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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이야기

전태일 소신한지가 40년인데 아직도 분신하는 노동자가 있는 세상!

by skyrider 2010. 11. 1.

"우리가 모자라서..." 울고 간 DJ 잊을 수 없어
 고마운 사람들 너무 많지, 이명박씨만 빼고
[전태일 40주기] 여든 둘 청춘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40년
10.11.01 16:47 ㅣ최종 업데이트 10.11.01 21:34 신정임 (laborworld)

주책없이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지하철 안에서 쳐다보는 눈들을 피하지 않았다.

 

  
고 전태일
ⓒ 전태일기념사업회
전태일

"내 3분 있다가 죽을지 10분 있다가 죽을지 모르니까, 다른 약을 구한다 어쩐다, 뭐 주사 놔달라고 말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것 잘 듣고, 엄마 꼭 들어주세요."

 

애원하더라고. 우리 엄마는 그렇게 할 거라고. 내가 부탁하는 걸 안 하면 나는 이다음에 천국에 온 영혼도 안 만날 거라고. 엄마는 할 거라고, "한다고 대답 좀 하세요." 막 소리쳤어. 약속해 달라고. 그라고 이런저런 여러 가지 말을 너무 많이 했어.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합해서 싸워야지 따로따로 하면 절대로 안돼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좀 더 가면 전부 결핵 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돼요. 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캄캄한데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엄마가 안 하면 그걸로 끝난다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그런 말도 하고 그때 뭐 별말 다 했지.

 

"어떤 물질이나 어떤 유혹에도 타협하지 마세요. 내 부탁한 거 꼭 들어주시겠죠?"

 

참말로 기가 차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듣고만 있었지.

 

"왜 엄마는 내가 말하는데 대답하지 않아요? 우리 엄만데 왜 대답하지 않느냐고요? 내가 죽으면, 헛되게 죽으면 안 되잖아요. 엄마가 제발 내 말 들어주세요."

 

막 따지는 거야.

 

"목사들은 이웃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아요. 말로만 했지 실천은 안 한다고요. 그런 예수는 믿지 마세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예수를 믿으세요."

 

지도 예수를 믿었는데 그란 말을 했어. 태일이가 말을 하는데 여기 가슴에서 막 부글부글 끓는 소리가 나는 거라. 다 이렇게 붕대 묶어 놨는데 부글부글 끓는 거라.

 

"엄마, 엄마, 내가 부탁하는 거 꼭 들어주겠다고 크게 한번 대답해 줘."

 

크게 한번 대답해 줘. 그렇게 말하는데 여기가 계속 막 끓더라고.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내가 미치겠는데…, 겨우 소리를 내어 말했지. 그라니까,

 

"잘 안 들려요. 크게, 크게!"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내가 큰 소리로 대답해 줬지.

 

그라니까 막 끓는 것이 여기 목까지 차올라서 펄떡거리면서 숨을 못 쉬는 거야. 그라니 의사가 와서 목에 칭칭 감은 붕대를 칼로 탁 따니까,

 

"엄마 꼭 크게, 나 잊어버리고 부탁하고 가게. 크게, 크게 대답해 주세요."

 

그라는 거라. 그리고 피가 퍽 쏟아지고, 크게 대답하라 소리치면 피가 퍽 쏟아지고, 크게 대답하라 그라면 또 피가 퍽 쏟아지고…. 그러다 한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쓰라져 있다가 태일이가 눈을 뜨며 마지막으로 뭐라 한지 아냐?

 

"엄마, 배가 고프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중, 오도엽, 후마니타스)

 

40년이 흘렀다. 어머니가 있다. "내가 부탁한 거 꼭 들어주겠다고 크게 대답해 달라"는 아들의 마지막 부탁에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라고 크게 대답했던, 40년을 그 약속을 지키면서 살아왔던 이소선 어머니다.

