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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 이런 때도 있었다고?? 그런데 왜 이렇게 휫까닥 했지?

by skyrider 2011. 4. 17.

40년차 저널리스트의 슬픈 오늘 [2011.04.18 제856호]
[사람과 사회]
한국형 르포 새장 열었던 40년차 언론인 조갑제…
팩트의 기자를 확신의 논평가로 만든 한국 언론의 현주소
고나무
»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1971년 <국제신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13년차 기자는 한 사형수의 살인사건을 취재했다. 1984년 여름부터 취재에 매달렸다. 경찰·검찰보다 더 많은 사건 관련자를 만났다. 판사보다 많은 자료를 읽었다. 2년의 취재 끝에 기자는 사형수의 유죄판결이 ‘오판’일 가능성을 1986년 뚜렷이 입증해냈다. 기자는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한길사) 말미에 “정치, 사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고문수사와 오판도 줄어들 것”이라고 썼다.

민주주의 열광한 ‘청년 조갑제’

기자는 민주주의에 열광했다. 그가 6월 항쟁 등 민주화에 대해 1988년에 쓴 문장은 뜨겁다. “오늘의 변화는 누가 만들어준 것이 아니다.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 박종철, 권인숙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한두 번의 삽질을 거들었던 것이다.” “김대중씨에게는 저 노벨상도 부족하다”고도 썼다.

그러므로 지난 4월6일 서울 광화문 오피시아빌딩 앞에서 취재수첩을 한 번 더 꺼내야 했다. 17층 ‘조갑제닷컴’ 사무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미리 준비한 질문을 되읽었다. 조갑제(66) 대표에게 질문할 리스트는 길었다. 4월7일이 ‘신문의 날’ 55돌이었음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올해로 조 대표는 언론인이 된 지 40년이 됐다. 조 대표의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와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한길사)은 언론계 안팎에서 여전히 한국형 르포르타주의 대표작으로 회자된다. ‘팩트’ 취재의 밀도가 높다. 액체지만 무거운 수은처럼, 읽는 사람의 심장에 무겁게 흘러든다.

조 대표는 1971년 2월 부산에 있는 <국제신보>에 입사했다. “1965년 부산수산대학에 들어가 2년 다니다 군에 갔는데 복무 기간이 4개월 연장됐어요. 1·21 청와대 습격사건 때문에 (복무 기간이) 3년4개월이 되는 바람에 제대하고 복학하기가…. 당시 졸업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는 신문사가 몇 군데 안 되더라고. <국제신보>가 학력을 안 따지고 뽑았기 때문에 들어갔습니다.” <국제신보>는 <국제신문>의 전신이다. ‘1·21 사건’이란 1968년 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가 박정희 당시 대통령 저격을 목표로 남한을 습격한 사건이다. 북한이 조 대표를 기자의 길로 밀어넣은 셈이다.

조 대표는 “기자는 사실주의자”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런 태도는 <국제신보> 때 훈련받은 것이다. 그는 1974년 ‘중금속 오염의 추적’ 시리즈로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몇 번을 읽어봐도 ‘스토리텔링’이나 ‘장면 묘사’ 등의 기법이 드러나지 않는다. ‘재미있다’는 느낌도 없다. 그러나 집요함이 인상적이었다.

 

 

오후 4시 사무실 역광에 조 대표의 백발이 빛났다. 인터뷰하는 책상 바로 옆에서 조수 4명이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조 대표의 말투는 데시벨이 낮고 느리지만 어휘는 명징했다. “첫 수습 교육할 때 맨 처음 들어온 분이 ‘문장은 짧고, 정확하고, 쉽게 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제 문장론의 1장 1조입니다.”

조 대표에게 가족관계를 물었으나 “설명할 게 없다”며 답을 피했다. 미국 르포 작가 톰 울프가 “뉴저널리즘이 문학의 영토에서 소설을 지워버릴 것”이라고 주장했던 게 1972년이다. ‘뉴저널리즘’이란 긴 호흡의 취재와 소설의 표현법을 빌려 일간지 기사를 뛰어넘자는 움직임이다. 톰 울프는 인물 취재를 할 때 반드시 ‘삶의 조건’(Status Life)을 함께 취재하라고 했다. 가족관계, 소득수준, 종교, 말투, 음식 취향 등이 총체적으로 한 인간을 구성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뉴저널리즘의 주장을 조 대표는 모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탐사보도에서 칼럼니스트로

그러나 톰 울프를 알든 모르든, 조 대표는 톰 울프와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저널리즘’을 고민했다. 일본 르포 전문기자 다치바나 다카시가 계기였다. “일본 잡지 <문예춘추>에 1974년 다치바나 다카시가 ‘다나카의 인맥과 금맥’을 썼습니다.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를 몰락시킨 기사입니다. 그런 기사에 의해 큰 정치 변혁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상당히 부러웠지요.”

