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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컬럼,글

대선 때 노무현을 안 찍었던 유권자가 노무현 사후 노무현을 연구한 감회의 글!

by skyrider 2016. 12. 28.

          

한강려
난 노빠도 아니고 대선에서 노무현 찍지도 않았습니다. 죽고 난 뒤에 그를 연구했습니다.

  (1) 노무현은 최고권자로서는 한국사에서 유일하게 자기 권력을 내려놓은 가장 민주적인 지도자였다. "대통령 힘들어 못하겠다"는 고백 + 검찰개혁 전 평검사들과의 맞짱토론 + 서민과의 접촉시 나타난 처신 + 퇴임 후 낙향과 지역 봉사

  (2) 노무현은 자신의 이익을 따지기보다 "옳은가"를 보았기에 당당했다. 인권변호사의 길+ 3당 합당 반대 + 전두환 청문회 + 6.10 거국 시위 + 전시작전권 회수와 국방자주권 지향

  (3) 노무현은 미국에 가장 당당한 자주적 지도자였다. 미국과 대립함으로써 초래될지도 모를 안보 불안은 남북협력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위험도를 완화했고, 미국에 대한 자주국방권 회복을 시도했으며, 전시작전권 회수 협상을 성공시켰다.

  (4)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통일에 관해 가장 합리적이고 가능한 방법을 추진했다. 북한 지역에 개성공단 100개, 경의선, 한-러 송유관, 한-중-러 나진선봉 공동개발, 송전 설비, 이산가족 상봉 상설화, 금강산 관광 등을 추진함으로써 남북간의 이질감 해소는 물론, 장차 경제협력을 심화시키고 한-중-러 컨소시엄의 형태를 구성함으로써 북한의 강경파 부상과 도발을 견제할 수 있는 카드를 확보하려 했다. 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수십년간 북한 고사정책을 고집해온 미국에 대해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태도를 단호하게 보여주었기에 가능했다.(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권의 근거 없는 "퍼주기" 주장으로 대북정책을 완전히 뒤엎음으로써 무산됐다)

  (5) 노무현은 북한 핵 해결 가능성을 최초로 보여주었다. 그는 북한 핵이 미국의 압살정책 앞에 살아남기 위한 자위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미일중러한북의 6자가 북한 체제를 보장해주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인식했다. 그리하여 2007년 6자회담에서의 2·13합의와 10·3합의로 영변 원자로를 폐쇄·봉인까지 했고, 2008년 6월에는 냉각탑까지 폭파했다.(이 역시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 뒤집기로 북핵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6) 노무현은 촌놈 출생이고, 어른 되어서도 끝까지 촌놈으로 살았기에, 가장 서민 위주의 정책을 중시했다. 종합부동산세 + 사학재별 개혁 등 (이명박은 촌놈이었지만 나중엔 귀족 행세했고, 박근혜는 태생부터 공주였고, 끝내 공주로 처신했다. 그것이 재벌에 호의적 정책으로 나타났다.)

  (7) 노무현은 유일하게 퇴임 후 낙향한 선례를 남긴 지도자였다. 권력욕이나 퇴임 후 영향력 행사를 거부하고, 지역사회에 봉사한다는 의미가 있다. (전두환이 계속 5공세력의 맹주이고, 이명박이 세를 몰고 다니는 것과 확연히 비교된다)
  (8) 노무현은 유일하게 자살했다.자살은 분명 양면성이 있다. 의로운 자결도 있고, 혐의를 받고 억울하다며 자살한 경우도 있다. 노무현의 경우 사적이기 보다는 정치적 자살이다. 굳이 안해도 될 것 같은, 살아서 싸워도 될 것 같은 상황의 자살이야말로 노무현의 강직한 성격을 보여준 사례다. 늘 스스로는 당당했지만, 가족과 친지, 친구까지 줄줄이 핍박 받는 데는 엄청나게 분노했고, 현실적인 권력을 잃은 마당에 버틸 수록 가중되는 모욕을 참는 게 더 수치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만약 살았다면 이명박이 끝내 감옥에 보냈을 것이고 전두환처럼 전과자로 구차한 여생을 살았을 것이다. 이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결백과 이명박의 부당한 정치보복을 만천하에 각인시켰다. 그 결과로서, 사후 7년이 넘어도 그의 사상과 철학은 물론 감성적 영향까지 각인되어 수많은 국민들이 그를 추모하고 있는 것이 노무현 자살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상은 노무현 연구 결과의 사적 의견을 요약한 것으로, 그도 정책적 실패 사례가 있겠지만 그건 어느 정권에서나 있는 것이므로 생략하고 노무현만의 인성, 사상, 철학, 리더십 등에서의 특징만 거론했습니다. 욕설이 아닌 논리로 비판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