 

전태일 40주기 기념주간 시작인 전태일문화제 전날인 지난 10월 29일, 어머니를 만나러 나섰다.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펼쳐 든, 어머니의 삶을 담은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는 집회 단상 위 '전태일의 어머니'로 멀게만 느껴졌던 어머니를 나의 어머니, 할머니처럼 가깝게 만들어 주었다.

 

여든 둘, 청춘의 어머니

 

"내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인터뷰는 힘들 것 같아요."

 

전날 저녁 전화를 받으실 때 푹 잠긴 어머니의 목소리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인터뷰는 다음에 하더라도 우선 인사만 드리고 오자는 마음으로 어머니가 매일같이 들르신다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사무실로 향했다. 박제민 유가협 사무국장이 "원래 이 시간쯤 오시는데 오늘은 손님들이 많으시네요"라면서 5분 거리에 있는 어머님댁으로 안내했다.

 

박 사무국장은 어머니를 '참 밝고 젊은 분'이라고 표현했다. "평화시장의 15~16살 되는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을 해 와서 그런지 젊으세요. 어느 날은 '사무국장, 쏜다가 무슨 뜻이냐'고 물으셔서 '한 턱 낸다는 뜻이잖아요'라고 대답했더니 '그래 그럼 오늘은 내가 쏜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소선 어머니는 스스럼없이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여든 둘, 청춘이었다.

 

잘 가꾼 화분이 곳곳에 놓여있는 아담한 집안으로 들어섰다. 작은 아들 전태삼씨가 다리가 아파서 바깥출입이 어려운 어머니의 다리 역할을 해드리고 있었다. 박 사무국장이 소개만 해주고 가려고 하는데 어머니는 사무국장을 기어이 끌어 앉혔다.

 

"감이라도 하나 먹고 가. 뭐가 그리 바쁘다고…."

 

청계노조 위원장이기도 했던 민종덕씨가 안부인사 겸 찾아와 있었다. 한 달여 전 태어난 어머니의 증손녀이야기로 시작해 바로 40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민씨가 어머니 앞 장식장에 놓인 돌쯤 돼 보이는 두 아이의 사진을 보여준다. 전태삼씨의 쌍둥이 아들이다.

 

"어머니랑 나, 둘 다 성동구치소에 있어서 그 애들 백일잔치를 못 해줬잖아."

 

  
1989년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농성 중인 이소선(사진 가운데)
ⓒ 전태일재단
이소선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구치소에 갇혔던 야만의 시절

 

전씨가 그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머니랑 나랑 만날 청계노조한다고 잡혀 들어가니까 어머니가 하루는 그러시더라고요. '형은 형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그렇게 갔고, 어머니도 어머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나도 나 하고 싶은 대로 이렇게 돌아다니면 남은 순옥이랑 순덕이는 어떻게 하냐'고. 그 얘기 들으니까 '어머니가 활동 제대로 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게 내 할 일이다', 그리고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만날 밤마다 기도한다고 둘이서 사라졌구먼"이라고 민씨가 놀리는데도 전씨는 진지하다.

 

"그렇게 해서 결혼했는데 우리는 81년에 노조 강제해산 될 때 구치소에 갇혔고, 애 엄마 혼자서 갓난애들 보느냐고 정말 힘들었다고 하더라고. 우유 먹일 돈도 없었다면서…."

 

어머니가 한겨울에 면회 왔던 며느리 모습을 회상한다.

 

"정말 가관이었지. 애 하나는 앞에 안고, 다른 하나는 뒤에 엎고, 양 손엔 보따리들 드느라고 우산도 안 썼어. 며느리랑 손자들 머리엔 눈이 수북이 쌓여 갖고는…."

"저한테는 면회 와서 애들이 '삼촌, 안녕하세요'라고 했잖아요."

