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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글,뉴스

결혼 6주만에 사라진 남편, 드디어 68년만에 찾아보니...!

by skyrider 2019. 11. 1.




그녀 인생의 반려자라고 여겼던 사람과 결혼 한 지 거의 70년 후, 페기 해리스는 남편의 갑작스러운 실종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됐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

아마도 그것은 그 당시 시간의 차이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페기가 빌리에 대해 가졌던 강한 느낌이라는 사실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행방과 관련된 정보를 찾는 일을 멈춘 적이 없다. 결혼 후 단 6주 만에 남편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것은 아마도 궁극적인 관계의 파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페기는 마음 속 깊이 빌리가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님을 알았다. 뭔가 잘못된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다

그녀의 남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찾기 위해 페기는 팔을 걷어 부치고 깊게 파들어갈 준비를 해야 했다. 몇 년간, 페기는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고 적은 정보라도 함께 모으려고 애썼고 그것을 연결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빌리는 떠났고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줄 수 있는 증거의 작은 조각들도 떠났다. 강한 의지를 가진 여성으로서 페기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알려지지 않은 것

알려지지는 않았어도 빌리와 페기의 얘기는 진정한 사랑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페기는 긴 인생에서 많은 것을 겪어왔지만 그녀가 포기하고 싶지 않은 단 한 가지는 그녀의 하나 뿐인 진정한 사랑이다. 그들에게 던져진 굴곡진 삶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결국은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페기와 빌리의 러브 스토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았다.

 

평범하지 않은 만남

1920년대에 텍사스 주 버논에서 태어난 페기 실은 18세가 막 됐을 때 오클라호마 알터스 공군기지에서 전기 기계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 직후 그녀는 같은 기지에 부감독관으로 일하는 그의 아버지를 통해 빌리를 만났다. 빌리의 아버지는 페기와 그의 아들이 잘 맞을 것을 확신했고 그의 생각은 옳았다. 페기는 친절하고 아름답고 똑똑했다. 그러나 그녀를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다른 소녀들과는 달랐다

페기는 오클라호마 알터스 공군기지의 유일한 여성 기계공으로 매우 독특했다. 그 당시 군대에 가서 남성들이 주도하는 분야에서 혼자 일하는 여성은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페기는 그녀의 직감을 믿었고 마음이 가는 곳을 따라갔다. 다른 사람의 지지를 받고 안받고의 여부는 문제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바로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었다.



       

천국의 중매

프로펠러 부서에서 일하던 빌리의 아버지를 만난 후 페기는 곧 바로 그의 아들에게 소개됐다. 그는 페기의 엉뚱함과 고집스러움을 사랑했다. 다른 소녀들은 일상적인 화장을 하고 돈 많은 남자들을 찾아 결혼하는데, 페기는 복잡한 기계 문제를 푸는 것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그녀의 모든 시간을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이 처음 소개됐을 때, 페기와 빌리는 부정할 수 없는 인연을 느꼈다.



옛날 방식의 연애

그러나 그들의 첫 번째 만남은 정확하게 “첫 눈에 반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처음 소개될 때 두 사람이 직접 만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맨 처음 빌리와 페기가 나눈 얘기는 편지를 통해서였다. 요즘은 이런 식의 첫 만남은 자주 들어보지 못하지만 그 당시에는 멀리 떨어져 살 경우에 편지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것은 부적절했다

페기 식으로 말하면 이렇다: “생산관리부에 자리가 나서 나는 그 일을 하게 됐다. 빌리의 아버지는 그곳 프로펠러부서의 부매니저였다. 내가 그 부서로 간 직후 그는 조종 훈련병인 자신의 아들에게 편지를 써주기를 원했고 나는 모르는 사람, 특히 군인에게는 편지쓰지 않는다고 그에게 말했다.” 정말, 페기는 어떤 면에서는 불명예가 될 행동은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주도권을 쥐다

아버지를 통해 페기에 관한 얘기를 들은 빌리는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 “나는 빌리로부터 편지를 받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본 적도 없는데 내가 괜찮다는 이 남자가 조금은 걱정됐다. 그가 군에서 떠날 때, 갑자기 비행기의 문이 열리고 빌리 해리스가 거기에서 ‘헬로 페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게 전부다.”



