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훈씨, 만나 뵌 적도 없는데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무례하다 생각지 마시기 바랄 뿐입니다. 저는 MBC의 프로듀서고, 50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음악 나누는 일’이 제 깜냥임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입니다.
한겨레 칼럼에서 당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야만의 시대, 그 한복판에 당신이 있음을 기억했습니다. 큰 수술을 받으셨군요. “생존확률 50%”…. 아무 것도 해 드릴 수 없는 저로서는 그냥 멀리서 쾌유를 바랄 뿐입니다. 어서 쾌유하셔서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꼭 보셔야 합니다.
“21년 전 그 사건 이후로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어. 특히 그 사건이 터진 5월만 되면 몸과 마음이 다 아파”라 하셨군요. 저도 아픕니다. 황당한 누명을 덮어 쓴 채 20년 넘게 견뎌 온 강기훈씨의 아픔에 감히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있음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 온 또래입니다. 제가 서너 살 위인 것 같군요. 죄 없는 사람의 인생을 망쳐놓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뻔뻔함…. 거짓이 진실을 뒤덮은 이 어둠은 왜 이렇게 긴 걸까요?
91년, 당시 29살이던 당신을 TV에서 보았습니다. 그때 인상은 “참 환하게 잘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지인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당신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작곡을 꿈꾸는, 섬세한 감성의 젊은이였다고요. ‘유서대필’이라는 소설 같은 이야기, 아니, 소설이 될 만한 개연성도 없는 황당한 거짓말이 당신의 꿈을 아직도 목 조르고 있습니다. 21년이 지났는데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50살이 된 당신은 앙상하게 말라가고 있다고요. 통탄할 일입니다.
그때 얘기를 되새기는 게 괴로운 일인 줄 잘 알지만, 간략히 회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명지대 신입생이던 강경대 군이 전투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목숨을 잃은 게 91년 4월 26일. 노태우 정권은 젊은 전경 몇 명을 구속하는 것으로 넘어가려 했고, 아무도 강경대 군의 죽음에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분노한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당시 MBC노조 집행부였던 저도 거의 매일 거리에 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지 말고 살아서 투쟁하자”고 호소했지만 청년 학생들의 분신이 이어졌습니다. “여러분, 죽지 말아요!! 살아서 함께 싸워요!!” 연세대 교정에 쩌렁쩌렁 울리던 문익환 목사의 절규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1991년 5월 강기훈 씨가 명동성당에서 필적을 실연해 보이고 있다.
그런데 시인 김지하가 5월 6일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우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그는 젊은 목숨이 스러져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게 아니라 목숨 걸고 민주화 투쟁에 나선 분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이틀 뒤 서강대 박홍 총장이 기자회견에서 “죽음의 배후세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김기설씨의 죽음과 유서…. 검찰은 당신을 자살의 배후로 지목하고, “유서를 대필했다”고 우겼습니다. 민주화 운동 세력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서 정권의 위기를 넘겨보려는 꼼수였습니다.
검찰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인 국과수의 필적 감정이 엉터리임이 밝혀졌는데도 그들은 거짓말을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사람이 죽는다는데 유서를 대신 써 주는 게 가능한 일인가?”라는 당연한 질문은 무시됐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가장 앞장서서 비난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민주 인사들의 항변도 묵살됐습니다.
“저는 결백합니다. 검찰 출두하는 것은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당신의 표정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상식 있는 사람들은 모두 확신했습니다. “강기훈은 무죄입니다! 진실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러나 저들의 뻔뻔함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살방조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이 선고됐고, 형이 집행됐습니다.
1, 2, 3심 판사들이 검찰의 손을 들어 준 것은 “모든 민주 인사들이 거짓말쟁이”라는 선언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신에 대한 유죄 선고는 모든 상식 있는 국민들에 대한 명예훼손과 다름없었습니다.
출소 후 진실을 밝히려는 당신의 노력은 계속됐습니다. 검찰, 국과수, 법원, 그리고 제가 몸담고 있는 언론…. 양심 없는 그들의 완고한 카르텔에 홀로 맞선 긴 세월,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을지 저는 잘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몰상식과 파렴치의 이 시대, 침묵조차 죄가 될 수밖에 없는 시절입니다.