 

'아빠' 전씨의 빈 자리를 청계노조의 많은 '삼촌'들이 채워줬다. 하지만 자식들로부터 '아버지' 대신 '삼촌'으로 불렸던 아버지에겐 40년 전 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어머니와 아들을 함께 감옥에 가뒀던 야만의 시대였다.

 

"함께여서 우거짓국 하나로도 행복했다"

 

청계노조의 산실이었던 '쌍문동 208번지'에 대한 기억이 보태진다. "지금은 아파트촌이지만 그때는 반흙담 판잣집이었지. 방이 널찍널찍했잖아"라고 민씨가 말하자 어머니가 "철거반원들이 와서 부수면 태일이는 더 크게 방을 만들었어. 내가 '우리 식구만 살면 되는데 왜 자꾸 키우냐'고 하니까 태일이가 '친구들이랑 회의도 해야 하고 나중에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올 거'라고 했지"라면서 큰아들에 대한 기억을 꺼내놓는다.

 

큰아들, 전태일의 말은 현실이 됐다. 밤 10시, 11시까지 일을 한 평화시장의 많은 노동자들은 19번 버스를 타고서 집이 아닌 쌍문동으로 향했다. 버스정류장에 내려서도 산길을 한참 걸어서 공동묘지 근처의 208번지에 도착하면 자정이 가까웠다. 새벽 1시에서 6시까지 계속 사람들이 오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 늦은 시간에 와서 어떻게 하면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청계노조를 알릴 것인가를 토론하는 이들이 배곯는 걸 보지 못했다. 시장에서 우거지라도 주어다가 끓여 먹여서 출근시켰다.

 

민씨가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몰라"라고 말하자 어머니가 "니들이 배가 고파서 맛있었지"라고 대꾸한다.

 

"아니야. 여럿이 같이 먹어서 맛이 있기도 했지만 우리 어머니 음식솜씨가 참 좋았어."

"돈 떨어지면 우동집 앞에서 2시간씩 기다려서 소쿠리 밑에 달라붙은 우동 가닥들을 받아 왔어. 그거에 된장 풀어서 우거지 넣고 죽을 써줬는데 그거 줘도 다들 맛있어했어. 굉장히 행복해했지. 뭐가 좋다고 만날 깔깔대면서 웃고…."

"아픔, 즐거움을 같이 하면서 참 행복했어요. '고생이다, 불행하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죠. 살기 좋아졌다는 지금이 더 각박해진 것 같아요."

"우린 정을 먹고 사는 사람이잖아. 고생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못 하지. 그땐 참 많이 웃었던 것 같아."

 

이소선 어머니와 민씨의 행복했던 과거 회상에 전씨도 한 마디 거든다.

 

  
이소선 가족사진 (맨 왼쪽이 이소선, 가운데 어린이가 전태일).
ⓒ 전태일재단
이소선

"엄마가 소금만 넣어서 끓여준 수제비를 '바보회' 형 친구들이 와서 그렇게 맛있게 먹을 수가 없었어요. 그 모습 보면서 '그 안에 정오의 해가 멈춰서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죠.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서…."

 

"태일이 친구라고 해고되고 갈 데가 없었잖아. 우리집에서 만날 자고…. 중앙시장에서 헌옷장사하면서 '우리 식구다' 생각하고 어떻게든 먹여 살려야겠다고 생각했었지."

 

어머니가 자식들을 생각하듯 당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민씨는 "거대한 담론보다 인간적 관계, 공동체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땐 '싸워서 이길까' 하는 두려움이 없었죠. 미래에 대한 낙관이 있었어요"라면서 끈끈한 관계가 만들어냈던 힘에 대해 얘기했다.

 

"싸움 하자고 하면 무조건 했지. 경찰이 잡으러 오면 다 같이 먼저 전경차에 타버렸잖아."

 

어머니가 촛불집회 때 새롭게 떠올랐던 '닭장차 투어'가 이미 존재했음을 증언했다. 전씨가 "니꺼 내꺼도 없었어요"라고 하자 어머니가 다시 "가진 놈도 없었으니까…"라면서 웃는다.