결혼의 종

페기와 빌리는 교과서적이었다. 편지로 서로를 알아간 후 빌리는 그들의 관계가 다음 단계로 들어갈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는 페기에게 청혼했고 페기는 즉시 “예스”라고 답했다. 상당히 많은 시간 동안 편지를 나눈 후, 그들이 관계를 진척시키기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1943년 9월 22일, 페기와 빌리는 햇볕의 주, 플로리다에서 결혼식을 했다. 안타깝게도, 페기와 빌리는 곧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무일푼

그들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사실 빌리와 페기는 무일푼이었다. 페기는 결혼식에서 빌리에게 결혼반지 대신 그녀의 버논고등학교 졸업반지를 주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반지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래는 불확실했고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페기와 빌리에게 그런 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그들이 신경쓰는 것은 이 시기가 지난 후 그들이 결국엔 남편과 아내로 함께할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이 

 

인생의 어려운 시작

앞날을 생각하고 미래를 장래를 내다보면 그들이 결국 어떻게 함께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많은 물음표만 생길 뿐이었다. 페기와 빌리는 둘다 가족을 꾸리는 것에 투자했고 그들은 현실을 직시해야했으며 그들은 그들에게 제공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했다. 그들은 모든 옵션들을 따져 보고 그들의 가정을 위해 빌리가 우선적으로 돈을 버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에게 문제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뉴스가 들렸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빌리는 그 때 두 가지 다른 이유로 기분이 상승되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사적인 것이었다: 그가 꿈꾸던 여성과 결혼했고 함께 하는 삶을 시작할 기대를 갖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직업적 성공이었다 – 빌리는 샌 안토니오 브룩스 필드에서 미 공군 조종사 훈련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의 성취와 함께 찾아 온 것은 소위로 진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전쟁에 나가 나라를 위해 싸워야할 순서가 왔다는 통보를 받았다.



큰 충격

빌리와 페기에게 해결방안은 없었다. 그것만큼 슬픈 것은 그들이 둘다 그들의 생명을 전선에 바칠 각오로 영토와 국가를 보호하기로 선서를 했다는 것이다. 둘다 살아 있는 한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하기 위해 서로를 위해 최선이었다. 그들이 희망했던 것만큼 오랜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했고 아이에 대한 생각은 더 이상 고려할 여지가 없었다.



현실에 직면하다

페기는 남편이 자신의 물건을 챙겨 본부로 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그렇게 짧은 시간을 함께 하고 벌써 헤어져야 한다는 것은 불공평한 것 같았지만 빌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이 그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 일을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할 그의 의무였다. 두 사람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그런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장이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갖고 그의 가정을 꾸리는 것은 돌아온 후까지 기다려야 했다.



피할 길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미국은 매일 징집을 했고 특히 대단한 가능성을 가지고 유용한 기술을 가진 남자는 주요 대상이 됐다.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던 빌리는 그의 날이 오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탈라하시로 가라는 편지를 받았을 때 충격을 받거나 놀라지 않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인터뷰에서 페기는 제354 공격대를 기리기 위한 웹사이트 정보를 주었다. 페기는 그 상황을 어떻게 감당했는지를 설명했다.

 


   


여성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부대는 모두 탈라하시로 갔고 부인들은 그곳의 대형 호텔로 갔다.” 그 다음에 추가 지침이 그 여성들에게 주어졌다. 페기는 이렇게 설명했다: “남자들이 호출을 받을 때, 부인들한테는 집으로 가서 남편이 안전하게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에게도 남편이 해외로 보내졌다는 얘를 하지 말라고 얘기했다.”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페기와 빌리는 결혼 한 지 단 6주 만에 헤어져야 하는 그 사실을 감당해야 했다.



비밀은 지켜졌다

정말 부인들은 배우자가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확인 소식을 받을 때까지는 남편이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갔다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지침을 받았다. 그러나 슬프게도 페기에게는 빌리가 유럽에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소식을 받은 것이 그녀가 빌리로부터 받은 마지막 살아있다는 신호였다. 빌리 해리스 소위의 행방과 관련된 정보가 부족한 이유는 체계적이지 못함에서 비롯된 미군 조직의 관료주의적 혼란 때문이었다.



