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사-자료창고

이승만의 제1호 정적이란 이유로 대한민국 최초의 용공조작,공작정치,사법살인의 최초 희생자가 된 진짜 보수주의자, 최능진선생!

by skyrider 2015. 3. 5.
▲ '비운의 민족주의자' 최능진.
지난 일요일(3월 10일) 깊은 밤의 일이었다.

기자는 MBC TV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날 밤에는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편이 방영되었다.

노덕술.

지난 2월 28일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들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됐던 노덕술은 '악질적인 친일경찰의 대명사'로 인구에 회자돼온 인물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노덕술에 대한 본격적인 조명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다큐멘터리의 방영은 반민특위(反民特委)가 이승만 일파에 의해 해체되면서 미뤄졌던 '역사법정'이 53년만에 다시 개정(開廷)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제시대에 '일경(日警)의 호랑이'로 불리며 수많은 독립지사를 고문하고 살해했던 고등계 형사 노덕술. 그러나 해방 직후 그는 역사의 심판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미군정이 급조한 수도경찰국(국장 장택상,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후견인) 수사과장으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어디 그뿐인가. 1946년 봄 수도경찰국이 수도경찰청으로 승격하며 수사국장으로 승진한 노덕술은 자신을 체포하려는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거꾸로 반민특위 위원들을 암살하려는 가공할 음모를 꾸미기까지 한다.

요즈음으로 치면 서울경찰청의 '실세'가 된 노덕술의 독립지사 미행, 체포, 고문 '노하우'는 이때부터 다시 한번 유감없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해방된 조국에서 수많은 독립지사들이 친일경찰 노덕술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고문, 살해당하는 이율배반과 적반하장의 시대가 그 서막을 올린 것이다.

한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노덕술을 박처원(박종철 군 고문살해 은폐조작 사건의 주범), 이근안('백곰' '고문기술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김근태 의원 고문 등을 주도한 인물)으로 이어지는 '고문경찰 계보의 원조(元祖)'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말할 수 있다>를 지켜보고 있던 기자의 시선 안으로 문득 걸어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TV 화면에 얼굴 사진이 잠시 떠올랐다가 사라진 인물, 그는 바로 '비운의 민족주의자' 최능진(1899∼1951)이었다.

일석(一石) 최능진(崔能鎭).

그는 여러 가지 면에서 노덕술과 대조적인 인물이다. 1945년 10월 수도경찰국의 본청인 경무국(국장 조병옥) 수사과장으로 취임한 그는 이듬해 경무국이 경무부로 승격하면서 수사국장으로 승진한다. 경무부에 들어오자마자 그가 제일 먼저 주장한 것은 친일경찰 청산이었다. 따라서 조병옥, 장택상, 이승만 등 친일경찰 비호세력과 사사건건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최능진은 그 대가로 친일헌병 출신임에도 한국 군부의 실세로 떠오른 김창룡이 주도하는 군사법정에서 총살형을 당하는 비운의 최후를 맞아야 했다.

그렇다면 최능진의 삶과 죽음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부터 기자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코드로 그 진실을 찾고자 한다.

(1) 공산당의 검거선풍을 피해 38선을 넘다

최능진은 1899년 평남 강서군에서 부유한 지주이자 기독교도인 최경흠의 4남으로 태어났다. 출신성분이 부유한 지주이긴 했지만 집안의 분위기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다. 우선 그의 두 형 최능찬과 최능현은 평남 사천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주도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은 전력이 있다.

특히 최능현은 감옥에서 탈출해 중국으로 건너가 윤봉길 의사와 함께 폭탄을 제조하는 실험을 하다 폭발사고로 생명을 잃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집안 내력에서 '계몽적 민족주의자'(최능진 연구가인 진덕규 교수의 표현) 혹은 '양심적 우익분자'로서의 최능진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다.

1915년 평양 숭실중학을 졸업한 최능진은 중국으로 건너가 금릉대학에 잠시 적을 두었다가 1917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프링필드대학과 듀크대학 체육학과에서 수학한 뒤 4년만에 졸업한 그는 워싱턴 YMCA 체육담당 간사를 맡는 한편 도산 안창호가 이끌던 흥사단 운동에도 참여했다.

