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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이야기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장훈 감독의 <고지전>

by skyrider 2011. 7. 24.

남·북한 두 장교, MB정부에 경고하다
[영화로 읽는 세상이야기 88] 이승만 '북진통일'에 죽은 300만 명 <고지전>
11.07.24 11:23 ㅣ최종 업데이트 11.07.24 11:23 박호열 (tkaenao)

※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방첩대의 일원으로 휴전회담에 참석했던 은표가 친일파를 철저하게 청산하지 못한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 영창대신 악어중대로 전출된 후 수혁과 재회한다.
ⓒ TPS 컴퍼니
고지전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 유엔군측 수석대표와 공산측 수석대표가 국어·영어·중국어로 된 전문 5조 63항의 휴전협정 조인식을 갖습니다. 이로써 휴전회담 개시 2년, 전쟁 발발 3년 1개월 2일 만에 한국전쟁은 정전상태로 들어갑니다. 하지만 휴전회담을 전후로 협정을 유리하게 체결하기 위해 남과 북은 치열한 공방전을 펼칩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가 철원-평강-김화로 이어지는 철의 삼각지에서 벌어졌던 동부전선의 395고지입니다. 불과 10일간의 전투에서 남과 북에서 2만여 명이 죽고, 고지의 주인이 스물 네 차례나 바뀌면서 풀 한포기 남지 않은 민둥산으로 변한 고지의 정상이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 후대의 사람들은 이 '지옥의 애록고지'를 백마고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백마고지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스크린을 달구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의 마지막 날, 기록되지 않은 그들의 마지막 전투'라는 헤드카피처럼 영화는 휴전협정이 발효되기 전 12시간 동안의 '애록고지'를 집중적으로 조명합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나는 줄 알았건만, 오히려 살육의 지옥도로 변한 고지에서 악귀처럼 싸우다 죽어가는 남과 북의 젊은이들을 통해 동족상잔의 비극과 참상을 극사실로 묘사한 <고지전>(7월 20일 개봉)입니다.

 

영화의 주 무대는 반경 2.5km의 작은 고지지만 인근 30~40km를 커버하는 동부전선의 전략 요충지 애록고지. 하루에도 수차례 주인이 바뀌는 이곳에 방첩대 중위 강은표(신하균)가 신임 중대장과 함께 부임합니다. 일명 악어중대로 그가 전출된 이유는 이 중대에서 고향에 보낸 편지가 인민군이 보낸 것이라는 첩보가 입수되고, 또 전사한 중대장의 시신에서 아군의 총알이 발견됐기 때문. 부대 내에 인민군과 내통하는 자가 있는지 조사하는 게 그가 맡은 임무입니다.

 

악어중대에서 은표는 2년 전에 헤어져 죽은 줄로만 알았던 대학 친구 김수혁 중위(고수)와 재회합니다. 그런데 범생이였던 수혁이 이등병에서 중위로 특진해 악어중대의 실질적 리더이자 전쟁 병기로 변신해 있습니다. 임시 중대장 대위 신일영(이제훈)은 자신의 팔에 모르핀 주사를 놓는 등 중대 전체가 무언가 이상합니다. 신임 중대장 환영식에서는 정신을 놓은 노병이 이곳을 포항으로 알고 부대원을 찾고, 일순간 정적이 감돕니다. 알 수 없는 살기와 긴장이 흐르는 가운데 은표는 고지탈환 작전에 투입됩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은 안개 속으로 치닫고 다시 고지탈환 작전이 개시됩니다. 하지만 중대장의 작전 실패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중대가 전멸위기에 처하자 수혁은 후퇴를 주장하고, 중대장은 고지사수를 명령합니다. 그 순간, 수혁이 권총을 빼들고 거리낌 없이 중대장을 사살합니다. 하극상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중대원들. 무표정한 그들의 얼굴에 은표는 경악하고, 수혁에게 권총을 겨눈 채 살아남으면 군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체 2년 동안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영화는 <고지전>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스펙터클한 볼거리와는 선을 긋습니다. 대신 단테의 서사시 <신곡>처럼 핏물이 줄줄 흐르는 질척한 황토와 갈가리 찢겨진 팔다리와 불꽃놀이를 하듯 고지에 퍼붓는 폭격과 그 한가운데에서 울고 웃다 죽어가는 병사들의 얼굴을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하늘과 대비하며 '지옥의 스펙터클'을 펼쳐 보입니다.

 

승패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다

 

  
“30번까지는 셌는데 그 다음에는 기억이 안”난다는 수혁의 말처럼 애록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악어중대 병사들이 깎아지른 능선을 다시 기어오르고 있다.
ⓒ TPS 컴퍼니
고지전

영화는 싸우는 이유조차 잊은 채 지옥보다 더 지옥 같은 고지쟁탈전의 소용돌이로 내몰린 남북 병사들의 삶의 끝자락을 시종일관 냉정하게 응시합니다. 그리고 그 무간도의 문은 고지탈환 작전에서부터 열리기 시작합니다. 미군의 공중폭격에 이어 고지를 점령한 악어중대는 인민군의 시체를 죽은 자리에 바로 묻어버립니다. 삽으로 흙을 퍼 덮으려하자 그 전에 죽은 남북 병사들의 팔과 다리와 얼굴이 튀어 나오고, 은표는 기겁을 합니다.