혼돈

미군은 페기에게 그녀의 남편의 행방에 대해 잘못된 소식을 전달할 정도로 앞뒤 분간을 못하는 상태였다. 프랑스와 동맹한 그 군대의 최고사령부에서는 페기에게 그녀의 남편이 무사하며 집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와는 완전히 달랐다. 군대에서 그녀의 배우자에 대한 심각한 실수를 한 후, 페기는 그녀가 남편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보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녀는 자신을 위해 찾아내는 것 이외는 방법이 없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체계적

페기는 지옥을 오락가락했다: “전보가 왔다-내가 그것을 펼치는 순간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얼마가 지난 후, 나는 다시 그것을 봤다, 그리고 나는 전신국으로 가서 그 전보 발송 날짜 이후에 쓰여진 빌리의 편지를 가져왔다. 전보에서는 ‘실종: 7월 7일’, 이라고 쓰여 있었고 나는 그 날짜 이후에 쓰여진 손편지를 받은 것이다. 나중에 ‘전투중 실종: 7월 17일’ 인 것으로 나타났다.



주어진 정보가 없다

페기는 그녀 앞에 보내지는 것은 어떤 정보든지 매달렸고 그것들을 통해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아주 작은 관련 자료도 수용했다: “사람들은 그의 문제가 ‘처리 중’일 것이 분명하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빌리의 부모와 나는 그가 미국으로 돌아와있다고 믿기로 했다. 우리는 그가 어떤 곳의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그저 기억을 잃어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상태이기를 희망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적십자사에 요청

페기와 빌리의 부모가 그의 발자취를 찾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빌리는 꽤 오랜 시간 소식이 없었다. 1945년 3월, 페기는 남편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고 그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을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음에도 페기는 홀로 고심 끝에 결정에 이르렀다. 그 진실이 아무리 끔찍한 것이더라도 그녀는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잔혹한 진실에서 도망치는 대신 페기는 용감하게 국제적십자사에 연락했다.



작은 한 걸음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페기는 빌리의 운명을 찾아내려는 그녀를 도와줄 단체를 마침내 찾았다고 생각했다. 적십자사에서 공식적으로 빌리를 찾는 일을 시작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전에는 없었던 아주 작은 정보들을 찾고 세밀한 부분들을 모으는 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 갑자기 새로운 자료가 표면으로 올라왔고 한 순간에 빌리에 대한 진실이 마침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절망적인 헌신

대부분의 병사들 부인들이나 가족들에게는 군인들이 집에 방문해 가족들에게 그 병사가 전사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페기 해리스에게는 방문해 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없었고 마지막 전보도 없었으며 그녀가 당연히 받아야할 설명을 전혀 듣지 못했다. 70년이 지난 후에도 페기는 진실을 찾기 위해 여전히 헌신하고 있었다. 페기는 “빌리는 평생 나와 결혼했고 나는 내 평생 그와 결혼한 사람으로 살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 여성의 강인함

오클라호마 주 알터스 공군기지에서의 그의 역할처럼 페기는 다른 면에서도 달랐고 자신이 믿었던 것이 옳다는 것을 고수했다. 그녀는 기계공이 되기 위해 기지에 들어갔고 그녀 또래의 많은 소녀들에게는 평범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헌신적이었고 의욕이 넘쳤다. 그녀가 남편 빌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찾는 일을 스스로에게 맡길 때도 그 같은 면을 보였다. 그녀의 강인한 의지와 결단력은 답을 찾는데 70년이 걸렸음에도 그녀가 버틸 수 있게 했다. 



잠못드는 수년 간의 밤

축하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불운하게도, 수집된 정보들은 서로 상반됐다. 한 보고서는 빌리가 의심할 여지없이 실종됐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보고서는 그가 전사한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이다. 찾는 일은 수년이 걸렸지만 진실을 찾기 위한 그녀의 여정에서 페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막다른 지점에 도달하고 연락을 취할 때 무관심한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데서 좌절될수록 페기는 항복의 흰 깃발을 드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곧, 그녀 평생의 찾기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을 것이었다.



경솔한 발표

2005년이 흘러가는 시점에서도 빌리의 행방와 운명은 여전히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 때, 페기의 거주지역 하원의원 톤베리가 단상에 올라 연설을 하던 중 경솔하게도 빌리가 전투 중 실종됐다고 발표했다. 톤베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을 뿐만 아니라 그의 팀은 제대로 된 조사를 수행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둔감하게 근거도 없는 추측을 무작정 던진 것이다. 톤베리는 결국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한 것에 유감을 표했다.



