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밀했다던 한-중 정상 대화록이 공개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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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7일 오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를 하고 있다. 2013.06.27 청와대사진기자단 |
곽병찬 대기자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⑯
지난주 재미있는 그림판 두개를 소개합니다.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에 들어가 귀중품을 압수한 다음날입니다. <경향신문>은 ‘꿩 대신 닭?’이라는 주제의 만평을 실었습니다. 꿩이란 4대강 문제로 주목을 받던 이명박 전 대통령을 말합니다. <중앙일보> 만평 역시 ‘왜 우리만 갖고 그래’라는 전씨의 있을 법한 항변을 담았습니다. 29만원밖에 없다던 그의 집과 아들들 집에서 수억원대 미술품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할 말은 없겠지만, 만평 속의 전씨는 이명박 전 대통령은 비켜 가면서 자신만 볶는 것이 아무래도 불만스러운가 봅니다.따귀 빠지고 기름 다 빠진 ‘엔엘엘(NLL) 정쟁’에 신물이 나 있던 터에 사실 요즘 최고의 관심사는 이른바 ‘전땅크’ 집안의 쏟아지는 재산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님은 멋진 한 방을 날렸습니다. 국회에서 넘어온 추징 시효 연장을 위한 개정 법률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하면서 한 말이었죠. “도대체 과거 정부는 (전씨의 추징금 문제에 대해)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홈런은 아니지만, 만루 상황에서 터진 1루선상을 흐르는 안타이기에 효과는 대박이었죠. 물론 이 돌직구가 이명박 정부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 대상은 맨날 ‘역사 바로세우기’를 주장하면서, 수천억원을 꿀떡하고도 대명천지에 활개치는 전씨에 대해 1원 한 푼 추징하지 못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두고 한 말이었겠죠. 특히 그 사람들은 아버지마저 피살당해 사고무친이었던 자신이 넘겨받은 6억원에 대해 얼마나 시끄럽게 떠들었습니까. 민주당 정권의 무능과 허구를 이렇게 잘 받아친 것은 근자에 없었을 겁니다.민주당으로선 대꾸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실 두 정부는 ‘동진 정책’이다, ‘대연정’이다 하여 이른바 티케이(TK: 대구·경북) 쪽과 결합하기 위해 애걸복걸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티케이 출신 비서실장을 두고 동진정책을 지휘하게 했고, 노 전 대통령은 아예 대놓고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에게 대연정 결단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환심을 사려 하다 보니, 티케이를 자극할 수 있다 하여 전씨의 추징금 문제에 대해 은근슬쩍 넘어간 것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원칙을 지키지 못하다 보니, 그사이 추종자들은 전씨를 찬양하고 다니며 기념관 사업 등을 추진했고, 심지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북한군에 의해 조종되고 저질러졌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전씨는 진짜 구국의 영웅이 되는 겁니다. 전씨 추징금 국면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님의 원칙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원칙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전략전술도, 원칙을 지키지 못한다면 임기응변에 불과합니다.그즈음 <문화일보>는 이런 보도를 했습니다. 6월27일 한·중 정상이 만찬 회동을 할 때 양국 정상이 음식엔 손도 안 댄 채 90분간 긴밀한 이야기를 나눴고, 주제는 한반도 통일 문제였다는 겁니다. 그동안 한·중 사이에 한반도 통일 논의는 금기였습니다. 사실 언급 자체가 불가능한 사안이었죠. 북한과는 형제국이자 혈맹관계인 중국이 어떻게 남쪽과 남쪽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통일 논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로서도 중국과 통일 논의가 매우 민감한 문제입니다. 중국으로선 주한미군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한국이 미국에 대중국 포위를 위한 전진기지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 몹시 불쾌해합니다. 미국 중심의 ‘미사일 방어 구상’에 한국이 들어가는 것은 물론 미국 항공모함이 한국 영해에서 작전을 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지극히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주한미군이 여하한 경우에도 한반도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게 중국의 생각입니다. 한때 중국의 관영매체인 <환구시보>에 주한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한반도 통일을 거론하는 칼럼이 실렸다가 난리가 난 적이 있습니다. 천기누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한미군은 중국으로선 목덜미 아래의 칼날입니다. 미국에 쿠바의 소련 기지와 같은 것이겠죠. 그런데 우리와 동맹 관계인 미국의 입장에선 어떨까요. 자신을 빼고 준적국인 중국과 한국 정상이 주한미군 문제를 논의하는 것 자체에 대해 두드러기 반응을 보일 겁니다. 좋은 말은 안 나올 게 뻔하니까요.그래서 저는 ‘깊숙한 논의’를 믿지 않는 편입니다. 물론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관훈토론회에서 ‘긴한 논의’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깊숙하다’는 것은 남쪽 주도의 통일 논의와 미사일 방어 계획이나 주한미군 철수 문제의 거론을 전제할 때 가능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과연 거기까지 갔을까요. 전 회의적입니다. 그러나 모든 관측을 떠나서 그게 사실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그 한·중 정상의 격의 없는 대화가 누군가에 의해 시시콜콜 다 공개됐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그야말로 외교적 대혼란에 빠질 겁니다. 한국과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직접 이해당사자인 북한과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님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한국은 외교적 기아로 버려질 것입니다. 자원이나 자본 혹은 무력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는 처지에서, 의존할 건 외교인데 한국의 외교력은 파탄나게 되는 겁니다.진실로 긴밀한 논의가 있었건, 설사 건질 내용이 별로 없는 대화였건 정상 간의 대화는 공개돼선 안 됩니다. 그게 국제관계에서 확고한 원칙입니다. 얼마나 중요하다고 판단했으면 법률로도 대못을 박아놓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대화록의 공작적 유출 및 활용에서 시작해 님의 정부 아래서 기이하기 짝이 없는 대화록 발췌문 및 전문의 잇따른 공작적 공개, 국가기록원 원문 열람 의결, 국가기록원의 대화록 실종 논란 등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정상적인 국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요?이 문제는 노 전 대통령의 문제가 아닙니다. 박근혜 정부의 문제입니다. 대통령직은 유신 정권처럼 영구집권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임기는 5년입니다. 님은 4년 반 뒤 퇴임합니다. 퇴임 후도 고려해야겠지만, 이 나라의 백년대계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엔엘엘 정쟁을 속히 종식시켜야 합니다. 선거 때부터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건의 핵심은, 전임자가 후임자를 위해 국정원에 남긴 대화록을 국정원이 정치공작에 활용한 일입니다. 별문제도 없는 것을 멋대로 발췌하고 멋대로 해석해 정치공세에 이용한 것입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진짜 안 좋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대화록 실종 논란으로 이어졌으니, 윤창중 사건에 이어 세계적인 웃음거리를 하나 더 선사한 셈입니다.엔엘엘 정쟁은 종식시키되 국정원의 선거 및 정치 공작은 발본색원해야 합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근본을 부정하고, 헌법과 법률이 정한 원칙을 훼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씨 추징금 문제 하나로 원칙이 세워지는 건 아닙니다. 어쩌면 이 문제가 나라의 뼈대를 세우는 데 더 중요합니다. 서울대 교수들도 시국선언에 동참했더군요. 서울대라고 특별하게 여기는 건 아닙니다만, 성명의 제목과 내용이 시민의 여망을 적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일독을 권합니다. “우리는 상식이 통하는 정상국가 대한민국을 원한다”로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비정상·비상식·무원칙 상태라는 겁니다.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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