벽, 박세리, 신승훈, 이덕화, 김혜자 등 낯익은 이름들이 보이는 40여 개의 화환이 장례식장의 슬픈 분위기를 더하는 듯했다. 하얀 국화꽃으로 뒤덮여 있는 빈소에 고 안진현씨의 영정과 유해가 안치되었다. 스님들의 시다림(불자 가정이 상을 당했을 때 스님이 와서 염불을 하거나 법문을 하는 의식)이 시작되고 ‘나무아미타불’을 함께 염송하던 조용필이 힘에 부친 듯 끝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의 부축을 받아 별실로 자리를 옮긴 조용필은 오후 8시 15분에 ‘감사의 뜻’이라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아내에 대한 기억과 슬픔으로 말을 이어가던 조용필은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다시 한번 울음을 터뜨려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아내를 위해 노래를 만들고 싶습니다. 가수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고인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오후 9시, 어느새 1백여 명으로 불어난 위대한 탄생 팬클럽 회원들이 별실에서 조용히 조용필을 기다리고 있었다. 힘든 몸을 이끌고 팬들 앞에 선 조용필. 자신보다는 울고 있는 팬들을 위로하는 자리였다.


“여기까지가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어요. 아내를 위해 좋은 음악을 하는 것이 고인에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팬들은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대신에 제가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팬들과 함께 눈물을 흘린 조용필은 팬들과의 자리를 마친 다시 별실로 자리를 옮겼다. 만남의 자리를 마친 팬들은 일부는 집으로 돌아가고, 일부는 발인까지 보기 위해 장례식장에 머물렀다. 팬들의 진정한 사랑은 어려운 일이 생길수록 더욱 빛을 발했다.

“부산에서 올라왔어요. 발인까지 보고 내려갈 예정입니다”라는 한 아주머니 팬은 “우리들을 생각해서라도 음악 활동은 계속 해줬으면 좋겠어요”라고 기원했다.

고 안진현씨의 유해가 있는 빈소에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많은 조문객들이 방문했다. JTL, 주철환 교수, 김수미, 장나라, 도올 김용옥, 신화, 김경호, 박광현, 신승훈, 김종서, 유열, 비, 박진영, 조성모, 유익종, 임하룡, 이문세, 이선희, GOD, 전유성, 진미령, 미나, 남궁연, 정재욱 등의 연예인과 이상용, 이금희, 송영길, 국회의원 강성구 등의 조문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오후 10시쯤 조용필은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을 위해 접대 장소에 다시 나타나 감사 표시를 했다.

화성시 송산면 장지 슬픔 속에 아내를 가슴에 묻고 말았다
1월 11일. 9일부터 시작된 3일장을 마치고, 고 안진현씨의 유해가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장지로 떠나는 날이었다. 장지로 떠나기 전 병원에서는 조용필과 여동생 등 유족들만 참석한 차분한 분위기에서 영결식이 진행됐다. 전날부터 빈소를 지켰던 팬들은 영결식이 끝나고 영정이 나갈 때 국화 한 송이씩을 들고 통로 양쪽에 서서 꽃길을 만들어줬다.

12시 30분에 일행은 장지에 도착했다. 고 안진현씨의 흔적이 땅에 묻히는 순간, 조용필은 끝내 하관식을 보지 못했다. 유족과 팬들도 하관식 내내 오열을 해 떠나는 이를 가슴에 묻는 아픔을 보여줬다.

성모병원 빈소에서 밤을 꼬박 샌 탤런트 김수미씨와 가수 김경호 그리고 팬들이 고 안진현씨가 떠나는 마지막까지 함께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조용필의 눈에서 눈물이 마를 날이 없던 하루였다.

글 / 최영진(자유기고가) 사진 / 이용기


“아내를 위해 ‘만남’을 주제로 노래를 만들려고 합니다”
강남성모병원에서 만난 조용필의 사부곡(亡婦哭)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저뿐만 아니라 가족들 모두 놀랐습니다. 마침 제가 미국에 있던 5일에 이런 일(임종)이 일어났습니다. 국내에서 많은 분들과 매스컴이 관심을 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뒤돌아볼 경황이 없었습니다.

화장은 고인의 뜻대로 한 것입니다. 장지는 예전에 선산에 성묘를 다니면서 ‘여기는 당신 자리, 여기는 내 자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정해놓은 곳입니다.