부주의라는 표현은 충분하지 않다

그는 상황에 대해 “부주의”했다고 사과했지만 어떤 후회도 페기에게 그녀의 너무나도 필사적인 필요를 채워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당연히 그녀의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했다. 그녀는 진실이 바로 코 앞으로 와있는 것을 모른 채 누구도 아닌 빌리의 혈육-그의 사촌 알튼 하비에 의해 발견될 사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빌리의 가족 모두가 그에게 일어났을 무엇이든 찾고자 헌신했지만 수 년 간의 끝날 것 같지 않은 추적 후, 조사를 끝냈다.

모든 조각을 맞추다

알튼 하비는 페기 만큼이나 그의 사촌에게 일어난 일을 찾기 위해 헌신했다. 그는 “빌리가 전장에 나갔고 돌아오지 않았다 – 끝, 이런 것은 뭔가 옳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그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했다”고 말했다. 이 때, 알튼은 빌리의 병무기록을 요청했고, 좋은 소식이 있으면 알려줄 것도 요청했다. 이것이 어떤 것이든 빌리 해리스에게 일어난 일을 찾는 마지막 단계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올 것을 보지 못했다.

하비는 육군성의 흩어지고 감춰졌던 자료들을 찾아 보던 중에 빌리의 상황을 발견했다. 일단 모든 것에 접근할 수 있게 되자, 그는 그의 친척이 지난 수년 간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아내기로 결심했다. 흥미롭게도 그가 훑어보는 동안 하비는 그의 친척을 찾고 있는 사람이 자신 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빌리에 대한 정보를 찾는 사람이 또 있었다. 하비가 전혀 알지 못하는 프랑스 여성이었다.



진실은 거기 있었다

바로 그 프랑스 여성이 분명 하비가 훓어보던 그 자료를 요청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그녀는 하비가 조사를 하기 반년 전에 요청했었다는 것이다. 왜 다른 나라 여성이 그의 친척에 관한 정보를 내 줄 것을 요청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던 하비는 빌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더욱 더 궁금증을 갖게 됐다. 불확실한 상태로 수십 년을 지난 후 마침내 거기 진실이 있었고 그는 멍해진 표정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진실

그 자료는 빌리 해리스 소위가 영국으로 배치됐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복무 중 그의 임무는 P-51 머스탱을 조종하는 것이었고 폭격기와 연계해 매일 영국해협을 건너는 것이었다. 그의 모범적인 군인의식, 최상의 팀워크, 그리고 완벽한 전문기술은 빌리가 11개의 청동무공훈장, 두 개의 공군무공훈장에 더해서 공군수훈십자훈장을 받게 했다. 빌리는 특별했고 탁월한 군인이며 애국자였다. 그러나 그것 뿐이 아니었다.



그가 집으로 오는 길

거의 100 번의 사명을 완수하고 빌리는 1944년 7월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격이 됐다. 그의 사랑 페기를 다시 볼 수 있게 됐다는 기쁨으로 황홀했던 그는 그의 신실한 신부에게 신이나서 열정적으로 편지를 쓰며 그가 진정으로 그녀를 그리워했고 곧 집으로 갈 것임을 알렸다. 슬프게도 빌리의 미래에 대한 운명의 생각은 달랐다. 그에게 지정됐던 배를 타는 대신 빌리는 집으로의 여정을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망으로 인한 상심

빌리는 한 쪽에 앉아 그가 너무 많은 부상병들로 인해 오르지 못한, 집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는 다른 병사들을 지켜봤다. 불쌍한 빌리에게는 그저 자리가 없었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미국으로 향하는 다음 배는 몇 주 후에나 탈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마치 아직 더 겪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듯이 배의 낮은 수용인원은 빌리의 승선을 막았다. 그들의 인생을 영원히 바꾼 것은 바로 하나의 임무였다.



그의 때가 아니었다

집으로 갈 다음 배가 오기 전까지 별로 할 일이 없었던 빌리는 군을 위한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빌리의 마지막 비행 임무도 역시 그가 살아있던 마지막 순간을 장식했다. 슬프게도, 빌리의 비행기는 프랑스 북부의 한 마을 르 방뜨 상공을 비행하던 중 공격을 받고 추락했다. 그의 비행기가 하늘로부터 나선형을 그리며 떨어질 때, 빌리는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했다. 몇 분을 남겨두고 선택해야 했다. 빌리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을 감행했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

그의 비행기는 공격을 받았다. 고맙게도 빌리의 수년 간의 훈련을 통해 그는 곧 일어날 상황에 대해 폭넓게 이해하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비교한 빌리는 선택의 여지가 있음을 깨달았다. 비상탈출을 통해 그의 생명을 구하고 비행기는 하강해 폭발하게 하거나 아니면 비행기 안에 머물며 아래 있는 프랑스 마을 사람들을 피해 우회한 다음 불가피하게 그의 죽음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빌리는 달랐다.