 

적으면 10여 명, 많으면 50~60명씩 늘 북적이던 쌍문동 208번지는 1987년 이후 재개발로 철거됐다. 정으로 넘쳐나던 판잣집은 규격화된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재개발되면서 받은 아파트는 전씨 가족에게 맡기고 어머니는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동대문의 유가협 사무실 근처로 거처를 옮겼다.(어머니는 유가협 사무실, 전태일 기념사업회 사무실 등에서 생활하다가 전태일 기념사업회 이전 때 기념사업회 측에서 마련해준 현재의 '옥탑'방에서 생활하고 계신다.) 

 

"바쁜데 그 구석까지 사람들이 찾아오나. 밤이고 낮이고 사람들이 오며가며 들를 수 있는 데가 좋지."

 

지겹게 고맙고, 행복하다

 

작은 아들 전씨가 "숱한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사람 속에서 살아온 우리 어머니가 '가장 행복한 어머니'"라고 어머니를 치켜세운다. 어머니는 아픈 다리를 아들에게 내밀며 "주물러야 행복하지"라고 퉁을 놓으면서도 "어쨌든 좋았어. 안 좋으면 그렇게 해내지 못하지"라고 응수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형이 그렇게 되고 얼마 있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와서 어머니 앞에서 무릎 꿇고 '우리가 모자라서 큰아들이 그런 일을 한 것 같다'고 눈물을 흘리셨잖아요." 전 씨는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단다.

 

어머니는 "함석헌 선생님이 오셨을 때는 '예수님이 왔나' 했잖아. 긴 수염의 흰 옷 입은 사람이 눈밭에 서 있어서…. 문익환 목사님도 우리 아이들을 참 많이 아껴주셨지"라고 떠올렸다. 전씨가 다시 "윤보선 대통령 이후 관계 안 가진 정부도 없잖아요"라고 하니 어머니 "이명박 빼고…"라고 정정한다.

 

어머니는 참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범인 은닉죄의 위험 속에서 벌벌 떨면서도 수배 중인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사람들이 있다. 그가 잡혀가면 그의 뒤를 이어 청계노조 사람들을 먹여 살린 딸 전순옥과 며느리도 있다.

 

40년 동안 설, 추석 한 번 빠지지 않고 찾아오고, 순옥, 순덕이 결혼 때는 물론 자신의 환갑, 고희 다 챙긴 '태일의 친구들'이 있다. 노동운동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중엔 청계노조를 떠난 사람들도 있고, 민주화운동과 멀어져 돈을 벌고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들이 고맙다.

 

"나야 태일이 죽은 뒤에 미쳐서 지금까지 이러고 살지만 남들이 어떻게 나처럼 평생 미쳐서 살겠냐. 하루든 몇 달이든 열심히 싸우고 살아온 게 어디냐. 내겐 정말 고맙고 고마운 사람이지. 난 누구도 원망하고 살지 않아야."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중에서)

 

'지겹도록 고마운' 그들도 어머니를 끔찍이 고마워한다.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어머니와 함께 쌍문동 208번지에 함께 살았던 적이 있다. 결혼 후 세 살이 하는 그에게 어머니는 월세라도 아끼라면서 집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청계노조 활동을 하다가 생활고로 생활전선을 찾아갔던 그가 다시 전태일재단으로 돌아온 데도 그런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 깔려있다. 얼마 전 만났던 박 사무총장은 올해 초에 아내가 사주를 봤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내가 사주를 보고오더니 저한테 '섭섭하다. 이렇게 같이 오래 살면서 왜 어머니가 둘이라는 얘기를 안 했냐'고 하더라고요. 사주에 어머니가 둘이라고 나왔다는 거예요. 그래 제가 그랬죠. 만약 그렇게 나왔다면 다른 한 분은 이소선 어머니일 거라고."