12년 동안의 체미(滯美)는 최능진으로 하여금 이승만의 정체를 간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대외교를 통한 독립운동, 독립운동세력 내에서의 파벌주의와 분열주의 조장 등 이승만의 정치행태를 지켜보며 그의 '반이승만' 의식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30세가 되던 1929년 귀국해 평양숭실전문학교 체육과 교수로 부임한 최능진은 1937년 흥사단 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나중에 친일경찰 청산논쟁을 벌일 때 반대편에 섰던 조병옥이 당시 그의 감옥 동기였다.

최능진은 1945년 해방이 오자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위원장 조만식, 부위원장 현준혁) 치안부장을 맡았다. 당시 그의 나이 47세였다. 그러나 그해 9월 13일 발생한 현준혁 암살사건으로 우익세력에 대한 검거선풍이 불자 이틀 후 10여 명의 추종자와 함께 38선을 넘는다. 그가 월남한 데는 서울에서 정당 활동을 하겠다는 동기도 있었다.

(2) 친일파 청산을 외치다 친일파 비호세력에게 당하다

"남조선에서는 아직도 친일 부역 경찰 출신이 그대로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모양입네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이가!"
"다른 건 몰라도 북조선에선 친일파 청산 하나는 확실히 하고 있지 않습네까?"
"그러게 말이야.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 아닐 수 없구만기래."
"남조선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갔습네다."
"내 이 놈들을 그냥 두지 안캈어!"


▲ <조선일보> 기자 출신 조덕송의 저서 <머나먼 여정>의 표지. 최능진이 친일경찰 청산에 적극적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1945년 9월 15일 월남 도중 해주에 도착한 최능진은 동지들과 남조선 신문을 처음으로 구해서 읽다가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남한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뛰어든 곳이 바로 경찰계였다. 능숙한 영어 솜씨를 활용해 미군정에 스스로 접촉해 얻어낸 첫 직장인 경찰관강습소 책임자로 취임한 그는 곧바로 '해주 구상'을 실천에 옮겼다.

다음은 <조선일보> 사회부장 출신인 조덕송이 자신의 저서 <머나먼 여로-언론외길 반세기의 증언>(도서출판 다다, 1989) 제2권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그가 경찰관강습소 책임자로 취임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강습소에 남아 있던 일제 총독부 경찰 출신자들로부터 사표를 받아낸 일이었다."

친일경찰 청산을 몸소 실천에 옮긴 최능진은 약 한 달 후 미군정이 경무부를 창설하자 수사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 경무부 부장은 이승만과 밀착해 있던 한민당의 보스 중 한 명이자 그의 옛 동지인 조병옥이 맡고 있었다.

최능진은 그곳에서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가 친일파 출신을 경찰계 요직에 등용시키는 것을 목격하고 다시 한번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덕술이 수도경찰청 수사국장에 취임한 것을 비롯해 이익흥, 최운하, 최연 등 일제시대에 악명이 높았던 친일경찰 간부들이 요직에 속속 중용된 것이다.

최능진은 곧바로 친일경찰 퇴진을 주장했다. 친일 전력 족쇄 때문에라도 자신들에게 절대 충성하리라 기대하며 그들을 중용했던 조병옥과 장택상이 즉각 반발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때 나온 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그 유명한 친일파 옹호 발언이다.

"일본경찰 출신이라고 모두 Pro-JAP(친일파)이 아니라 생계를 위한 Pro-JOB이었다"(조병옥)
"경찰은 기술직이므로 어쩔 수 없다"(장택상)


친일경찰 청산문제를 둘러싸고 사사건건 논쟁을 벌이던 최능진과 조병옥·장택상이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46년 10월 1일부터 대구 일원에서 발생한 10월항쟁이었다. 이 사건의 진압 책임자였던 조병옥은 10월 7일 '대구지방 소요사태에 대한 경위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이 사건을 "좌익세력의 불순한 파괴적 정치활동에 선동되어 일반시민이 가담한 폭동사건"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직접 현지로 내려가서 면밀하게 조사를 실시한 최능진의 입장은 전혀 달랐다. 결국 그의 강력한 요구와 이를 수용한 김규식 박사의 제안으로 '대구사건의 원인규명과 대책수립을 위한 한미공동회담'이 열렸다. 최능진은 증인으로 출석해 자신이 직접 조사한 내용을 거침없이 증언했다. 다음은 당시 회담에 참석했던 송남헌 씨(김규식 박사 비서실장)의 증언이다.

