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대선후보 TV토론에서 이정희 후보가 “외교의 기본은 나라의 주권을 지키는 것”이라면서 “충성혈서를 써서 일본군 장교가 된 다카키 마사오. 한국 이름 박정희. 친일과 독재의 후예, 뿌리는 속일 수 없다"고 말한 이후 ‘다카키 마사오’가 인터넷과 SNS를 달구며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본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지만 정작 박정희의 친일행적은 고사하고 그의 창씨명조차도 미처 들어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한 연구에 의하면 역대 정권 중 반일감정을 정권 유지에 가장 잘 활용한 정권은 1위가 이승만, 2위가 박정희였다고 한다.
실제로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친일파들과 손잡은 장본인이고 박정희는 본인 스스로가 ‘천황의 군인’이 된 인물이었는데도 국내 정치에서는 이처럼 반일주의자로 화려하게 변신했으니 국민들의 반일감정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한일전이 열리는 축구장에서나 발휘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소설의 형식을 빌리기는 했지만 사실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 <그해 5월>에서 이병주는 극중 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카키 씨는 일본 최후의 무인이란 거야. 패전과 더불어 국내(일본 - 글쓴이)에선 무인이 전멸했는데 무인다운 무인이 한국에 존재한다는 거지. 그런 만큼 일본인으로 봐선 귀중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데 어찌 우리가 가만있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그 모임(다카키 대위를 지키는 모임 - 글쓴이)을 발기한 취지라나?”며, “일본 육사 나온 사람 가운데 정권을 잡은 사람은 장개석과 박정희 단 두 사람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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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연합뉴스 |
그러나 장제스는 박정희와 달랐다. 장제스는 1906년 북경 인근의 유명한 바오딩(保定)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에 유학한 후 1909년부터 1911년까지 일본군에서도 근무했다. 그러는 동안 장제스는 쑨원이 도쿄에서 조직한 반청 비밀결사인 중국동맹회에 가입해 있으면서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곧바로 중국으로 돌아와 혁명군을 이끌다. 장제스와 박정희 모두 일본 육사와 일본군에 복무했지만 삶의 지향은 정반대였던 것이다.
1874년 개교하여 1945년 패전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패교될 때까지 군국주의 일본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지만 정작 자기 나라에서는 수상 한명 배출하지 못한 일본 육사. 하지만 나이 초과로 입학조차 할 수 없었던 식민지 조선인이 혈서까지 써가며 제 발로 찾아와 패전 때까지 일본과 운명을 같이 했으며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자신의 옛 상관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더니 급기야 한일협정을 통해 대륙을 떠나온 지 20년 만에 다시 대륙 진출의 길을 터 준 박정희였으니 일본 육사 출신들은 물론이고 일본 정객들의 성원과 기대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박정희는 5·16 군사 쿠데타 직후인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직전 일본 수상이었던 기시 노부스케를 만난다.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국에서 산업부 차관, 총무청 차장을 지냈고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일본 수상을 지내는 등 ‘쇼와의 요괴’로 불린 악명 높은 군국주의자였다. 그는 패망 후 A급 전범으로 사형당한 도조 히데키 등과 더불어 당시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5명의 일본인 실력자 중 하나였다. 특히 아이카와 요시스케(만주중공업개발주식회사 사장), 마쓰오카 요스케(남만주철도 총재)와 함께 기시 노부스케는 ‘만주 삼각 동맹’이라고도 불렸을 만큼 만주국 최고 실세였다. 패망 후 처벌을 면한 그는 1955년 일본 수구 정치의 상징인 자민당 창당에 앞장섰으며 일본의 전쟁을 영구히 금지한 평화헌법을 고칠 것을 주장한 군국주의자 중의 군국주의자였다. 이런 기시 앞에서 박정희는 이렇게 말한다.
“마치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청년 지사와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품고 그분들을 모범으로 삼으려 합니다.”
박정희가 말한 메이지 유신의 지사들은 바로 정한론을 펼친 사이고 다카모리, 조선침략의 원흉으로 불린 이토 히로부미 같은 인물들이었다. 또한 대통령 자리에 오른 1963년에는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에서 또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명치유신은 그 사상적 기저를 천황 절대제도의 국수주의적인 애국에 두었다.”
“명치 혁명인의 경우는 금후 우리의 혁명수행에 많은 참고가 될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이 방면에 앞으로도 관심을 계속하여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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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3월 박정희의 형이 구미면사무소에 제출한 ‘임시육군군인(군속)계’. 박정희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으로 기록돼 있다. ⓒ정운현 전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
5.16 쿠데타가 지향하는 바가 명치유신과 쇼와유신의 목표와 다르지 않음을 숨기지 않고 있는데 이에 대한 일본 정객의 화답은 이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피차에) 부자지간을 자인할 만큼 친한 사이. 대통령 취임식에 가는 것은 아들의 경사를 보러 가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기쁘다.” (오노 반보쿠 중의원 의장이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도쿄를 떠나며 기자들에게 한 발언)
이런 박정희에 대해 일본의 지원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가 작성한 <한일 관계의 미래>(1966.3.18.)라는 특별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일본 기업들이 1961년~1965년 사이 당시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2/3를 제공한 바, 각 개별 기업의 지원 금액이 각각 100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에 이르며 6개의 기업이 총 6600만 달러를 지원했다. (중략) 한일협상을 증진시키기 위해 김종필에게 지불되고, 또한 여러 일본기업들에게 한국 내에서의 독점권을 부여하는 대가로 지불된 것뿐만 아니라 민주공화당은 또한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기업으로부터도 지불을 받았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정부 방출미 6만톤을 일본에 수출하는 과정에 개입한 8개의 한국회사가 민주공화당에 11만5000달러를 지불했다.”
18년간 철권 통치한 독재자의 친일경력이 아직도 생소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금, 일본에서는 극우주의자 하시모토가 이끄는 신생정당이 자민당 등과 연정을 통해 정권을 잡을 전망인데 그 정당의 이름이 바로 일본 유신당(Japan Restration Party, JRP)이다. 한국과 일본에서 ‘유신’세력이 동시에 부활하는 불행은 막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