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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글,뉴스

대쪽같던 총장님이 재직하셨을 때 내가 입학했다는 것이 자랑스럽네? 박대선 4~6대 연세대 총장 박대선 목사님!

by skyrider 2019. 8. 26.
우리찬 ll조회 980l 0
...구약학자 문익환, 김찬국 선생님의 선배이자 스승이신, 그리고 입시부정과 분규로 몸살을 앓던 연세대에 1964년부터 75년까지 11년 간 총장으로 계시면서, 철저한 자기 관리와 박정희 유신 독재에 저항하다 축출되신 박대선 목사님이 참으로 그리운 요즘입니다. 예레미야, 이사야, 세례 요한과 같은 진정한 예언자가 없는 이 시대에, 그의 회고록 일부 내용을 함께 나누고자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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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학원 안정을 위한 정책

연세대가 이렇게 뒤숭숭하고 산만한 분위기에 싸이게 된 원인은, 학원의 안정과 원칙이 없다는 데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학원, 특히 연세대 같은 역사가 있고 전통이 있는 큰 학원이 원칙 없이 발전하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 규정들을 새롭게 제정하는 데 신경을 썼다. (...) 누구나가 다 그 규정을 준수해 나가도록 했다.

나는 입학 시험 성적에 의하여 성적 순대로 학생의 입학을 허락하고, 금전 거래나 정실 입학의 길을 막았으며, 예외를 하나도 용납하지 않았다. 시험 출제 위원들이 입학 시험 여러 날 전에 연합신학대학원 기숙사에 들어가 합숙을 하게 되고, 외부와의 연락은 전연 금지되어 있었다. (...) 채점이 끝나면 (...) 성적순으로 석차를 만들어 합격자 명단을 총장실로 보내오게 된다. 총장이 각 대학 합격자 명단에 일일이 총장 도장을 찍는 것으로 합격이 결정된다. 총장은 자세히 검토한 후 도장을 찍는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합격하고 불합격하는 데 개입할 수가 없다. 총장 도장이 찍혔으면 합격자이고 없으면 불합격자이다. 그때까지 항간에는 “연세대는 돈이면 합격한다”는 불유쾌한 말들이 돌아서, 그 말만 나오면 학생들은 의기 소침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그러한 부정 입학을 근절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연세대 학생들이 어깨를 펴고 서울 거리를 활보하면서 다니도록 하려고 다짐했다.

1965년 내가 총장이 된 다음 처음 입학 시험을 치렀다. (...) 합격자 발표가 있은 후 총장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 다음날 총장실에 청와대에 있는 사람, 행정부에 있는 사람, 기관에 있는 사람들 7, 8명이 찾아왔다. 그 해에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형의 아들)가 입학 시험을 쳤는데 낙방했다. 그 학생 때문에 높은 어른들이 찾아 왔다. 그들은

“대통령의 아들은 아니지만, 박대통령이 존경하는 형님의 아들이 입학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국가 원수의 조카이니까 특별히 고려해서 입학을 허락해 주셔야 합니다. 당의장 사모님은 동생의 낙방을 생각하고 지난 밤 한 숨도 못 주무시고 울고만 계시니 그 어른들을 모시는 저희들로서는 너무나 난감한 형편입니다. 총장님이 특별 고려를 해 주셔야만 되겠습니다. 그러면 연세대의 발전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상당히 장시간 동안 집요하게 그 학생의 입학 허가를 위하여 떼를 썼다. 나는

“여러분의 사정을 잘 알겠고, 또 동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낙방생의 어머니들 가운데 울면서 밤을 새우고 음식을 들지 못하는 분들의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연세대학교는 입학에 관한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적에 의하지 않고 합격하는 길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걸려 그들을 설득해서 단념하도록 했다.