"최능진 씨는 폭동을 일으킨 좌익을 철저히 다스려야 하지만, 그런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요인이 경찰 자체에도 내재해 있다고 진술했지요. 다시 말해서 일제시대의 고등계 형사들이 해방 후에도 버젓이 경찰에 몸담고 있어 일반 양민의 원성을 사고 있으니 그들을 숙청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공동회담은 한 달 동안 계속됐고, 공동결의문까지 작성해 미군정의 하지 중장에게 전달했다. 이 결의안에 최능진의 증언이 대부분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12월 5일 하지 중장은 "친일파 출신을 조사해서 경찰에서 배제하거나 파면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한미공동회담의 조선측 대표였던 김규식 박사 등은 조병옥 경무부장의 책임을 물어 그를 즉각 파면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도 자신들의 충직한 하수인의 목을 치라는 이 요구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조병옥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고, 최능진이 그 화풀이의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최능진을 "경찰사기를 떨어뜨리고 위계질서를 무너뜨린 유해한 인물"로 몰아서 사직을 강요했다. 최능진은 이를 거부하고 한동안 정상근무를 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조병옥의 파워에 밀려 결국 12월 5일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최능진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경찰복을 벗으며 그 유명한 '대(對) 조병옥 성명서'를 발표한 것인데, 요지는 다음과 같다.

"귀하는 당연히 현직을 사퇴하여 3천만 민중 앞에 고두(叩頭) 사과하는 동시에, 속죄의 의미로서 8·15 이후 불의(不義) 취득한 재산을 전재(戰災) 동포를 위하여 제공한 후 해방 전의 애국자 조병옥으로 돌아가기를 충고한다."

이에 맞서 조병옥과 장택상도 최능진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 공개적인 성명전이 불을 뿜으며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당시 신문이 이 희대의 성명전을 대서특필한 것이다. 물론 민중은 최능진에게 절대적인 지지의 박수를 보냈다.

특히 최능진이 마지막 성명서에서 밝힌 "조병옥·장택상 씨가 경찰 행쟁을 한민당의 책동에 의하여 자행해 온 것은 사실이다…일제 주구가 일조일석에 애국자가 되어 민중의 지휘자가 될 수 없다"는 내용이 알려지면서 서민 대중 사이에서 최능진의 인기는 하늘을 치솟기 시작했다.

(3) 이승만의 마키아벨리즘을 예견하고 정면으로 맞서다

친일 전력을 가진 일부 세력은 지금까지도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켜세우느라 여념이 없지만 그가 한국 민주주의에 끼친 해악은 엄청나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우매한 한국 민중은 그 정체를 깨닫지 못했다.

이승만의 독재주의를 이미 예견하고 그의 대통령 취임을 아예 초기부터 막으려 했던 인물이 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최능진이다. 그는 1917년부터 1929년까지 12년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이승만이 어떤 인물인지 간파할 수 있었다. 사대외교를 통한 독립운동만을 신주단지처럼 여기는 고집불통의 성격, 독선과 독단을 앞세워 독립운동세력 내에서 파벌주의와 분열주의를 조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승만을 '마키아벨리스트'로 규정한 것이다.

최능진의 '반이승만' 의식은 해방 이후 친일경찰 등 친일파를 옹호하는 그의 정치행각을 목도하며 더욱 굳어지게 됐고, 나중에는 확신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실제로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우익단체의 반민특위법 성토집회에 참여해 축사까지 하는 등 물불을 가리지 않는 망동도 서슴지 않았다.

