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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컬럼,글

군장성 아들의 군대 내 사망도 못 밝히는 나라에서 서민자식들 목숨은?

by skyrider 2010. 10. 15.

황장엽씨도 가는 현충원, '장교' 김훈은 왜 안 되나
육군, '의문사' 김훈 중위 현충원 안장 사실상 거부...대한민국의 이상한 애국관
10.10.14 13:13 ㅣ최종 업데이트 10.10.15 12:39 고상만 (rights11)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1998년 2월 24일, 판문점 241 GP 3번 벙커 안에서 대한민국 육사 출신 장교 한 명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이름은 김훈이었다. 세인들에게 영화 <공동경비구역 JAS>로 연상되는 이 사건 피해자는 지금까지 장례 절차조차 제대로 밟고 있지 못하고 있다. 경기도 벽제 군부대 영현실 창고 안에서 자그마한 유골함에 담긴 채 대한민국 국방부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청년 장교 김훈이 바로 그다.

 

대한민국 육사 52기 출신으로 아버지 김척 예비역 중장의 뒤를 이어 스스로 군인의 삶을 선택한 그였다. 현직 대통령, 국무총리, 여당 대표가 여러 가지 이유로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말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김훈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것은 김훈의 육신만이 아니었다. 그의 명예 역시 12년째 방치되고 있다.

 

98년 2월, 김훈 중위는 어떻게 죽었나?

 

  
고 김훈 중위.
ⓒ 김척
김훈

건국 사상 최초의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뤄지기 바로 전날인 98년 2월 24일 낮 12시 20분경, 판문점 241 GP 3번 벙커에서 이 부대 소속 2소대장 김훈 중위가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당시 그는 관자놀이에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고 그의 전투화 끝에는 한 자루의 권총이 떨어져 있었다.

 

군 당국은 사고가 발생한 지 채 2시간이 지나지도 않은 시각에 사망 원인을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아직 우리나라 군 수사팀이 사건 현장에 도착하지도 않은 때였다. 그래서일까. 수사에 착수하기도 전 내려진 결론에 따라 사건은 진행되는 듯했다. 군 수사팀은 김훈 중위가 '자신에게 지급된 권총을 이용, 스스로 격발하여 사망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현장에서 발견된 권총은 김훈 중위의 것이 아니었다. 이를 제보해준 이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불상의 사병이었다. '권총의 총기번호를 잘 보세요'라는 뜬금없는 한 마디를 유족에게 남기고 사라진 제보에 따라 확인해보니 정말 그 권총은 김훈의 것이 아니었다.

 

당시 군 수사 책임자에게 이 사실을 추궁하자 그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충격적이다. 당연히 김훈 중위 것이라 생각하고 총기번호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황당한 답변을 내놓았다. '충격적'이라는 말은 유족이 써야할 말이었다. 이처럼 군 당국이 외면한 초동수사의 부실로 인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왜곡되었다. 비슷한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많았다. 허물 투성이였다.

 

군 수사팀의 잘못은 또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화약흔 반응이었다. 김훈 중위가 스스로 격발했다고 하는 군 수사팀의 주장과 달리 그의 양손에서는 권총 격발시 나타나는 화약흔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의문을 제기하자 군 수사팀은 화약흔이 나타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족과 인권단체 몰래 군이 실시한 1998년 10월 2일, 1999년 2월 6일, 2000년 1월 28일 등 세 차례의 총기 시험발사 결과 시험자 7명 모두의 손에서 바륨과 안티몬 등 뇌관 잔재물이 나왔다. 또한 발사자 전원의 좌우 팔 부위에서는 무연 화약이 검출되었다. 나올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주장과 달리 시험자 7명 모두에게 화약흔이 검출되자 군 수사팀의 선택은 놀라웠다. 총기 시험 결과를 유족과 인권단체에게 알려주지 않은 채 은폐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2009년 김훈 중위의 유족이 군의 조사 과정이 담긴 자료를 확보하면서 알게 되었다.

 

잘못이 너무 많아 모두 언급하기도 어렵다. 결국 이처럼 잘못된 군 수사기관의 부실수사 내지는 은폐 의혹으로 인해 김훈 중위의 유족은 사랑하는 아들이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육사 총동창회 "김훈 중위 현충원 안장 자격 있다"

 

  
고 김훈 중위의 부모님.
ⓒ 김척
김훈

결론적으로 김훈 중위 사건에 대해 2006년 12월 7일 민사소송 대법원 판결과 2009년 12월 '대통령소속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이하 '군 의문사위')에서는 '군 수사기관의 초동 부실수사로 인해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확인하기 어렵게 되었다'라고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군 의문사위는 김훈 중위 사인에 대해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다며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정했다.

 

지난 12년 동안 3번의 군 수사와 3번의 국가기관(1999년 5월 판문점 김훈중위 사망의혹사건 규명을 위한 국회 국방위원회 소위원회, 2006년 12월 민사소송 대법원 판결, 2009년 12월 대통령소속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도 불구하고 김훈 중위 사건은 끝내 속시원한 사인 규명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진실을 알고자 했던 유족으로서는 너무나 절망스러운 일이었다. 유족의 바람은 간절했다. 많은 의혹이 명백히 밝혀진 후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서 당당하게 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초동 수사 미흡으로 인해 이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결국 여러 고민 끝에 유족은 12년간 경기도 벽제 모 군부대 영현실의 창고에 방치되다시피 놓여있는 김훈 중위에게 안식을 주기로 생각했다. 진상규명 후 장례를 마치기에는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 현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6월, 김훈 중위의 부친 김척씨는 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동창회장 오영우 예비역 육군대장)를 방문하여 아들 김훈 중위가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고맙게도 육사 총동창회는 운영위원회에서 심도있는 논의 후 국방부장관에게 공식 청원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김훈 중위가 근무중 총상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 군 의문사위 등 3개 국가기관의 결론처럼 "타살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자살 역시 아니다"는 결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 5항 가호의 '군인이나 경찰공무원으로서 교육훈련 또는 직무 수행중 사망한 자'에 대해 국가유공자로 예우 한다는 조항에 근거한 것이었다.