그 다음날에는 한 신문사 사장이 찾아와서 자기 아들이 입학 시험에 떨어졌는데, 이 아이를 꼭 받아 주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연세대 졸업생입니다. 내 아들도 동문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꼭 입학시켜 주셔야 됩니다.” (필자 주 – 조선일보 방우영인 듯... 1962년까지 상무를 하다가 1963년부터 발행인(사장)이 됨... 방우영은 연희대학 상과 출신임)

라고 생떼를 썼다. 나는

“사장님, 이번 수험생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성적순에 의하지 않고 입학한 학생이 있는 것을 지적해 주시면 사장님의 아들을 먼저 받을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동문이신데, 모교가 부정 입학이나 정실 입학이 없고 모두 실력에 의하여 합격이 되었다면 동문으로서 기뻐해야 될 일이 아닙니까? 연세대학교에 돈이나 정실로 입학한다면 어떻게 일류대학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사장님, 잘 양해해 주십시오.”

하고 이해를 구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섭섭하게 생각하였고, 그 후 내가 재임하는 동안 그러한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다.

나(박대선)의 3남이 연세대가 그렇게 좋아서 꼭 연세대에서 공부하기를 원하여, 상경대학 경제학과에 지원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낙방했다. 상경대학 교수들이 최호진 학장과 함께 총장실로 찾아왔다. 그들은 연세대학교의 심볼이 되는 총장님의 아들을 떨어뜨릴 수 없어서 상경대학 교수회에서 입학을 허락하기로 가결하였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얼마나 고마운 말인가?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학장님과 교수님들의 뜻은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학생을 입학시키는 것은 총장입니다. 나는 입시 행정에 있어서 성적순이 아니고서는 입학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들은,

“말도 안 됩니다. 총장님, 우리 청을 꼭 들어 주십시오. 우리가 연세대 교수로 있으면서 총장님의 아들 하나 입학시키지 못하면 무슨 면목으로 여기서 교수 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사표라도 내야 되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정마로 교수들의 말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왜 사표를 내야 합니까? 그러면 이렇게 하십시다. 내가 사표를 낸 후에 여러분이 마음대로 내 아들을 입학시키십시오.”

라고 했다. 교수들은 조용히 총장실을 나갔다.

내 아내나 아들은 다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것은 주위에서

“사모님, 총장님의 아들은 문제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총장 아들을 떨어뜨리겠습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하는 말들을 했고, 또 시험을 친 본인에게는

“야, 너는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 어느 대학에서 총장 아들이 낙방했다는 말 들어 보았니? 걱정하지 마!”

라는 낙관적인 말만 들려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입학이 안 되었다는 말을 듣고 모자(母子)가 의논했는지 막내 아들이 나를 찾아 왔다.

“아버님, 저 미국으로 이민 가겠습니다. 그리고 거기 가서 대학 공부를 하겠습니다. 아버님,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간청하는 것이었다. 어느 부모 치고 자식이 대학 입학 시험에 떨어졌다는 사실에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아내와 막내는 상경대학 교수회에서 입학을 허락하기로 가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남편이며 아버지인 총장인 거부해서 낙제를 시켰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섭섭하게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섭섭한 마음으로 그런 결심을 했으리라고 짐작했다. 내 아내는 미국에서 출생하여 거기서 자라고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 막내는 어머니가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 쉽게 미국으로 이민하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아들을 앉혀 놓고 강하게 훈계했다.

“네 마음과 뜻은 잘 알겠다. 그런데 지금 미국으로 이민 간다는 것은 안 돼! 너는 남자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병역 의무를 해야 된다. 네가 군대에 가서 군 복무가 다 끝난 다음에는 이민을 가든지,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든지, 마음대로 해라. 그러니 먼저 군대에 가라!”

나는 언제나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대개 다 허락했었지만, 군 복무를 하지 않고 이민 간다는 것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었다. 난처해진 막내 아들은 할 수 없이 학원에 들어가 1년 간 재수를 하고, 다음 해에 연세대 상경대학 경제학과에 재도전해서 합격했다. 그는 재학중 ROTC 훈련을 받고 졸업과 동시에 군에 들어 갔다. (...)