최능진이 경찰계를 떠난 뒤 서재필 박사를 민족의 지도자로 옹립하려는 운동을 전개한 것도 반이승만 운동의 일환이었음은 물론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김규식 박사를 자주 만났으며, 김구·김규식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론'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민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독선거는 강행됐고, 1948년 5·10선거 일정이 확정됐다. 최능진은 선거일이 가까워오자 이승만의 정권장악을 막기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서기로 결심한다. 이승만이 무투표 당선을 노리던 선거구인 동대문 갑구에 자신이 입후보해서 이승만의 정체를 만천하에 폭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4) 자유당식 부정선거·관권선거·폭력선거에 최초로 희생당하다

그러나 최능진은 이승만 추종세력의 집요한 선거등록 방해공작에 시달려야 했다. 선거등록 방해공작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졸한 방식으로, 그러나 집요하게 시도됐다.

첫 번째 훼방꾼으로 나선 것은 동선거위원회였다. 당시 선거등록 구비요건은 유권자 2백 명 이상의 추천서를 받아 동선거위원회에 제출해 적법 여부에 대한 인준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동선거위원회는 최능진 선거운동원들이 추천서를 받아서 제출하면 선거위원이 없으니 다음에 오라는 식으로 둘러대면서 고의로 접수를 연기시켰다.

두 번째 훼방꾼으로 나선 것은 정치청부업자들이었다. 그들의 방해공작은 한마디로 야만적인 '정치테러'라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등록마감 직전 동선거위원회 입구에서 두 명의 괴한이 선거운동원들이 가지고 가던 추천서 가방을 강제로 탈취해 도망가버린 것이다. 이 탈취사건의 전말은 서북청년단 리더였던 문봉제가 <중앙일보> 1973년 2월 8일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서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회고한 바 있다.

"이 박사는 당시 '라이벌' 최능진 씨(전 경무부 수사국장·숭전 교수 출신)가 후보등록 마감 전날인 4월 15일 하오 추천서 꾸러미를 가방째 선관위 앞에서 날치기 당함으로써 무투표 당선됐다. 이미 알 사람은 대강 짐작했겠지만 이때 최 씨의 가방을 날치기한 2명의 괴한은 바로 우리 서청(西靑)의 성북지부장 계호순 동지 외 1명이었다."

▲1947년 10월에 입주한 이화장에서 아기사슴을 데리고 노니는 이승만. 이화장을 기증한 백성욱은 서북청년단에게 최능진의 선거등록 방해를 청부한 대가로 내무부장관에 오른다. 출전: 중앙일보 발간 <이승만의 삶과 꿈>.
물론 이들은 이승만 측근의 부탁을 받고 이런 테러 행각을 벌인 것이었다. 이들을 사주한 장본인은 이승만에게 이화장(梨花莊)을 기증한 백성욱이었다. 문봉제의 회고를 바탕으로 당시 이들이 나눴던 정치공작 음모의 대화를 재연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 박사를 꼭 국회에 보내야 하지 않겠소?"(백성욱)
"우리 서청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문봉제)
"이 박사가 출마하면 단일후보가 돼야 하지 않겠소? 경비가 얼마가 들든지 상관 말고 최능진의 출마를 막으시오."(백성욱)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문봉제)


이들은 이 정치공작의 대가로 나중에 이승만으로부터 선물을 받는다. 자유당 정권에서 백성욱은 내무부장관, 문봉제는 교통부장관, 서북청년단 단원 이성수는 백성욱의 공보비서로 발탁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승만 일파는 왜 그렇게 집요하게 최능진의 선거등록을 방해하려 했을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동대문경찰서 윤기병 서장은 사찰주임 최병용이 제출한 정보보고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유권자 지지 성향을 조사해 보니 민심이 이승만보다 최능진에게 기울어 있었던 것이다. 유권자들은 2년 전 친일경찰 청산을 과감히 주장한 정치지도자 최능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윤기병 서장은 장택상 수도청장으로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박사를 당선시켜야 한다"는 극비지령을 받은 상황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만약 최능진이 당시 선거에 출마했다면 한국현대사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이승만으로 하여금 최능진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됐던 것만은 분명하다.

(5) 용공조작·공작정치·사법살인의 최초의 희생자가 되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 정부가 출범했다. 이승만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최능진의 운명에도 짙은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정부가 출범하고 한 달 보름이 지난 10월 1일 새벽이었다. 수도경찰청 형사대가 최능진의 자택으로 난입했다.

