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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이야기

외국에서 곤경에 처한 자국민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나라가 나라인가?

by skyrider 2011. 2. 27.

"밤새 6번 약탈당하고 여자들도 끌려가는데<br>아무 도움도 없는 정부, 한국인이라 서러워"

오마이뉴스 | 입력 2011.02.27 11:39 | 수정 2011.02.27 14:05 | 누가 봤을까? 50대 남성, 전라

 

[오마이뉴스 서주 기자]

2월 26일, 리비아에서 탈출한 한국인 일행이 카이로의 숙소에 도착할 것이라는 정보를 전날 뒤늦게 입수한 나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우리 정부가 그분들을 위해 해드릴 수 있는 지원사항이 무엇인지 미리 체크하여 알려드릴 생각에 대사관에 전화를 넣었지만 순조로운 접촉에는 실패하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우선 일행의 숙소로 지정된 민박으로 찾아갔다. 기자들에게 일일이 무언가를 대꾸해주기에는 내가 생각해도 요며칠 우리 대사관은 너무나 바빴다. 오늘은 68명이 도착했고 어제는 198명이 도착했으며 그 전날 도착한 사람들도 있었다. 게다가 아직 치안이 완벽하지 않은 이집트에서 주이집트 교민들에 대한 안전에도 계속 신경을 써야 했다.





리비아 벵가지를 탈출해 이집트에 도착한 ANC 직원들

ⓒ 서주

리비아를 탈출한 한국인들이 이집트로 왔다

내가 알기로 주이집트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은 스무 명도 채 되지 않는다. 한 달 넘게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철야까지 하고 있는지라 나는 뭔가 거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평소에도 워낙 겁이 많은 나는 매일 회사에 출퇴근하는 것도 간신히 견디는 중이었다. 나는 여전히 시내의 골목들과, 너무 적거나 혹은 너무 많아진 거리의 사람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치안부재의 도시로 변해버린 이 카이로가 두렵다.

단속할 경찰들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아무렇지도 않게 교통법규를 무시하는 시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각 도시에서 각 분야에서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고, 아직도 남아 있는 12000여 명의 달아난 죄수들과 호시탐탐 시민을 공격하는 친무바라크파들은 시민들의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이집트에, 이러한 카이로에 사선을 넘은 수백 명의 한국인들이 피난을 온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처음에 매우 놀랐었다.

하지만 이집트에서는 우리들의 눈 앞에서 군대가 시가지를 향해 대포를 쏘아대는 것도 아니고, 거리에 총알이 난무하는 것도, 하루에 600여 명의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 이집트는 최소한 '숨은 쉴 수 있는 곳'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웃의 그 어느 나라에 있는 사람에게라도 이집트는 당연히 제1의 피난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매일 수만 명의 피란행렬이 리비아에서 이집트 서부사막 저 끝의 국경마을 살렘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들 중에는 한국인을 비롯하여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도 있었고 150만 재리비아 이집트인들의 일부도 섞여 있었다. 어제 카이로시내의 의사들은 자청하여 국경마을로 이동했다. 모두 20대의 버스들이 그들과 구호품들을 태웠다. 그 가는 길이 멀고 중도에 지나는 지역마다 그들을 보호해줄 콘보이도 모습을 감춘 상태이지만, 이집트인들은 상처난 자신들의 팔뚝에 붕대를 감은 채 외국인들을 돕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사선을 넘는 이들과, 그들을 도우려는 이집트인들 앞에서 너무나 부끄럽기만했다.

드디어 만난 리비아 교민들

내가 만난 리비아교민들은 모두 ANC라는 한 회사에 소속되어있는 한국인 직원들이었다. ANC는 실제로는 한국과 리비아가 절반씩의 지분을 갖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리비아의 국영기업으로 등록되어있는 업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 교민들의 불안은 바로 그점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ANC는 벵가지지역 외에도 리비아 전역에 지사를 두고 있으며, 한국인 직원은 모두 약200명 정도가 소속되어 있다. 각 지사에는 우리 한국인 직원들이 적게는 두어 명 그리고 많게는 수십 명씩 상주하고 있었다. 벵가지에 소요가 일기 시작한 지난 2월 15일에도 직원들은 정상적으로 회사에 출근하여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다음날부터는 벵가지 시전체에 위기감이 퍼져 자체적으로 근무시간을 단축했단다.