한 번은 청와대의 꽤 높은 자리에서 일하는 분이 총장실을 방문했다. 자기 아들이 연세대 의과대학에 합격해서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인사를 드리러 왔따는 것이다. (... ) 그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총장님, 우리 청와대에서는 총장님을 화제로 삼은 때가 있었습니다. 「연세대의 박 총장 그 사람은 냉혈 동물 아니냐?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총장으로 있으면서 자기 자식 하나 입학시켜 공부하도록 하지 못 하는가? 더욱이나 해당 대학의 교수들 전원이 입학시키자고 결의까지 해 주었는데 어떻게 피가 흐르고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총장이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는 냉혈 동물인데 어떻게 우리 귀한 아들 딸들을 그에게 맡겨 교육시키겠는가?」하고 왈가왈부하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사람들은 「박 총장이 잘했어. 교육자가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열을 올린 일이 있습니다.”

하고 이야기 해 주었고, 자기 자신도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었다. (...)

그때까지 항간에 나도는 소문으로, 연세대는 돈으로 입학할 수 있다는 말이 그런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엄격하게 입학 관리를 잘 하고 어떤 경우에든지 금품이나 배경으로 입학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연세대는 실력으로 그리고 성적 순위로 입학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정착된 것을 느낄 수 잇게 된 것을 감사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그 후부터 연세대의 전통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朴大善, 『회고록 – 하늘에서 정의가 땅에서 진실이』, 전망사, 1996, 24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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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홍종철 장관의 압력

홍종철 장관이 (...) 청와대 사정 비서관(필자 주 – 현재의 우병우 민정수석 보직과 같음)으로 있을 때, 사고를 당해서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일찍 간 것은 애석하기 짝이 없다.
하루는 그가 장관으로 있을 때 총장실로 전화가 걸려 왔다.

“박총장, 오늘 12시 정각에 외교 구락부에서 나하고 단 둘이 점심 식사를 하십시다. 꼭 나와 주세요” (...)

식사가 끝난 후, 홍장관이 나에게

“박 총장, 연세대에서는 매일 12시에 채플 시간이 있지 않소? 박 대통령의 특별 부탁인데 채플을 하루만 중단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박 총장이 설득해서 그것을 꼭 중지시키라는 대통령의 엄한 명령입니다. 자, 그러니 박 총장이 내일 하루만 예배를 중단시켜 주십시오”

라고 처음에는 명령조로 말했다. 나는,

“홍 장관님, 그것은 안 됩니다. 채플은 연세대학교의 생명입니다. 하루도 예배를 중단할 수 없습니다. 홍 장관님, 그렇게 알고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홍장관은 “연세대 한 학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정보로는, 내일 서울 시내의 모든 대학이 대대적으로 반정부 데모를 벌이기로 예정되어 있는데, 연세대가 안 나오면 그렇게 큰 데모로 번지지는 못 할 것 같지만, 만일 연세대가 나왔다 하면 이것은 대대적인 데모로 확장되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 그래서 대통령이 내게 직접 책임을 지우고 있으니, 박 총장, 내일 하루만 제발 중단해 주십시오. 만일 연세대가 채플로 인해서 대대적인 데모의 원인이 된다면, 박 총장도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라면서 공갈을 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학교를 위한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그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다. 나는 부동의 태도였다.

“홍장관님, 어떤 이유로든 채플 중단은 말도 안 되는 말씀이니까 돌아가 주십시오. 채플을 하는데 무슨 책임을 총장이 져야 합니까?”

