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이냐" 조롱 들으며 진실 밝힌 31년
이국언 입력 2017.09.13. 15:52
[오마이뉴스 글:이국언, 편집:홍현진]
▲ 미쓰비시중공업 주주총회가 열리고 있는 도쿄 시내에서 주주들을 상대로 전단지를 배포하고 있는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 |
ⓒ 이국언 |
독도영유권 주장, 야스쿠니 신사참배, 정치 지도자들의 실언이 벌어질 때마다 일본의 행태를 지적하는 목소리들이 높다. 하지만, 정작 "너희가 일본 사람들이냐. 한국 사람들이냐? 한국이 좋으면 한국에 가서 살아라"는 조롱까지 들으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양심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일본 내 시민사회를 주목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미쓰비시로 동원된 여자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31년째 활동해 온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광주광역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는다.
광주광역시는 오는 14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2017 세계인권도시포럼 개회식에서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이하 '나고야 소송지원회')의 다카하시 마코토(高橋 信.75) 공동대표와 고이데 유타카(小出 裕.76) 사무국장에게 명예시민증을 수여할 예정이다.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와 고이데 유타카 사무국장이 근로정신대 문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86년.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치던 다카하시 마코토 교사와 고이데 유타카씨 등은 군수공업의 중심지였던 아이치현 지역의 조선인 강제연행 실태와 미군의 공습 피해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여자근로정신대'의 존재와 피해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 1944년 미쓰비시에 동원된 여자근로정신대원들. 겨우 10대 초중반의 나이 어린 소녀들이었다. |
ⓒ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
다카하시씨 등은 당시 동원된 피해자들이 불과 13~14세 정도에 불과한 어린 소녀들이었다는 데 주목했다. 아울러 1944년 12월 7일 발생한 도난카이(東南海) 지진 당시 공장 건물더미에 압사돼 6명이 어린 소녀들이 목숨까지 잃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당시 미쓰비시가 한국에서 건너 온 소녀들의 희생자 명부를 이때까지 숨겨 오고 있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느꼈다.
"저에게도 당시 근로정신대 소녀들과 같은 나이인 14세의 딸이 있었습니다. 만약 내 딸이 같은 피해를 입는다면 '아버지로서 어떤 생각이 들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교사의 양심으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곧바로 진실규명 작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당시 한국은 아직 군사정권이었고, 그들의 손에 쥐어진 것은 단지 6명의 사망자 명단 밖에 없었다. 특히 6명의 이름은 한국 이름이 아니라, 일본인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된 것이었다.
▲ 다카하시 마코토 대표가1988년 지진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 건립에 앞서 나주에서 동원돼 숨진 고 최정례의 유족을 수소문하기 위해 한국을 첫 방문해 이동련할머니를 만나는 모습. 40대 청년 교사시절이었다. |
ⓒ 이국언 |
▲ 다카하시 마코토 공동대표가 1988년 제주를 찾아 1944년 도난카이 지진에 숨진 고 김순례(광주 수창초교 졸업후 동원) 유족 김중곤, 근로정신대 동원 피해 김복례씨를 찾아 당시 사진을 보여주며 경위를 조사하고 있는 모습. |
ⓒ 나고야 소송 지원회 |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여자 근로정신대 문제는 한국사회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었다. 특히, 여자 근로정신대를 일본군 '위안부'로 오해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의 피해 사실마저 오히려 감추려 하고 있었다.
"처음엔 불쾌했었죠. 이미 몇 십 년이 지났는데 느닷없이 일본 사람이 찾아온다고 하니까 또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무릎을 꿇더니, 잘못했다고 사죄하는 거예요" (고 최정례의 유족 이경자 어르신)
▲ 도난카이 지진(1944.12.7)에 숨진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추모비 제막식에 참석한 피해자 유가족들이 추모비를 쓰다듬으며 통곡하고 있다. (1988년 12월) |
ⓒ 나고야 소송 지원회 |
추도비 건립 이후 이들은 지금까지 매년 지진이 발생한 12월 7일을 즈음해, 추도비 앞에 모여 지진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2016년 12월 행사까지 29년째다.
한편, 1997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을 통해 소송에 나서겠다는 뜻을 전해오자, 일본정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법적 책임을 묻는 일에 본격 착수했다.
▲ 피해 할머니들과 일본정부와 미쓰비시를 상대로 소장을 접수하기 위해 나란히 손을 잡고 나고야지방재판소로 향하는 모습.(1999년 3월 1일) |
ⓒ 나고야 소송 지원회 |
소송일이 3월 1일인 것은 각별한 뜻이 숨어 있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일제에 항거해 분연히 일어선 선열들의 용기와 의지를 생각하며 일부러 소송 일자를 3월 1일에 맞춘 것이다.
그러나 가정불화까지 겪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에까지 가서 재판할 만큼의 경제적 여력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정치권의 관심이나 시민사회의 지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전적인 몫은 '나고야 소송 지원회'가 자처했다. 장장 10년 동안 이어진 재판에 공식 변론 횟수만 무려 29회였다. '나고야 소송 지원회'는 재판 때마다 일본을 방문하는 원고들의 항공료는 물론 교통비, 숙박비 등을 부담해왔고, 공동변호인단은 수임료는커녕 자신의 사비까지 보태가며 무료 변론에 나섰다.
▲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는 원들들을 마중하기 위해 공항에 나온 일본 시민단체 회원들. |
ⓒ 나고야 소송 지원회 |
미쓰비시중공업의 자발적 사죄를 촉구하기 위해, 매주 금요일 본사가 있는 도쿄까지 왕복 720㎞에 이르는 원정 '금요행동'(금요시위)에 나선 것. 그러나 이런 노력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2008년 11월11일 일본 최고재판소마저 최종 패소 판결하면서 사실상 사법적 구제의 길이 모두 막힌 것이다.
투쟁을 접을 명분이야 차고도 넘쳤다. 그러나 이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정의를 외면한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지금까지와 같이 금요행동을 계속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처럼 수월한 것이 아니었다. 신간센 요금만 1인당 30만원에 가까운 돈도 돈이지만, 어려움은 비단 이것뿐이 아니었다. 일본 사회에서 이들의 목소리가 스며들 구석이 거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 '나고야 소송 지원회' 회원들이 2007년 7월부터 도쿄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매주 금요 원정시위(일명 금요행동)를 갖고 미쓰비시 측의 자발적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
ⓒ 이국언 |
10년째에 이른 금요행동은 387회째에 이르렀다. 미쓰비시중공업과의 교섭이 진행되던 기간인 2010.7~2012.7월까지 2년 동안 금요행동을 잠정 중단한 것을 제외하더라도, 만 8년이 넘는 세월이다.
윤장현 광주광역시장은 "국경을 뛰어넘어 근로정신대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나고야 소송지원회의 활동은 불의를 바로잡고 어려운 이웃을 외면하지 않았던 광주정신과 정확히 일치한다"며 이번 명예시민증 수여배경을 밝혔다.
"광주는 저에게 마음의 고향입니다. 제가 죽게 되면 제 몸의 절반은 광주에 묻고 싶습니다. 제가 죽으면 화장해서 뼈의 반(유분)은 광주 무등산에 뿌리고 싶습니다"
다카하시 마코토 공동대표가 지난 8월 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3차 소송 판결을 보기 위해 광주를 방문한 길에 남긴 말. 이 날은 1988년 근로정신대 문제로 첫 한국을 밟은 지, 꼭 100번째 방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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