 

박 사무총장은 요즘도 이틀에 한 번씩은 어머니를 찾는단다. 어머니껜 이런 아들, 딸들이 많다.

 

  
'버들다리를 전태일다리로!' 캠페인의 한 장면
ⓒ 이선옥
전태일다리

 

"죽기 살기로 왜 같이 안 싸우나?"

 

어머니가 힘드신지 앉았다가 누웠다를 반복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몸이 예전만 못해서 집회 같은 데 못 가서 속상하시죠?"라고 물으니 어머니가 "예전만 못한 게 아니라 다 망가졌지"라면서 바지를 걷어 다리에 움푹 팬 상처들을 보여준다.

 

"경찰들한테 잡혀가면 정말 많이 맞았지. 온몸이 흉터투성이야. 발로 치이고, 허벅지 살점이 떨어져서 발등에 붙기도 하고…."

 

본의 아니게 투쟁의 상처를 고스란히 온몸에 새긴 어머니를 오늘만 세 번째 괴롭히는 사람이 됐다. 아파서 인터뷰가 힘들다고 하는 데도 언론사들에서 찾아온단다. 무작정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안 돼 보여서" 집 안에 들이게 된다고.

 

"내가 차별을 싫어하는데 누군 해주고 누군 안 해준다고 하면 안 되잖아. 그래서 하긴 하는데 힘들어."

 

이야기 중간중간 어머니는 가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속에 하고 싶은 말이 꽉 차 있어. 말 안 할 때도 가슴에 있는 건 똑같아.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면 옛날 생각이 나고, 과거가 눈에 보여. 몸에서 열이 나지." 열을 식히기 위해 담배를 피우지만 그런 날엔 밤에 잠을 자기 힘들단다. 수면제를 먹고도 잠이 잘 안 드는 어머니는 얼핏 잠이 들어도 새벽기도를 하는 새벽 4시만 되면 눈이 떠진단다.

 

어머니는 몸은 움직이기 힘들지만 마음은 언제나 노동자 곁에 있다. 민주노총 신문인 <노동과 세계>에 무슨 기사가 실렸는지 살피고, 여기저기에 포클레인 위에 올라간 기륭전자 김소연 분회장의 소식을 묻는다.

 

"큰아드님이 분신한 지 벌써 40년인데 실감나시냐?"는 질문에도 어머니는 대뜸 "비정규직이 이렇게 밀려 있는데 뭐가 실감나겠어?"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도 "세상 좋아진 거 보면 아들 생각이 나. 이렇게 좋은 세상도 못 보고 그렇게 고생만 하다 갔나 싶어서…. 노조도 못 만들던 시절이었잖아. 요즘은 자기들 배 안 고프니까 악착 같이 싸움을 안 해. 기륭전자가 저렇게 지붕 위에 앉아 있어도 왔다갔다 구경만 하고 같이 죽기 살기로 안 싸우잖아"라면서 노동운동에 쓴소리를 한다.

 

언젠가 집회에서 어머니가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합니다."며 토하듯 말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어머니, 정말 하나가 되면 승리한다고 믿으세요?"라고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럼, 하나가 되면 이기지"란 답변이 되돌아왔다.

 

"청계노조 때도 처음부터 이긴 게 아니야. 하나 잡히면 떼거리로 달려갔지. 종로서에 잡혀 있으면 떼로 몰려와서 항의하는 소리가 들려. 그렇게 오면 면회도 못해. 그러다보면 20일까지 경찰서에 있을 수 있는데도 그 전에 풀려나기도 했지. 구치소에 있을 땐 사람들이 하도 오니까 변호사가 보석을 신청하자고 해. 우린 돈 없어서 보석 신청 못한다고 하니까 변호사가 보석금을 내더라고. 그게 변호사 돈이었겠어? 관놈들이 그렇게 한 거겠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씨가 30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전태일 40주기 기념 문화제' 무대에 올라 발언하고 있다.
ⓒ 최지용
전태일

40년이 지났지만, 전태일 정신은 계속된다

 

40년 투쟁 속에서 깨달은 진리를 전해준다. 어머니는 지금은 그런 투쟁을 할 수 없는 게 안타깝다.