"최능진 씨, 당신을 '내란음모죄'로 체포하오."
"자네들, 이거이 무시기 행패야. 썩 물러들 가지 않갔어?"
"잔 말 말고 따라오기나 하시오. 야, 뭐해. 이 빨갱이 자식 당장 연행해!"


최능진은 종로경찰서로 강제 연행됐다. 그에게 씌워진 혐의는 이른바 '인민해방군사건'이었다. 최능진이 서세충(독립운동가), 오동기(광복군 출신으로 14연대장 역임) 등과 연계해 국방경비대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해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할까. 최능진이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된 10월 19일 공교롭게도 여순사건이 터졌다. 최능진에게는 이 사건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까지 추가되었다.

▲ 친일경찰 출신임에도 한국군부 최고 실세로 떠오른 김창룡. 최능진은 악질적 관동군 헌병 출신 김창룡에 의해 체포되어 총살당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나중에 악질적인 친일헌병 출신인 김창룡에 의해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다. 다음은 방송작가 김교식이 저술한 <죽음을 부른 권력>(마당문고사, 1984)에 나온 내용을 근거로 재연해 본 것이다.

1970년 봄의 어느 날이었다. 동양방송 라디오 드라마 <광복 20년> 담당 방송작가로 마침 여순사건 부분을 집필하고 있던 김교식에게 한 노인이 찾아왔다.

"김교식 선생님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오셨습니까?"
"내가 바로 오동기요."


그 노인은 때때로 긴 한숨을 내쉬며 소위 '인민해방군사건'의 진상을 설명했다.

"조작입니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한 죄밖에는 없습니다. 내가 만약 공산당이었거나 공산주의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6·25 때 괴뢰군을 따라 북으로 가지 않고 나를 박해한 자들이 세도를 부리고 있는 이 땅에 남아 있을 리가 있습니까? 인민해방군, 그런 것은 있지도 않았습니다. 방송을 듣다가 여순사건 이야기가 나오기에 역사의 기록만은 사실대로 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경위가 어쨌든 당시 상황에서 최능진은 이승만 일파가 파놓은 정치공작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1심에서 3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례적으로 2심에선 그보다 더 많은 5년형을 선고받는다. 많은 사람들은 이심(李心), 즉 이승만의 심기가 반영된 결과로 분석하고 있다.

최능진의 운명은 다시 한번 역사의 격랑에 휩쓸렸다.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하고 있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인민군에 의해 서대문형무소 문이 열리면서 다른 수형인들과 함께 출옥한 최능진은 곧바로 김구, 김규식 계열 인사들과 접촉하는 한편 북한과 남한 양측에 즉각적인 동족상잔의 전쟁을 중단할 것과 유엔을 통한 평화적 통일을 추진할 것을 요구했다.

▲ 최능진이 처형되기 직전 가족에게 남긴 친필 유서. "부의 금일 운명은 정치적 모략에서 비롯됨"이라는 대목이 보인다.
역사의 조류는 다시 바뀌었다. 미군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역전된 것이다. 최능진은 9·28 서울 수복 뒤 납북될 것을 우려해 숨어 지내는 한편 남한 정객들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당시 19세였던 그의 장남 최필립(전 스웨덴 대사)의 증언에 의하면, 최능진은 이승만, 이기붕, 조병옥에게 "조국 재건에 정적이 있을 수 없다"는 서신을 보내 화해를 모색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 일파는 최능진의 화해 요구를 일축했다. 도리어 그해 11월 그는 당시 최고의 권력 실세로 군림하고 있던 김창룡(군·경·검 합동수사본부장)에 의해 구속됐다. 한 양심적 민족주의자에 대한 '정치보복'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군사법정에 선 최능진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1951년 2월 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 파동.

경상도의 어느 산골마을 골짜기에 열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52세의 역량 있는 정치지도자 최능진의 심장을 겨냥한 총성이었다.

최능진은 죽기 전에 가족에게 유서를 남겼는데, "부(父)의 금일 운명은 정치적 모략에서 비롯됐다…정치사상은 혈족인 민족을 초월해 있을 수 없다…군인이 정치사상의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5) 최능진과 그 유족의 운명적 아이러니가 역사의 두려움을 증언하다

그렇다면 최능진의 유족들은 그후 어떻게 됐을까.