홍 장관은 백약이 무효라는 듯한 태도로 돌아갔다.
그 다음날, 언제나와 같이 채플 시간에 예배를 드렸다. (...) 끝나자마자 총학생회 간부들이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프라카드를 펼쳐 들었다. “나가자!” 하더니 2천여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거리로 나갔다. 대단한 반정부 시위였다. 그리고 모든 대학의 학생들이 이 데모에 참가하였다. (...) 연세대가 한 나라의 문교부 장관이 채플을 하루 중단하라고 해서 중단 한다면 대학의 자유는 어디에 있고, 대학이 금과옥조와 같이 여기는 대학의 이상과 이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연세대의 교육이념, 즉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고등교육 실시도 중단할 것인가? 기독교대학의 총장은 총장직을 걸고, 기독교 대학의 이념 구현을 위해서 양보하지 말고 투쟁할 것은 투쟁해서 쟁취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

요주의 인물로 낙인이 찍혀 있는 (...) 함석헌 선생을 모시고 대강당에서 강연회를 가질 것을 요청해 오자, 학교 당국으로서는 승인을 해 주었다. 그러자 또 홍종철 장관은 전화를 걸어 왔다.

“왜 함석헌 씨를 강사로 모셔다가 학교 안에서 강연회를 가집니까?”

라면서 그것을 취소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홍장관에게

“우리 대학으로서는 학생들의 자유스러운 활동을 간섭하고 싶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더니, 그는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고

“박 총장, 문교부의 입장을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 연세대에서 문교부 방침에 대해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좀 협조해 주십시오”

하고 강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 나는

“학생들이 결정한 행사를 중지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이 계획한 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장관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내일 그 강연회장의 맨 앞자리에 앉아 그 강연을 들을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

학교에서 공적으로 허락하고, 총장이 가서 앉으면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총장이 학생들을 믿어주고 학생들이 총장을 믿어주는 데서 대화가 이루어진다. 학생들이 데모를 하다가 학교 안으로 들어와 언더우드 동상 앞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밤생을 할 때가 있다. 그 당시는 경찰들이 학교 안에는 잘 들어오지 못 할 때였다. 밤 12시가 넘으면 집에 가지도 못하고, 또 밤공기가 너무 차기 때문에 학생들을 밖에 그대로 남겨 두기가 어려워 내가 내려가서 학생들을 공관으로 불러 들인다. 그리고 공관에서 밤을 지내게 하고 아침에 따뜻한 밥을 먹여 돌려 보낸 경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을 내 자식과 같이 사랑해 주는 데 있다.

(朴大善, 『회고록 – 하늘에서 정의가 땅에서 진실이』, 전망사, 1996, 309-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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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휴업령

1965년 9월 6일, 한국 대학 역사상 처음으로 휴업령이 내려졌다. (...)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데모 주동 학생들과 교수들을 처벌하라는 명령에 불복했기 때문이다. 65년 9월 5일 아침,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윤천주 장관으로부터 총장실에 전화가 걸려 왔다.

“박 총장, 문교부에서 각 대학에 내려 보낸 학생 처벌 명단을 보시고, 오늘 오후 5시까지 결과를 보고해 주십시오.”
“장관님,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 학생들을 마구 처벌할 수 있습니까?”(...)

연세대학교의 진통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 연세대가 정부 하라는대로 따갈 수도 없고, 또 교수와 학생을 처벌하는 것은 나로서는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자세를 견지했다. (...)

(朴大善, 『회고록 – 하늘에서 정의가 땅에서 진실이』, 전망사, 1996, 416-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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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연세대 총장직 사임

나는 잠 못 이루는 밤을 여러 날 보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일은 하지 않았는가? 연세대의 이름을 더럽힌 일은 없는가? 내가 이제 이 순간에 하여야 할 일이 무엇인가? 연세대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나는 11년 동안 정들었던 연세대를 떠나려는 결심을 하였다. 그래서 나는 사임서와 함께 다음과 같은 사임 수리 요청서를 이천환 이사장(대한성공회 주교)에게 제출했다. (1975년 4월 10일)

“(...) 지난 4월 3일 재단 이사장님께 제출한 본인의 총장직 사임서를 수리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본인이 결정한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스스로가 담당하는 것만이 연세대의 안정과 발전을 위한 오직 하나 분인 봉사의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 본인의 사임은 바로 이러한 책무를 담당하는 것이라고 자부하는 바입니다. (...)”