당신을 TV에서 다시 본 건 2002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월, 죽음의 배후’ 편에서였습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미국, 일본, 한국 세 나라의 전문가에게 필적 감정을 의뢰하여 “유서를 대필한 게 아님”을 증명했습니다. 고(故) 김기설씨의 아버지도 출연, “유서의 필적은 기설이 것이 분명하다”고 증언했습니다. 후배 홍상운 PD가 만든 이 다큐에서 당신은 40살이었습니다. “저보다 더 큰 피해자는 기설이죠.” 한결 성숙하고 담담한 모습이었지만, 91년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은 채 힘든 길을 가고 계시구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영방송에서 한 시간 다큐로 진실을 말했는데도 대답 없는 메아리였습니다. 허위 조작의 당사자인 노태우 정권만 나쁜 게 아니구나, 3년형을 다 살게 한 김영삼 정권, 10년이 지났는데도 진상규명을 외면하는 김대중 정권 모두 똑같이 나쁘구나, 생각했습니다. “유죄가 확정됐고 실형을 살았으니 이미 끝난 사건”이라는 무책임의 공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세월이 또 흘러 2009년, 천신만고 끝에 서울고법의 재심 개시 결정을 이끌어 내셨군요. 검찰은 이례적으로 즉시 재항고했고, 사건은 양창수 대법관에게 배당됐다고요.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대법원은 감감무소식이라니…. 변호사가 “빨리 결정해 달라”고 탄원서를 제출했고, 기자들이 취재 차원에서 진행 상황을 알아보려고도 했지만 대법원은 한 마디 대꾸도 없다고요. 유무죄를 다투는 ‘재심 판결’이 아니라 ‘재심 개시’ 결정을 해 달라는 건데, 특별한 이유 없이 3년 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한겨레 기사를 읽으면서 속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우리 사회 정의(正義)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대법원의 한심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딱 한 걸음 남았을 뿐입니다. 양심의 최후 보루 대법원이 신속히 응답하기를 저도 함께 기원하겠습니다.
91년, 악마의 조작 사건이 벌어진 그 해와 지금 2012년, 세상이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비정한 권력과 자본의 세상, 수많은 노동자, 농민, 자영업자들이 고통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인간의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진실이 햇빛 아래 드러나는 날이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힘을 내고 손을 잡읍시다.
요즘 클라리넷 음악을 좋아하신다고요. 모차르트는 언제나 클라리넷을 통해 따뜻한 마음을 표현했지요. 오페라에서도 사랑의 감정을 담아 노래할 때 꼭 클라리넷 소리가 납니다. 클라리넷은 높은 음역에서는 찬란하게 빛나고, 낮은 음역에서는 깊이 있게 울립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사람의 목소리를 닮았습니다.
이미 아시는 음악이겠지만,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5중주 A장조 K.581의 느린 악장을 보내 드립니다. 당시 유명한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친구 안톤 슈타틀러를 위해 쓴 곡입니다. 주옥같이 아름다운 이 음악, 강기훈씨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 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클라리넷 협주곡 A장조 K.622도 들어보셔요. 이 곡도 안톤 슈타틀러를 위해 만들었습니다. 모차르트가 사망하던 해인 1791년 10월에 작곡했습니다. 그가 완성한 마지막 협주곡인데, 가장 아름답기 때문에 ‘백조의 노래’라 부르기도 하죠. 2악장 아다지오는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 나온 적도 있어요. 알프레드 프린츠의 클라리넷, 칼 뵘 지휘 빈 필하모닉 연주입니다. 차분한 템포가 맘에 듭니다. 클라리넷의 아름다운 음색을 충분히 느끼게 해 주는 연주입니다.
따님이 호른을 전공하신다고요. 다음엔 따님과 함께 들으실 호른 음악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수험생 따님이 음악을 진정 사랑하는 훌륭한 음악가로 자라는 것을 지켜보며 함께 해 주셔야 합니다. “음악을 하고 싶었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잘 가꿔서 언젠가 따님과 함께 클라리넷과 호른의 듀오를 연주하셔야 합니다.
진실이 고음의 클라리넷처럼 명료하게 반짝이는 그날, 강기훈씨의 이름 앞에서 ‘유서 대필’이라는 주홍 글씨는 사라질 것입니다. 음악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따뜻한 인간 강기훈의 이름을 곧 되찾게 되실 거라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