▲ 최능진의 유족들. 장남 최필립과 미망인 이풍옥 여사의 모습이 보인다.
미망인 이풍옥 여사는 43세에 과부가 되어 '빨갱이 가족' 소리를 들으며 5남매를 힘겹게 길렀다. 덕분에 장남 최필립은 1970년대 초반 남북적십자회담에 참여하고 스웨덴 대사를 지내기도 한 외교관으로 성장했다. 3남 최만립도 대한체육회 부회장과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체육계의 거물이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불행한 운명은 그의 손자 대에서 발생했다. 최능진의 손자이자 최필립의 아들인 최우석이 <조선일보> 기자가 된 것이다. 물론 최능진의 손자라고 해서 <조선일보> 기자가 되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자가 볼 때 최능진의 손자가 2001년 세상을 어지럽힌 족벌신문 사주일가 탈세사건과 관련해 핵심적 인물로 부상한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최우석은 당시 한국을 '언론탄압국'으로 규정하며 일방적으로 족벌사주를 옹호한 IPI(국제언론인연맹)의 정회원이자 결의문 작성위원으로 눈부신 활약을 한 바 있다. 한국에서 평기자 출신으로 IPI 정회원이 된 것은 그가 유일하거니와, IPI 정회원은 주로 언론사 사주나 주필, 편집국장, 보도본부장 등 핵심 간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IPI 정회원이 된 비결은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방우영 회장을 보좌하기 위한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언론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조선일보>는 어떤 신문인가.

첫째, 이 신문과 사주일가는 용서받을 수 없을 만큼의 친일 원죄를 가지고 있다. 이번 친일파 명단 발표 때도 이 신문은 다른 대다수 언론과 달리 그 역사적 의미보다 방법론상의 일부 문제를 부풀려 시비를 거는 반민족적 행태를 보였다. 민족정기 세우기보다 사주일가의 체면을 중시한 셈이거니와, 현 사주일가의 조상인 방응모가 친일파 명단에 포함된 사실과 무관치 않다.

둘째, 이 신문은 1994년 국사교과서 개편시안 논쟁 당시 대구에서 발생한 10월사건에 민중항쟁적 성격이 있다는 것을 넣어야 한다는 시안에 대해 '색깔논쟁'을 벌인 전력이 있다. 1946년 당시 대구를 취재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마크 게인(<일본일기> 저자)의 보도에 의하면 경찰행정과 식량행정, 친일경찰 고문행위, 친일파 처리문제, 통역정치의 폐단, 군정관리의 부패문제가 이 사건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당시 지배세력인 미군정과 친일파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면서 발생했다는 반증인 셈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최능진은 마크 게인처럼 대구 10월항쟁이 친일경찰의 민중탄압 등으로 발생했다고 파악했고, 친일경찰의 청산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올바른 소리를 했다는 '죄 아닌 죄' 때문에 친일파 비호세력의 미움을 받아 경찰에서 쫓겨났고 결국에는 총살까지 당했다. 최능진의 손자가 최능진의 그런 주장을 전면 부인하는 신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 자유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셋째, <조선일보>는 최근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는 다양한 사업을 벌여왔다. 역사를 바로세우려는 최능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독재자를 찬양하는 신문을 위해 그의 손자가 봉사하는 것 역시 당연히 개인적 자유로 인정돼야 하겠지만, 역사의 아이러니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최능진의 삶과 죽음, 그 유족의 인생유전을 통해 역사는 결코 간단치 않은 것이며 참으로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 * <정지환의 인물파일>이 필자의 개인적 사정으로 장기간 침묵을 지켰던 점을 사과 드립니다. 필자는 지난 한달 동안 <오마이뉴스>에 올렸던 내용과 새로운 인물을 대폭 보강해 최근 단행본 <정지환의 인물파일 1: 대통령 처조카와 시골군수>(새움출판사)를 발간했습니다. 이번 주부터 다시 정기적으로 독자 곁으로 찾아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오늘 올린 내용은 3월 15일 오전 11시 CBS 라디오 <변상욱의 시사터치>에서 방송한 내용을 정리해 올린 것입니다.

') //]]>-->
태그: 태그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