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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자료창고

김재규는 나라도 구하고 박정희도 역사의 평가에서도 구한 열사인가?

by skyrider 2009. 10. 26.

» 만약 1979년 10월26일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쏘지 않았다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의 평가도 지금처럼 후하지 않았을 것이다. 1979년 11월7일 밧줄에 묶인 김 부장이 권총을 든 채 박 전 대통령 시해 장면을 재현하고 있다. 사진 80보도사진연감

김재규는 한국을 구하고 박정희도 구한 열사인가?...
킬러짱 (winnerman) | 10.25 18:17
추천수 63 | 비추수 5 조회수 1587 | 덧글수 0 | 스크랩 0
http://hantoma.hani.co.kr/board/ht_society:001016/77417

 

 


박정희가 종말에 이승만처럼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하여 국민들에게 쫓겨났다면 지금처럼 박근혜가 정치권에 존재하지도 않았겠지...
 
어쨌거나 김재규에 의해서 살해당하지 않았다면 박정희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지금보다 훨씬 좋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김재규는 박정희 일가를
구해준 영원한 심복인가?...
 
그렇다면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살해당한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 아닌가?...
 
수구꼴통들은 나의 이런 역사관을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참으로 묘한 것이 역사로다...
 
일본에 원자탄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아마도 소련과 미국에 의해서 분할되어
한반도 처럼 분단되었을 것이다.
 
본토를 소탕하느라 일본군과 미군의
엄청난 피해가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일본은 두 방?으로 전쟁을 끝내준 미국의 원자탄이 축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물-
 

 
 
 
-[펌] 인터넷 기사-
그때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쏘지 않았다면? 만약 그랬다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30여 년 전 역사를 들춰보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죽음 이전과 이후, 극명하게 엇갈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박 전 대통령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1979년 10월26일 이전으로 잠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10·26 사태가 벌어지기 직전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급히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과 마산에서 터진 부마항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이때가 1979년 10월19일이었다. 훗날 김 부장은 부마항쟁을 ‘민란’으로 표현했다.

서울로 돌아온 김 부장이 곧바로 찾은 곳은 청와대였다. 모든 것을 사실대로 보고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박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자리에는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계원 비서실장이 동석했다. 이 자리에서 김 부장은 정부가 근본적 민심 수습책을 내놓지 않으면 부마항쟁이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를 전했다. 박 전 대통령이 역정을 냈다.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느냐.”(1980년 1월28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항소보충이유서’)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 차지철 실장이 거들었다. 차 실장은 박 전 대통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 대원 100만~200만 명 정도를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로부터 며칠 뒤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20여 발의 총소리와 함께 숨졌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역사학)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과 관련해 부마항쟁이 가장 직접적 계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없었다면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이 나올 수 없었듯, 부마항쟁 없는 10·26은 상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