벵가지는 리비아에서는 가장 반카다피적인 도시이며, 가장 먼저 시민군에게 점령된 곳이기도 했다. 그만큼 벵가지를 수호하려는 시민군과 벵가지시내로 들어오려는 정부군의 충돌이 그 어느 지역에서보다도 극렬했다. 외신들이 앞 다투어 리비아 상황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벵가지 전투를 기점으로 리비아 전역에서 반카다피 시위가 일어났고, 이집트와는 다르게 시위대는 무장을 하여 시민군이 되었다. 외신은 이제 리비아사태를 '내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2월 18일 금요일이 되자 현지의 상황이 매우 악화되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벵가지 공항이 폐쇄되었다는 말도 들려왔다. 2월 19일 ANC의 한국인 직원들은 벵가지 시내에 있는 대우발전소의 캠프로 대피했다. 캠프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100명 이상을 수용할 수가 없어 ANC직원들도 22명만이 몸을 의탁할 수 있었다. 벵가지 본사에 있던 나머지 ANC의 한국인직원들은 모두 현지인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민간인들의 집으로 몇 명씩 나뉘어 피신을 했다. 현지인들 외에 목숨을 걸고 우리 직원들을 도와주는 한국정부의 관계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현지인들은 숙소를 구해주었고 음식을 구해다주었다. 그리고 누구 한 사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 직원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이는 없었다.

한편 대우발전소에 피신해있던 ANC직원들 가운데에는 영국 국적자가 세 명, 그리고 캐나다 국적자가 한 명 포함되어 있었다. 영국 국적을 가진 직원들에게 곧 영국 정부가 항공기를 띄울 것이니 한 장소로 모이라는 연락이 왔다. 머지 않아 캐나다 국적의 직원에게도 영국 항공기에 탑승하라는 캐나다 대사관의 공지가 도착했다. 그렇게 네 명의 직원들은 가장 먼저 무사히 리비아를 탈출했다. 남은 사람들이 주리비아의 한국대사관에 문의도 하고 항의도 하였지만 '현장이 가장 안전하니 움직이지 말라'는 말만 들었다. 하지만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칸스카캠프에 있던 직원들은 약탈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하룻밤에 여섯 차례의 약탈을 당했다





리비아 아즈다비야 공장의 중기관리책임자로 근무하던 이상도씨

ⓒ 김미선

19일 폭격이 최고조에 달했을즈음 아즈다비야 공장의 중기관리책임자로 근무하던 이상도씨는 4명의 한국인 직원과 동남아시아계 노동자들과 함께 현장의 숙소에 숨어있었다. 경비원들은 진작에 어디론가 도망치고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밤 8시경 리비아 경찰들이 현장 밖에 세워두었던 철제 바리게이드를 부수고 침입했다. 그들은 공장 안에 있던 차량들을 약탈해갔다. 그들이 떠난 다음 이번에는 군인들이 쳐들어왔다. 그리고 냉장고, 텔레비전과 컴퓨터 등 가전제품들을 닥치는대로 집어갔다. 군인들이 떠난 뒤에는 신분을 알 수 없는 약탈자들이 계속해서 밀려들었다. 배에 긴 칼을 들이대며 위협을 했기 때문에 저항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침입자들은 더이상 가져갈 것이 없자 여자들을 끌고 갔다. 여자들을 함부로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고서야 비로소 한국인 직원들은 약탈자들이 무슬림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했다. 리비아는 상당히 원칙적인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에 절대로 여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랜 근무의 경험으로 직원들은 알고 있었다. 같은 날 폐쇄되었다던 벵가지 공항으로 카다피가 고용한 서아프리카 용병들이 들어와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에서부터 시민들을 향해 난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들은 여자와 어린 아이를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숨죽인 채로 며칠이 더 흘러갔다.

ANC의 뱅가지본부 부사장인 알리 이브라임은 터키 선박이 외국인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곧 리비아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자사의 한국인 직원들에게도 알렸다. 직원들은 각자 여권카피를 준비하고, 흩어져 숨어있던 동료들에게 어렵사리 연락을 취해 함께 탈출할 명단을 만들어 터키영사관에 제출했다. 터키영사관에서 자국민 외에도 자리가 남으면 접수한 순서대로 탑승시켜줄 의사가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주리비아 한국대사관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터키영사관으로부터 '접수한 이들이 한국국적자임을 확인해달라'는 요청을 받고서야 우리 직원들과 접촉했다고 한다. 명단을 넘겨받고 여권을 확인한 후 터키영사관에 '무사히 전달했으니 터키선박에 탑승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전해들은 직원들은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중국정부가 대당 3000명을 태울 수 있는 그리스 선박 두 대를 마련해 재리비아 중국국민 5000여 명을 한 번에 모두 구출해갔다는 소식도 부럽지 않았다. '무사히 터키선박을 탈 수만 있다면' 하는 기대때문이었다.





