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역대 총선거에서 원내 제일당이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한 경우는 드물지 않다. 박정희가 유신이라는 궁정 쿠데타를 통해 의석 가운데 3분의 1을 임명하기로 작정한 까닭의 일부도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일당이 원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한 경우는 물론이고 과반수를 차지한 경우조차, 유권자의 과반수로부터 지지를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국회의 역사에서 원내 제일당은 40%에도 미치지 못하는 득표율을 가지고 과반수 또는 과반수에 근접한 의석을 장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왜 그랬을까 묻는다면 답은 하나다. 나머지 정당들이 연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연대하지 못했을까? 정당의 존재 이유를 정권의 획득이라는 목표에 맞추지 못하고, “소의 꼬리보다는 닭의 대가리”가 되는 데 뒀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단체들이 서로 작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서 소 한 마리의 형상을 그려내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닭들이 서로 다투는 형국에 머물렀다.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 등을 지날 때에도 “민주”와 “진보”를 표어로 내건 정당들은 난립이 보통이었고 연대는 아주 희귀한 예외였다.

 

그나마 대통령 선거에서는 두 차례 연대를 통해 승리한 경험이 있었다. 김대중은 김종필과 연대함으로써 4전5기의 신화를 일궈냈고, 노무현은 정몽준과 연대를 통해 (그리고 정몽준의 배신에 따른 역풍 덕택에) 당선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연대는 늘 내부에서 강력한 비판에 시달려야만 했다. 원칙을 포기하고 오직 선거 승리만을 노린 야합이라는 도덕주의적 비판이었다. 노무현이 대연정을 통해 리더십의 위기를 타개하려고 했을 때도 똑같은 도덕주의가 기승을 부렸다. 민주-진보-개혁 세력의 내부에서 이와 같은 반발이 일어나면, 기득권 세력의 나팔수들은 “내홍”, “분열”, “분당”, “이전투구” 등의 상투어를 즐겁게 동원해 가면서 연대 자체를 폄하하는 왜곡된 정치의식을 확대재생산했다.

 

  
▲ 지난 8월25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2015 새누리당 국회의원 연찬회'에 참여했다. 사진=새누리당 홈페이지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기득권 동맹은 새누리당-관료-군부-재벌-법조-언론기관에 걸쳐 대단히 강고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력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껏해야 40% 정도의 득표밖에 하지 못한다. 다만 정당 득표율과 의석 분포 사이의 비례성을 원천적으로 왜곡하도록 설계된 소선거구 일등당선제에 기대서 가까스로 원내 과반수 또는 제일당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소선거구 일등당선제라고 해도, 만약 반대파가 모두 연대해서 선거에 임한다면 과거의 한나라당이든 현재의 새누리당이든 과반수 의석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만큼 이들에게 민주-진보-개혁 세력의 연대는 무엇보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2010년 지방선거에서, 그리고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민주-진보-개혁 세력의 연대는 기득권 동맹의 기세를 꺾는 데 성공했다. 그 흐름이 2012년에 이어졌더라면 총선과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는 확률도 높았다. 하지만 연대의 절차에 미리 합의하지 못했던 단견 때문에, 그리고 “이길 수밖에 없는 선거”라는 따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오만 때문에, 박근혜 정권의 등장을 막아내지 못했다.

 

원래 민주-진보-개혁이라는 대의는 각론으로 들어가면 중구난방으로 갈라지기 마련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에 반대한다는 부정문으로 쓰여진 목표에 뜻을 같이 하면서도, 해방된 조국을 누가 어떻게 주도할 것이냐고 하는 긍정문으로 써야 할 목표에는 이전투구를 벌였던 독립운동의 역사가 그랬다. 군부 독재에 반대할 때는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 같았던 동지들이 민주화된 정부의 구체적인 형상에 관해서는 끝내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 민주화의 역사도 그랬다. 지배자의 편에서 볼 때 잠재적 경쟁 세력이 서로 싸우도록 만드는 것만큼 효과적인 전략은 따로 없다. 그래서 동양말로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서양말로는 분할통치(divide and rule)라는 것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이다.

