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만에 열릴 예정이던 남북당국회담이 개최 하루 전 무산된 이유로 지목된 양측 수석대표간의 ‘격’ 문제를 두고 남북간의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우리 통일부 장관의 상대로는 ‘격’에 맞지 않다는 북한의 수석대표의 직급이 과거 장관급회담에서도 대부분 동일한 직급이거나 낮은 경우까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 정부가 통일부 장관의 상대로 북한의 수석대표를 김양건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장(당 중앙위원회 비서 겸직)이 나와야 한다고 요구한 것은 지난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장차관 또는 당국회담에 대해 인정하지 않기 위함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번 회담에 앞서 열렸던 판문점 실무접촉에서 우리측 실무대표단은 북측에 “남북관계 총괄부처의 장인 통일부 장관이 회담에 나갈 것이며, 북한도 이에 상응하는 통일전선부장(김양건)이 나오도록 요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측이 통보한 당국회담 대표단의 수석대표는 강지영 조평통 서기국장이었으며, 우리측은 김남식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북측에 통보했다. 북측은 강 국장이 상급(장관급)이므로 남측도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어야 한다고 수정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우리측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북측이 대표단 파견을 보류해 회담은 개최 하루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전격 무산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빚어졌다.
남북간 회담 무산의 쟁점이 된 강지영 조평통 서기국장의 직급을 두고 우리 정부는 부처의 차관급 또는 차관보급 수준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지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당시 개최했던 21차례 남북장관급 회담과, 두차례 남북차관급회담, 두차례 남북당국회담의 남북 대표단 면면을 분석한 결과 북측 수석대표는 조평통 부위원장급이 5회 파견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평통 서기국 제1부국장이거나 해외동포위원회 국장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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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7년 5월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렸던 제21차 남북장관급회담. 사진 왼쪽이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 ⓒ남북회담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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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장관급회담의 경우 우리측 수석대표인 통일부장관을 상대한 북측 수석대표는 모두 ‘내각책임참사’였으며, 이들의 북한내 직급은 전금진(전금철) 조평통 부위원장(1~4차 회담) 4회, 김령성 조평통 서기국 제1부국장(5~13차 회담) 9회, 권호웅 조평통 사무국장(14~21차 회담) 8회이었다. 내각책임참사는 북한 내각에 통일, 남북관련 부처가 없어 회담을 위해 임명되는 일종의 무임소장관 격의 직책으로 알려져있다.
차관급 이하 당국회담의 경우 1998년 4월 중국 북경에서 열린 남북당국대표회담에서는 정세현 당시 통일부차관을 상대로 북측 수석대표로는 전금진(전금철) 조평통 부위원장이, 이듬해 6월 열린 1차 남북차관급회담에서는 양영식 통일부차관을 상대로 박영수(사망) 조평통 서기국 제1부국장이 북측 수석대표로 나섰다. 2005년 5월에 열린 ‘장관급회담 재개를 위한 남북차관급회담’에선 남측에선 이봉조 통일부 차관이, 북측에선 김만길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이 수석대표로 회담을 했다. 2001년 10월 개최된 금강산 관광 제1차 남북당국간회담에선 우리측에서 조명균 통일부 국장이, 북측에선 김택룡 내각사무국 부장이 수석대표로 나왔다.
25차례에 걸친 남북간의 당국자 회담에서 이렇게 북측의 수석대표가 조평통 서기국 부국장 또는 사무국장이었던 것은 실질적으로 대남관계를 총괄하는 곳이 조평통 서기국이며, 실제 그 격도 상급(장관급)이라고 북한측에서 설명해왔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조평통은 13일 회담무산에 대해 낸 담화문에서 ‘조평통 서기국’에 대해 “명실공히 북남관계를 주관하고 통일사업을 전담한 공식기관”이며 “지난시기 북남상급회담 단장으로 내각 책임참사의 명의를 가진 조평통 서기국 1부국장이 통일부 차관(장관)을 늘 상대해왔다”고 밝혔다.
이 같은 남북 수석대표간의 회담은 모두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이뤄졌다. 이 때문에 우리 정부가 북한 대표단 가운데 수석대표 격을 문제 삼는 것은 김대중, 노무현정부 때 이뤄놓은 남북관계 성과를 모두 폄훼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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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남북장관급 회담 수석대표 비교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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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청와대 관계자는 회담이 무산된 직후 지난 11~12일 기자들에게 “더이상 굴종적인 회담을 하지 않겠다” “글로벌 스탠다드한 회담을 해나가야 한다” “내용보다 형식이 더 중요하다”는 등의 언급을 하기도 했다. 이 관계자는 12일 저녁엔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충분히 구분할 수 있는 분들이 그것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고 양비론을 주장하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북한의 잘못된 부분을 명확하게 지적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북한책임론을 역설했다.
이를 두고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은 13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웃기는 사람들”이라며 “자신들이 잘못해놓고 나서 이렇게 잘못한 일을 지적하지도 못하게 하려느냐”고 비판했다.
이 전 장관은 “정 정권의 일을 이렇게까지 폄하하려 드느냐”면서 “지금 와서 북한문제를 뒤집어놓고 남북관계를 어떻게 개선하겠다는 것이냐. 정말 대화 진정성이 있는지 묻고 싶다. 뭘 잘했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이 전 장관은 과거 장차관급 회담시 북측 수석대표가 대부분 ‘내각책임참사’ 자격으로 나왔으나 실제 북한 내 직책은 ‘국장’이 많았던 것을 두고 “북한 체제의 제도적 특성을 볼 때 (‘국장급’은 무리없이 나왔던 것”이라며 “북한 조평통의 서기국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개 국장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최룡해의 경우 인민군 총대표인데 직책은 총정치국장으로 돼있다. 조평통의 경우 직제에 서기국만 있는데 ‘서기국장’은 우리로 치면 사무총장급으로 봐야 한다”며 “북한 직제를 북한에서 쓰는대로 받아들여야지 우리 개념대로 판단해선 안된다”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이를 모를리 없는 통일부가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이제 좀 솔직해져야 한다”며 “국민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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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남북차관급 또는 당국회담 수석대표 비교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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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김행 청와대 대변인은 “우리는 대북관계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게 원칙에 따라 한다는 것”이라며 “많은 전문가들도 서기국장을 ‘차관급’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본다. 과거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한 평가는 언론사마다 입장이 다르다”고 반박했다.
김 대변인은 “형식도 중요하며 형식이 내용을 규정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며 “청와대가 새로운 남북관계의 틀을 (주도적으로) 잡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밝혔다. 남북회담 무산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반응이나 언급은 없었다고 김 대변인은 전했다.
황호석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사무관은 “내각책임참사가 장관급이냐에 대한 논란은 과거에도 있었는데, 북한이 상급(장관급)이라고 밀어붙여서 받아준 것일 뿐”이라며 “회담 대표라는 것은 대사와 특사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인데, 인사권자의 인사권 행사를 존중할 것인지 굴종외교로 받아들일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김양건 나오면 장관 내보내겠다’는 취지로 말한 것은 어느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비난할 수도 이해할 수도 있다”며 “체제의 차이에서 나오는 불협화음”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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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오전 서울그랜드힐튼 호텔에서 '남북당국회담' 현수막이 철거되는 장면.
ⓒ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