25일 리비아 동부 항구도시 토브루크에서 시민들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유혈진압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는 카다피는 벵가지와 토브루크에서 잇달아 통제력을 상실했다.

ⓒ EPA=연합뉴스

한국정부의 '신원확인'이 안 돼 눈앞에서 좌절된 탈출

그러나 터키선박을 타기로한 날에 항구에 도착한 ANC의 한국인 직원 68명은 '신원이 확인된 한국인 접수명단을 받은 적이 없다'는 터키영사의 청천벽력같은 말을 들어야했다. 심지어 동구권 국적자들의 명단도 있는데 한국대사관으로부터는 신원확인서를 받지 않았다고 했다. 당연히 터키 선박은 우리 직원들의 승선을 거부했다. 눈 앞에서 생존의 희망을 놓아보낸 직원들은 너무나 분하고 억울했다.

대우발전소는 벵가지의 한국인회사로는 유일하게 인터넷이 되고 있었다. 덕분에 그곳에 피신해있던 ANC의 직원들은 한국의 가족들과 짤막하게나마 안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한국의 모신문에서 '40여 명의 한국교민들이 터키선박에 탑승하여 무사히 리비아를 출국했다'는 기사를 냈다는 소식도 직원들은 그때 알았다. 어이가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력으로 리비아를 탈출하는 길 밖에 없었다. 국민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우리 정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고 서러웠다. 캠프나 숙소에서 탈출할 때 거의 빈몸으로 가방에는 손에 잡히는 아무것이나 쑤셔넣어서 들고온 직원들이 태반이었다. 수중에 돈은 고사하고 제대로된 탈출의 준비가 있을리도 없었다.

눈 앞이 막막하던 그때 선뜻 나서서 우리 직원들을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현지인들이었다. 그들은 이집트로 이어지는 리비아의 국경까지 차량을 수배하여 우리 직원들을 태워주었고, 굶주리지 않도록 끼니를 구해다주었다. 그리고 국경까지 가는 길은 시민군들이 보호를 해주었다. 그때가 리비아 사태가 나고 처음으로 안전함을 느낀 순간들이었노라고 ANC의 한국인들은 회고했다.

"이 점을 꼭 잊지말고 써주세요. 우리를 도와준 이들은 리비아 현지인들이었노라고. 우리를 보호해준 이들도 모두 현지인들이었다고. 기자양반, 꼭 써주세요"

신신당부하던 그들의 눈이 충혈되고 있었다. 나도 눈물이 났다.

탈출도 알아서, 비용도 알아서...한국교민이라 서럽다

대한민국 외교부에는'테러대비 대국민구조지침메뉴얼이 마련되어 있는가'하는 것이 카이로에 도착한 우리 리비아 교민들이 제일 먼저 쏟아낸 질문이었다. 하다못해 지중해를 지나는 일반어선이라도 수배해서 피신시켰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성토도 있었다.

바로 하루 전날 오후 1시경에 트리폴리로 들어간다는 직원 8명과 이제는 연락이 두절되었는데 그들의 안전확인을 해줄 수 있을만큼 리비아의 우리 대사관이 '비상시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현지인들과의 넓은 인맥'을 보유하고 있는지 '이제까지의 정황을 보면' 매우 의심스럽다는 불만도 있었다.

또한 국경에서 카이로로 이동할 때 렌트했던 차량들과, 이집트 출국시까지의 모든 숙식, 그리고 귀국항공편 모두를 마악 도착한 그들이 부담해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못했다. 오늘 주이집트 한국대사관에서의 긴 회의끝에 나온 결론은 결국 개인이 부담해야한다는 사실의 확인뿐이었다.

이 부분은 약 4주 전 이집트교민들이 피난할때의 사정과 같았다. 우리 역시 본국에서 명색이 '구조'하라고 보내준 특별전세기에 천 몇 백 불씩을 지불해야한다는 사실에 기함했었다. GNP 2만불의 나라가 맞는가 우리는. 그토록 우습게 아는 중국인들도 통째로 인근의 외국선박을 렌트해 급파했는데 우리 외교부의 능력은 중국수준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어렵게 뽑은 외교관들을 무기도 없이 현장에 내보내어 맨몸으로 피터지게 뛰어다니다 스러지게 하는가. 자국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일선 외교관들의 자괴감은 또 어쩔 것이며, 생사의 갈림길에 이르러 무력한 국력을 깨달았어야하는 우리 국민들의 자존심은 어떻게 회복시켜줄 것인가.

우리는 그저 '단 한 명의 한국인이라도 지구 어디든 쫓아가서 구해줄 수 있는' 나라의 백성이 되고 싶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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