» 조갑제 대표는 “달라진 언론 환경”을 근거로 기사 쓰기와 논평 쓰기의 공존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조 대표는 “1980년대 내 행동이 (지금과) 단층이 아니다. 연결된다”고 주장했다.
1980년 회사 몰래 병가를 내고 광주 민주화운동을 취재하다 해직된 뒤부터 내내 월간지에서 탐사보도를 했다. 1981~83년 월간지 <마당>에서 편집장과 취재부장으로 일했다. <마당>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혁신적이었다. 한글 전용에 가로쓰기를 했고, 사진을 크게 실었다. 진보 성향의 필자도 많았다. 이후 1984년부터 2005년까지는 <월간조선>에서 글을 썼다. 아직도 많은 판사들이 명저로 꼽는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도 당시 작품이다. 경찰의 고문수사로 한 시민이 살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에 처해진 과정을 밝혀냈다. ‘경찰 수사-검찰 수사-1심·2심·3심-교도소’까지 발로 뛰었다. 당시 <월간조선>은 취재와 기고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았다. 조 대표는 열렬한 민주주의자였다.

조 대표의 이런 문장은 기자들의 가슴을 친다. “기자는 자기가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독자가 읽고 싶어하는 것을 쓰는 직업인이 기자다. 내가 쓰고 싶어하면서도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는 소재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래다. 물기둥을 일으키면서 유유히 대양을 떠도는 고래와 이 순진무구한 고래들을 글자 그대로 작살낸 인간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이다.”(1988년 7월 <조갑제의 대사건 추적-군부> 머리글)

기자의 숙명을 이야기하던 탐사보도 기자는 40년 뒤 “대북 전단 살포”를 주장하는 ‘칼럼니스트-논평가’가 되었다. 사회를 보는 눈도 ‘개혁’에서 ‘보수’로 바뀌었다. “지금 대표님은 기자가 아니라 ‘고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표님은 기자입니까, 칼럼니스트입니까.” 조 대표는 잠시 눈길을 떨어뜨렸다. “논객이란 말은 싫어합니다. 한가해 보여서요.” 그는 여전히 한 달에 200자 원고지 2천 장 분량의 기사를 쓴다고 해명했다.

‘자기 말’이 늘었음은 인정했다. “논설식으로 쓰는 분량이 많아졌을 겁니다. 그건 인터넷 매체(‘조갑제닷컴’)의 특징상 자기를 드러내도 되거든요. 그러나 팩트는 팩트대로 씁니다. …그게 모순된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 언론 환경이 바뀐 것을 고려해야 하지 않나요.”

오후 5시께부터 인터뷰는 논쟁에 가까워졌다. 조 대표의 문장은 종종 반말체로 끝났고, 흥분한 듯 같은 단어를 반복하기도 했다. 논평이 많아진 이유를 물었다. “편집장 하면서 취재할 시간이 줄었어요. 또 논평을 많이 요구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어요. 팩트 전달뿐 아니라 주장도 전달하는 게 필요한 시대가 되었어. 주로 이념 대결 구도하에서 그렇게 된 것이고.”

조 대표는 다른 이유도 거들었다. “민주화 시대가 되고 나서 내가 화나는 건, 뻔한 사실이 있는데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니까. 화가 나면 자연히 논평을 쓰게 돼요. 더구나 천안함 폭침도 안 믿는다니, 그런 걸 보면 자연히 팩트를 중시하는 사람으로서 화가 나게 돼 있잖아요. 뻔한 거짓말.”