 

다만, 예외 조항중 '자해행위로 인한 경우'가 있었으나 이는 군 의문사위를 포함한 3개 국가기관의 조사결과 자살이 아닐 개연성에 대해 충분히 소명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김훈 중위의 유족은 육사 총동창회의 청원이 받아들여질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온 결과는 암담했다. 육군 인사처리과의 중간 회신 내용은 사실상의 거부였다.

 

지난 8월 5일, 육군 인사처리과가 육사 총동창회 팩스로 송부한 중간 회신문에 의하면 '청원과 관련, 국방 조사본부(합조단)에 의뢰하여 재조사 결과를 가지고 전(사)사망 심의위원회에 회부하여 결정할 예정'이라고 답하였다.

 

이는 사실상 청원을 거부하기 위한 형식적 절차라고 육사 총동문회는 판단했다. 8월 26일, 육사 총동창회는 '중간 회신에 대한 총동창회 의견서'라는 제목으로 이같은 깊은 우려를 담아 재차 육군 참모총장에게 송부했다.

 

주 내용은 "이전에 문제가 된 김훈 중위 사건 (특조단) 수사에 참여한 이들을 배제하지 않은 채 그대로 합조단에 맡기게 되면 나올 결론은 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를 여러 차례 군 고위 관계자에게 구두 언급 했음에도 또다시 형식적인 절차를 거치라고 하는 것은 청원을 거부하려는 의도라고 에둘러 비판하면서 도의적 타당성을 가지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려줄 것을 재차 요청했다.

 

하지만 결론은 여전히 부정적이다. 김훈 중위 부친 김척씨는 "청원이 받아들여지기에는 김훈 중위 사건 당시 자살로 결론내린 특조단 인사들이 현재 국방부 고위직에 포진하고 있어 전망은 매우 어둡다"고 말했다.

 

황장엽씨가 가는 현충원, 김훈 중위는 왜 안 되나

 

  
어린 시절의 고 김훈 중위.
ⓒ 김척
김훈

최근 황장엽씨가 사망하자 정부는 그를 현충원에 안장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러한 법적 근거를 위해 정부는 서둘러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기도 했다. 반면 33년간 군 복무한 아버지처럼 자신 역시 휼륭한 군인이 되겠다며 육사에 진학,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 마지막까지 충성하던 김훈은 여전히 군 부대 영현실에 방치되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 국방부가 할 일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방적으로 자살 결론을 내린 군 수사는 사실 그동안 많은 상처를 받았다. 그 이유를 군 당국은 유족이나 인권단체가 억지를 쓰며 흠집을 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언급한 것처럼 그 원인은 군 수사팀의 미흡한 초동 수사에서 찾아야 한다.

 

국회 국방위 소위원회도, 3번에 걸친 법원 판결도 그리고 3년에 걸친 군 의문사위 역시 한결같은 지적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부실 수사로 인한 피해자 김훈에 대해 군 당국은 미안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결론이 맞으니 너는 자살'이라고 윽박질러왔고 현재까지도 그 자세를 바꾸려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제 그만 두어야 한다. 지금까지도 충분히 잔인했다. 적어도 국가를 위해 자신의 스무살 이후 사망 직전까지 국가와 군을 위해 충성을 다해온 대한민국 육군 중위 김훈이었다. 아버지와 그 아들의 군 복무 기간을 합치면 38년이다. 국가와 군, 국민을 위해 헌신한 이 '아름다운 군인 가족'의 공을 국가는 인정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확히 확인하자. 지난 99년 4월 14일, 국방부가 특별 합동조사단을 통해 내린 결론은 '자살'이었지만 이에 따른 근거는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했다. 자살로 유추했을 뿐이다. 자살하는 것을 목격한 이도,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발견한 것도, 아니면 자살하겠다는 말을 들었다는 증언도 확보하지 못했다. 그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대한민국 육군 중위였던 故 김훈. 나는 그가 대한민국 현충원에서 평생의 안식을 갖게 되기를 기대한다. 아버지의 군복을 좋아했던 아이. 그래서 그 군인이 되고 싶어 육사에 지원했고 그 뜻대로 군인이 되었던 김훈. 그리고 마지막 순간인 98년 2월 24일, 3번 벙커 안에서 김훈은 작전 지도를 펴 놓은 채 의문의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 유족의 바람대로 이제 그를 현충원으로 보내주기를 간곡하게 호소한다.

 

생각해보자. 97년 망명 이전까지 북한 정권에서 최고위급으로 살다가 이후 13년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반공 아이콘'으로 살다간 그 공으로 황장엽씨는 현충원을 갔다. 그런데 군 당국도 확실하게 밝히지 못한 '자살'을 이유로 육군 중위 김훈은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 한다면 이것은 너무도 억울한 일이 아닌가. 적어도 황장엽씨 보다는 김훈 중위가 조국 대한민국에 더 순결한 충성을 바친 진정한 애국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그만 조국이 김훈 중위를 안아줄 때가 되었다. 그의 영혼이 선배 군인들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될 때까지 나는 투쟁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한국인권단체협의회, 천주교 인권위원회, 국방부 특별합동조사단 자문위원, 인권연대 등을 거쳐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 조사위원회' 조사관 등으로 일해왔다. 지금까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비롯하여 판문점 김훈 중위 사망사건 등 여러 의문 사망사건의 진실을 쫒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