현재 심경은? 기자회견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슬픔을 같이해주셔서 인사차 이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장례식을 끝내고 나면 안정을 되찾을 것 같습니다.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마음이 듭니다. 올 상반기에 낼 새 앨범이 추모음반이라는 소리가 있는데, 예전부터 와이프에 대한 노래를 만들고 싶었어요. 전 세계 유명가수들이 그랬듯이 저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올해 이런 일이 생겨서 꼭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가 아내와 만난 지 10년째 되는데, ‘만남’이라는 주제로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임종은 지켰는지? 갑작스런 일이었기 때문에 병원에 데리고 들어가자마자 제가 오열을 터뜨렸어요. 의사들이 저를 밖으로 밀어냈어요. 10여 명의 의사가 나온 후에 저는 마지막 순간을 봤습니다.

마지막 이틀 동안 나눈 이야기는? 예술의전당 공연 때문에 수술할 때 떨어져 있었어요. 10시 이후에는 병원에 통화가 안 돼서 연락을 못 했는데, 국제전화로 수술 결과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본인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빨리 완쾌해서 함께 놀러가자고 장소까지 정했습니다. 그녀가 먹고싶다는 미역국을 끓여줘서 기뻐요.

고인에 대한 기억은? 처음 만났을 때 결혼 상대자라는 생각을 했기에 인연이 닿았던 것 같습니다. 부부지간은 남들이 질투할 만큼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했어요. 하지만 살면서 떨어져 있던 시간이 많았다는 게 무척 아쉽습니다. 저에 관한 모든 것을 아내에게 맡겼어요. 그것이 다른 부부와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저도 주위 사람들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 이주일씨 임종 당시 왜 병원에 안 왔나? 아내의 수술 때문에 클리블랜드의 있느라고 병원에 가지 못했습니다. 아내의 심장이 좋지 않은 것은 3년이 조금 안 됐어요. 두 번에 걸쳐 수술을 했고, 이번이 마지막 수술 단계였는데, 무척 놀랐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장례식을 끝낸 후 마음을 잡고 정리할 것이 있습니다. 처가 쪽에서도 할 일이 있어요. 다다음주(1월 넷째주) 정도에 미국에 갈 예정입니다.

고인과의 추억이 있다면? 심적으로 어려울 때 나를 대해줬던 마음속의 여러 가지를(울음)….

고인에게 한마디 해준다면? 저는 음악이 있기 때문에 음악을 하는 것이 고인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주철환교수가 조용필에게 보내는 편지
“용필이 형, 흔들림 없이 가요계의 산맥으로 남아줘요”

용필이 형 제가 언제부터 형을 좋아했는지 알아요? 대학교 3학년 때인가! 용필이 형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전국적인 히트곡이었어요. 술자리에서는 모두 이 노래를 신청해서 함께 부르고 그랬었는데, 저는 그때부터 용필이 형을 흠모하는 팬이 됐어요. 제가 1983년 MBC에 입사한 후에 용필이 형을 만날 수 있었죠. 술자리나, 방송국에서 인사드리고 하면서 가깝게 지내게 됐는데, 그때 형은 정말 술을 잘 드셨는데….

용필이 형을 볼 때마다 저는 ‘스타는 이래야 된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스타는 어떤 어려움을 겪고, 또 어떻게 이겨내는지를 형은 온몸으로 보여주잖아요. 스타 지망생에게는 용필이 형이 교과서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 연예인들은 자신의 분야 외에도 여러 곳에 눈길을 두는데, 용필이 형은 자신만의 노래에 온몸을 바쳤고 성공하셨어요. 저는 형이 너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1999년 평양민족통일음악회에 용필이 형과 함께 가고 싶었어요. 당시에 용필이 형이 공연 계획이 잡혀 있어서 함께가지 못했는데, 지금도 형은 그것에 대해 나에게 많이 미안해하던데. 이제는 미안해하지 마요. 제가 형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가수 조용필’에 관한 분석의 글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한 신문에 투고한 대중문화 분석글에서 형에 대한 글을 읽고 좋다고 말씀하셨쟎아요.

벌써 용필이 형이 가수로 활동 한지 35년이 됐네요. 남들은 이제 형이 많이 외로울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방송국 관계자나 팬들은 아직도 형을 믿고 있어요. 짧은 시간 동안 반짝하는 연예인과는 달리 형을 믿어주는 팬들과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잊지 말아주세요.

형! 앞으로 50주년, 70주년 대중가요에 산맥처럼 흔들림 없는 바위로 살아남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