 

"병들어서 가고 싶은 데도 못 가고, 하고 싶은 말도 못해. '늙고 병들면 못 노나니'란 노랫 말이 틀리지 않다니까. 젊을 때 할 일을 해야지."

 

어머니가 몸에서 열이 나는지 겉옷을 벗으면서 "돈도 안 주는 이런 고된 노동을 왜 하나 몰라"라면서 기자를 책망한다. 그러면서도 밥을 먹고 가란다. 기자가 작은아들이 차려온 비빔국수 한 그릇을 다 비워내자 "그렇게 먹고 가면 마음이 한결 편하지"라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드러낸다.

 

사람들을 만나면 반가워서 "사랑해"라고 말하고, 만나면 좋아서 헤어지기 힘들다는 어머니가 기자의 귀가를 재촉한다. "애가 엄마를 찾으면 어떻게? 얼른 가서 애 찾아와야지" 그 말에서 그리도 의지했던 큰아들을 먼저 보냈던 어머니의 마음이 읽힌다.

 

"열심히 싸우되 죽지는 마라. 살아서 해야지. 왜 죽어. 얼마나 아까우면 내가 40년을 이러고 다니겠어. 잘 살라고 싸우는 거야. 죽으면 불효라고…. 그런 죽음은 태일이 하나로 족해야지."

 

어머니와의 인터뷰는 아직 시작하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어머니를 괴롭히는 기자들의 발걸음이 잦아들 11월 13일 전태일열사 40주기 이후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어머니집을 나섰다.

 

전태일문화제에 말씀을 해달라는 요청 전화에 "다른 데 아무 데나 못 나가면서 내일 행사만 가면 사람들이 욕하지"라고 대꾸하면서도 "우리 태일이 때문에 고생들 하는데 힘들더라도 가야겠지"하셨던 이소선 어머니는 10월 30일 시청광장 무대에 올랐다.

 

따로 발언을 준비하지 않고 그 장소에 가서 사람들 얼굴 보고 나오는 대로 말한다는 어머니는 "나한테 2분 얘기하라고 하는데 부산에서도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신 분들도 있는데 2분 주면 나 말 안 한다고 했다"로 입을 열었다.

 

"노동자, 대통령, 비정규직, 서민들 모두 태어날 때부터 기본권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노동자 없었으면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기본권을 잃어버려서 그걸 찾으려고 외치고 있는데 하나가 안돼서 기본권을 빼앗기고 살고 있습니다. 정규직, 비정규직 단결해서 하나가 되면 기본권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가 되면 못 할 게 없습니다."

 

전태일에서 시작돼 이소선으로 이어진 '전태일 정신'도 아직 다 꽃피지 못했다. 1895일을 싸워왔던 기륭투쟁은 조합원들의 끈질긴 투쟁과 연대의 힘으로 1일, '조합원 직접 고용'이란 결실을 맺었다.

 

반면 전태일문화제가 열렸던 지난 10월 30일, 경북 구미에선 반도체 제조업체 KEC노조 지부장이 회사와의 협상 결렬 직후 들이닥친 경찰이 체포하는 과정에서 분신을 시도했다. 여전히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전태일의 외침은 계속된다. "하나가 돼 싸워야 한다"는 이소선 어머니의 당부도 마음 속에 박히는 2010년이다.

덧붙이는 글 | 박계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인터뷰는 "지금, 전태일의 '풀빵'이 필요하다"(http://laborworld.co.kr/v2/column_interview/11212)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노동세상> 홈페이지(www.laborworld.co.kr)에도 함께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