신분이 확인되다

물론 빌리는 비행기가 인근 숲으로 추락하는 것을 선택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치지 않도록 마을로부터 충분히 멀리 떨어진 숲을 택했다. 나중에 밝혀졌듯이 빌리의 자료를 요청했던 그 프랑스 여성은 바로 그의 죽음으로 암울했던 날 빌리가 구한 그 마을 사람이었다. 그 여성의 이름은 발레리 퀘스날이었다. 그녀가 자료를 조사한 이유는 르 방뜨의 해방 60주년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빌리는 그의 생명을 앗아간 끔찍한 추락으로 그날 사망했다. 그리고 르 방뜨 마을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 그를 기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그것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영웅에 대해 마을에서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희생한 그 조종사가 캐나다 사람이라고 추측했다. 그들은 마을 묘지에 그를 묻었고 그에 대해 셀 수 없이 많은 얘기들을 했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전혀 몰랐다.



극단적인 조치

그의 출신지가 영국이든, 캐나다든, 미국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영웅적이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빌리는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을 위해 너무 젊은 나이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생명과 그가 자신을 위해 품었던 미래의 꿈들을 포기했다. 빌리는 복무 중 항상 첫 번째로 자원했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자신의 편안함 보다 우선으로 두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조차도 극단적이었다.



집으로 향하다

일단 남편 시신의 행방을 들은 페기는 신속하게 조치해 남편이 그녀와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도록 그의 시신을 이송하도록 했다. 그의 유해는 노르망디 미국인 기념묘지로 옮겨졌었다. 그의 보기 드문 이타적인 행동과 용기는 많은 생명을 구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프랑스의 작은 마을 르 방뜨에서 감탄스럽게 그의 얘기를 하는 이유이다. CBS 뉴스에서는 그의 묘지를 “노르망디에서 가장 아름답게 장식된 묘지”라고 보도했다.


 

경의를 표하다

그녀의 남편의 죽음과 행방, 운명의 날 그의 비행기가 추락한 곳을 알게 된 후부터 페기는 매년 인근 숲을 순례했다. 그녀는 빌 해리스에 대해 여전히 극찬하는 유일한 생존자 기 설루와 함께 그 곳을 방문한다. 기는 뭔가를 더 했어야 했다고 믿지만, 페기의 답변은 이렇다. “나는 한 친구가 그의 옆에 있다는 것을 알 정도로 그가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고 흐느끼며 페기는 말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바로 그 친구이다.”  


 

잊지 않는 마을

하비는 “마을 사람들이 몰래 눈치를 보다가 독일군이 보지 않을 때 작게나마 장례를 치르고 그들의 묘지에 묻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몇 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행동은 잊혀지지 않고 있다. CBS 뉴스에 따르면 마을 사람들은 빌리 D. 해리스라고 이름 지어진 도로에서 일 년에 세 차례나 행진을 한다. 페기가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던 수년 간 르 방뜨 마을은 전사한 장병을 기념하고 있었다.



영원한 영웅

르 방뜨 주민들은 빌리 해리스에게 그의 묘소를 찾을 친지가 있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의 무덤에 장식을 하고 그 마을의 영웅의 묘소를 찾았다. 마을의 시장 조차도 해리스의 이름을 언급하며 울컥했다. 그는 마을 주민들을 구한 병사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페기가 그의 행방을 알게된 후부터는 그녀도 그가 묻힌 곳에 1년 에 열 번 꽃을 보냈다.

 

더 가깝게

알튼 하비가 빌리 해리스의 병무기록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페기는 그녀가 그렇게 기다리던 것을 절대로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마침내 그녀의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리고 그를 국가 영웅으로 만든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 대해 알 수 있게 됐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6 주 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70년이 걸린 그녀의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찾는 사명이 페기에게 가장 의미가 컸다. 그녀는 재혼하지 않았고 그 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



진정한 사랑이 모든 것을 이긴다

페기에 대해 말하자면, 그녀는 매일 꼭 남편을 방문한다. “이제 그만 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전혀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이다”라고 페기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널리 알려진 불멸의 헌신과 사랑에 대한 이 얘기는 모두에게 감명을 주었다. 페기는 빌리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 조차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끈질긴 노력이 마침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진실을 밝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