“과정·방법보다 결론이 맞느냐가 중요하다”

‘뻔하다’는 단어는 ‘직업적 회의주의자’인 기자가 가장 멀리해야 할 말과 태도다. 논쟁이 이어졌다. “당시 시점에서 팩트가 불분명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라고 물었다. “상식에서 판단하면 되는 거지. 그러니까 인간의 상식이 필요한 거 아니에요? ‘조갑제닷컴’은 천안함 사건이 지난해 3월26일 벌어지고 3월27일부터 ‘북 잠수함정에 의한 격침’이라고 단정했어요. 단정할 충분한 자료가 노출돼 있었고 결과적으로 맞았다고.” “과거 대표님의 취재 원칙상 직접 현장을 가서 취재하는 게 옳지 않습니까?” “현장 취재 안 해도 알 수 있는 거지, 그거는. 허허, 취재 현장 그건 다 방법론이고 결론이 맞으면 되는 겁니다.” “방법론이 아니고 핵심 아닙니까.” “아니에요, 그건 이미 드러난 것만 봐도 뻔할 뻔자 아니에요? 태양이 동쪽에서 뜨느냐 서쪽에서 뜨느냐 차원의 논쟁이지. 천안함 폭침에서 취재 현장이 어딨어. 물밖에 더 있어요?” “관련자들을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방식으로 취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거기에 준해서 했지. 내가 내린 결론이 맞느냐 안 맞느냐가 중요한 거지, 내가 무슨 취재를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지.”

태도에 대해 질문했지만, 논쟁은 도돌이표처럼 이념 논쟁으로 돌아왔다. 그는 지금 “오판이 줄었으므로” 사형제에 찬성하며 “노벨상이 아깝지 않다”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친북”으로 규정한다. 조 대표는 왜, 언제부터 북한에 대한 태도를 한 정치집단과 정치인을 판단하는 결정적 준거로 삼게 된 걸까. “한국에서 인권과 자유를 누리게 되면 자연스레 북에서 더 열악하게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 아닌가. 왜 안 갖느냐 이거야.” “자칭 진보세력이 북 인권을 비판하지 않는 행위는 가슴속에 이념적 금단의 선을 스스로 쳐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도덕적 인간으로서 불구자가 된 것”이라고도 했다.

더 이상의 논쟁은 무의미했다. “팩트는 신성하다”고 말했고 “확신처럼 무서운 전율은 없다”(<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던 탐사기자는 40년 뒤 “무슨 취재를 했느냐”가 아니라 “결론이 맞느냐가 중요하다”고 확신에 차 말한다.

남재일 경북대 교수(신문방송학)는 지난 4월7일 조 대표에 대해 “전체적으로 보면 슬프다”고 평했다. 남 교수는 통화에서 “조 대표의 기자로서 직업적 능력, 즉 끝까지 파고들어 취재하는 능력은 훌륭했다”며 “기자로서의 기능인 자질과 언론인의 계몽자 역할이 결합하는 과정에서 어긋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조 대표가 <월간조선> 시절 국가안전기획부를 취재하며 대북 정보 특종을 많이 해 북한 현실에 관한 고급 정보를 접했고, 이것이 그를 반공주의로 이끈 것 같다고 남 교수는 추측했다.

‘기자 조갑제를 논평가 조갑제로 만든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남 교수는 “(북한 관련) 팩트를 아는 사람으로서의 확신이 작용한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남 교수는 “한국 언론의 정파적 성향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과 이런 언론의 정파성이 경영에 도움되는 언론 환경도 이유로 꼽았다.

신문 등 종이매체 열독률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10년 11월 발표한 ‘2010 언론수용자 의식조사’에 따르면 신문 주간 열독률은 52.6%로 2002년에 비해 30%가량 떨어졌다. 신뢰도도 떨어진다. ‘특정 사안을 동시에 보도할 때 어떤 매체를 가장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74.5%는 텔레비전을 택했다. 신문을 꼽은 응답자는 13.1%였고, 10.8%가 인터넷을 꼽았다. <월간조선>과 <한겨레21> 모두 이런 언론 환경에서 자유롭지 않다.

팩트보다 주장 앞선 한국 언론의 위기

조 대표는 예의가 몸에 배어 있었다. 오후 5시20분 인터뷰를 마쳤다. 사무실 밖으로 따라나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내내 서 있었다. ‘신문의 날’을 하루 앞둔 날 오후 5시30분, 신문로 하늘은 흐렸다. “‘기자 조갑제’가 ‘논평가 조갑제’로 바뀐 현실 자체가 한국 언론의 위기 징후가 아니냐”라는 마지막 질문은 끝내 하지 못했다. 시간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고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문장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조 대표는 여전히 고래 이야기를 쓰지 못하고 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