 

통진당 해산을 위한 예비공작으로 시작된 “종북” 매카시즘은 전형적인 이이제이 전략이었다. 한국 정치사에서 해방 직후부터 수도 없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후까지도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너무나 뻔한 이이제이의 전략이었다. 그럼에도 일부 당원들의 “정신 나간” 발언 몇 마디를 덩달아 성토했던 자칭 진보 지식인들과, 통진당 편만 들지 않으면 “종북”이라는 낙인에서 면제될 줄 알았던 민주당(또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순진하고 유치한 어리석음 덕택에 그처럼 낡아빠진 전략이 통했다. 그 결과 세월호 참사의 진상조사를 요구해도, 교학사 교과서를 반대해도, 마냥 “종북”이라는 딱지만 붙이면 마구 짓밟을 수 있기에 이르렀다.

 

  
▲ 지난해 12월19일 통합진보당 정당해산 판결후 이정희 대표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이 사회에 진실과 정의가 작동하는 폭이 더 넓어지고, 사회적 약자의 생존권과 생활권과 발전권이 보호를 받고, 인류만이 아니라 지구라는 생태계 전체가 건강한 균형을 찾아 공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내부적으로 개조되어야 한다는 명분에 민주-진보-개혁 세력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이견과 논란이 불가피하다. 이러한 이견과 논란은 노선 투쟁과 자리다툼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고, 모든 집단의 내부에서 항상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문제들을 미리 다 해결한 다음에나 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래서 말이 안 된다. 이명박이나 박근혜만이 유체이탈화법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의 말버릇 역시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증좌에 해당한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연대는 일차적으로 4년 동안 무슨 일을 할 것인지를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는 연대가 아니라, 당장 4년 동안 중점적으로 할 일 몇 가지를 유권자에게 호소할 수 있는 정도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 정도로 소박한 단기적인 목표에서도 민주-진보-개혁 세력을 망라한 합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본질주의적 자세로 합의가 안 될 때, 절차주의에 따르는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심상정 정의당 당대표, 천정배 국회의원이 지난 10월 21일 신촌 유플렉스 앞에서 열린 ‘국정교과서 반대 대국민 서명운동’에 참석해 시민들의 서명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사진=새정치민주연합
 

이제 총선은 6개월 앞으로 다가 왔다. 정의당이 연합정부를 고리로 삼아 선거연대를 제안한 것은 자체로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아무 생각 없이 시간만 허비하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 그런데 왜 새정치민주연합은 반응이 없는 것일까? 정의당이 나름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여론전을 벌이는 데 장단 맞춰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라면 참으로 무능한 정당이다. 정의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서로 주도권 다툼이나 벌이는 수준에 머무르는 한, 180석 이상을 은근히 엿보는 새누리당의 호언장담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예상하기도 어렵거니와 (도대체 누가 2012년에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예상할 수 있었단 말인가!), 예상하기도 싫을 뿐이다.

 

선거연대는 승리의 보증수표가 아니라 승리의 실낱같은 가능성을 열기 위한 유일한 좁은 문이다. 단순한 선거연대보다는 정책연대가 물론 바람직하지만, 정책연대가 안 된다고 해서 선거연대까지 걷어차는 짓은 제 발등을 스스로 찍는 셈과 같다. 정책연대든 선거연대든 어려운 대목을 일단 접어두고 합의가 가능한 대목부터, 합의가 가능한 만큼씩 공통분모를 축적해 나가는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아주 소중하면서도 희소한 자원이다. 절차적 합의가 빨리 이뤄져야 연대의 효과도 커진다. 절차적 합의가 빨리 이뤄져야 절차에서 패배한 측이 불복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

 

따지고 보면, 바로 이와 같은 형태의 연대야말로 다름 아닌 민주주의의 본모습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가 민주주의에 어긋난다고 성토하기는 쉽지만, 김대중이나 노무현이나 문재인이나 안철수나 심상정의 지지 세력이 내부에서 얼마나 민주적이었느냐는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현재 민주-진보-개혁 세력이 얼마나 자체적인 동력에 따라서 연대를 이룰 수 있는지는 정확히 장차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사회가 얼마나 민주적으로 흘러갈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지표와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