이천환 이사장은 다음과 같은 담화문(1975년 4월 10일)을 발표하였다.

“(...) 순교자적 정신으로 자기 희생을 감수한 박 총장의 사임의 영단과 참 뜻을 살리기 위하여 지극히 유감스러우나 박대선 총장의 총장직 사임서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사임서를 제출하면서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본인은 연세대 총장의 직책에 부여된 막중한 책임을 안고 이제 부여된 마지막 결단의 시기가 왔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 이제 온갖 능력과 열정을 다 바친 연세 학원을 떠나려는 본인의 심정은 착잡하기 보다는 오히려 잔잔하기만 합니다. (...) 대학은 있어야 할 이념과 교육적 사명에 대해 언제까지나 침묵만을 지킬 수 없다는 본인의 소신은 역시 변함이 없습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현실과의 타협은 어렵지 않으나, 젊은 학생들이 갈구하는 이상을 외면할 수 없는 심정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번민스러운 것입니다. (...) ”

법무부는 나에게 4년 간의 출국정지 명령을 내렸다.

(朴大善, 『회고록 – 하늘에서 정의가 땅에서 진실이』, 전망사, 1996, 43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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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선 총장 사퇴 직후 의사 출신의 이우주 총장이 유신 말기를 보냈고, 1980년 신군부 출현 직후, 백범 김구 선생을 살해한 안두희의 사촌동생이 연세의 새 총장이 되었다. 그리고 1965년에 박대선 총장을 찾아와, 연세대 입시에 떨어진 자신의 아들을 합격시키라고 공갈친 신문사의 사장은 1997년부터 연세대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이후 이사회를 지배해 가면서 대한성공회나 한국기독교장로회 같은 마음에 들지 않는 교회의 파송 이사를 승인하지 않는 등의 전횡을 일삼다가, 결국 한국 교회 4대 교파(예장통합, 기감, 기장, 성공회)의 이사 파송 정관을 삭제해 버리면서, 연세대의 사유화 논란을 일으켰다.

방우영은, 1999년에 이화여대 길 건너편의 ‘연세동문회관’ 동문회장실에 자신의 번쩍거리는 흉상을 세워 뒀다가, 연세대 사유화 논란이 일자 2013년에 이사장을 사퇴함과 동시에, 그 흉상을 동문회관 로비로 옮겨 놓았다.(연세대, 방우영 前이사장 흉상 이전 제막식, 동문회관 1층 로비로 이전 http://media.daum.net/society/people/newsview…)

방우영은 그 3년 뒤인 올해(2016) 5월 8일에 인생을 마감했다. 그가 사장으로 있던 신문사의 종편 채널이, 최순실과 정유라 건을 처음 터트리고, 이화여대 입시 부정 문제를 세상에 드러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제 비로소 이화대학의 최경희 총장은 과거 윤인구 연세대 전총장과 같이 사퇴하고 말았다. 하지만 1975년 유신치하에서 사임한 박대선 총장의 마지막 뒷 모습은 윤인구, 최경희와는 그 역사적 무게가 천양지차(天壤之差)이다. 2010년 4월 29일, 하느님 곁으로 돌아가신 박대선 총장은, 자신의 시신마저도 의과대학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하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다.

역사는 그 뒷모습들을 기록하고 기억한다. 우리의 영애께서도 아버지의 뒤만 졸졸 쫓아가는 것 같아 답답하다. 개인사라면 괜찮겠지만 온 동포가 처절한 뒷감당을 치러내야 하니 말이다. 불행한 대한민국사의 한 페이지를 살아가고 있다. 김찬국,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구약학자로서, 시대의 참 예언자로서 살아 주신 박대선 옹이 참으로 그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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