 

그와 함께 악어중대의 비밀도 한 꺼풀씩 벗겨집니다. 탈환작전 후 은표는 14벙커에서 술을 마시며 낄낄거리는 수혁과 중대원들을 발견합니다. 중대원에게서 가로 챈 편지에는 "남조선 동무들 덕분에 오랜만에 집에 소식을 전하게 됐시오"라고 적혀있습니다. 뺏고 빼앗기는 고지전이 반복되자 후퇴할 때 땅을 파 먹을거리 등을 숨겨 놓았는데, 인민군이 술과 편지를 남겨 놓았고 이후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두고 갔던 것. 이 장면에서 영화는 <공동경비구역 JSA>를 연상시키며 적이자 친구인 분단과 대결의 시대를 보다 명료하게 각인시킵니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의 3인칭 관찰자의 시점에 선 은표가 이 14벙커 회합에 합류한다는 것입니다. 비단 이 벙커에서 남북 병사들이 비밀리에 거래를 해온 사실을 확인하고 전임 중대장의 죽음이 수혁 일행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판문점에서 위정자와 군 수뇌부들이 땅따먹기 놀이처럼 벌이는 휴전선 긋기 다툼을 하는 2년 동안, 300만 명 이상이 '고지전' 속에 참혹하게 죽어간 한국전쟁의 이면을 은표를 통해 증언하기 위한 것으로 읽힙니다.

 

악어중대의 과거와 진실을 알게 되면서 은표는 이 전쟁이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들이 겪은 전쟁은 적과 친구가 뒤섞인 혼돈의 전쟁이자 친구도 죽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존의 전쟁이었다는 사실을. 1950년 8월 17일 포항 해변가. 후퇴하는 악어중대 1소대원들이 상륙함(LCM)에 먼저 오르고 2소대원들이 뱃전을 잡고 기어오르려는 아비규환의 와중에 일영이 벌떡 일어나 기관포로 2소대원들을 전멸시켜 버린 것입니다. 가까스로 상륙함은 탈출에 성공하고 자살하려는 일영을 가로막은 수혁은 누구인지 모르는 이들을 향해 목 놓아 절규합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12시간 전투'입니다. 수혁이 저격병 태경에게 죽은 뒤 휴전협정 소식이 애록고지에 전해지고 남북 병사들은 얼싸안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연대본부는 협정이 발효되는 22시까지는 12시간이 남았다며 마지막 고지점령 작전을 하달합니다. 이제는 살육의 향연이 끝났으리라 생각하며 안도하는 관객들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반전의 '엔딩 15분'을 펼쳐 놓습니다.

 

휴전협정 2년간 300만 명 이상이 사상한 한국전쟁

 

  
휴전협정 소식이 알려진 후 계곡에서 멱을 감던 악어중대가 인민군 부대와 부딪치며 일순 긴장이 감돌지만 일영이 “잘 가라”고 인사를 건네고 인민군 장교는 “진짜 끝났구먼 기래”라며 화답한다.
ⓒ TPS 컴퍼니
고지전
영화는 1951년 1·4 후퇴와 휴전협상으로 끝나버린 줄 알았던 한국전쟁이 휴전협정 전 2년 동안 밀봉해 두었던 '고지쟁탈전'의 진실을 조명합니다. 해발 650m 산 전체를 직접 깎아 만든 참호와 벙커 등 철저한 고증으로 생생하게 구현한 애록고지에서 '분단과 인간'의 민낯을 역동적인 카메라 풀샷으로 조명한 영화의 완성도 역시 기대 이상입니다. 특히 한 평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겠다며 300만 명 이상을 전쟁이 아닌 학살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역사적 사실을 스크린에 재현한 것은 분단영화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할 만합니다. 

 

이 점은 "스펙터클의 도구로서 소비되는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던 장훈 감독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에 걸맞게 영화는 1953년 1월 서울에서 '북진통일'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이는 관제데모로 오프닝을 엽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판문점 휴전회담장으로 이동해 미군과 북한군의 휴전선 선긋기 공방을 비춥니다. 이후 영화는 휴전협정 조인식 장면 등을 비추며 영화가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킵니다.

 

감독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이것은 프로이센의 장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규정했던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킵니다. 37개월간 진행된 한국전쟁 기간 동안 400만의 사상자를 냈으나 그 중 300만 명의 사상자가 휴전협상이 진행 중이던 2년 동안 희생됐으며, 결렬과 재개를 반복하는 가운데 세계 역사상 가장 길었던 휴전회담이 벌어지며 사상자가 급증한 이면에는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자신의 집권기반을 다지는 데 몰두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휴전협상 와중에 이승만이 주창한 북진통일운동은 분단체제와 극우반공체제를 강화시키는 주된 무기로 사실상 자신의 영구집권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보호막에 불과했습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미국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카드를 꺼내들어 미국과 정치적 거래를 하고 그 와중에 반공포로를 석방해 휴전협정을 중단시킵니다. 결국 휴전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전쟁포로 문제가 합의된 시점에서 반공포로를 석방해 협상은 난항을 거듭합니다.

 

그 기간 동안 피의 능선부터 백마고지 등 애록고지에서는 병사들이 총알받이로 숨져갔고 이승만은 이들의 죽음을 담보로 휴전협정 전에 자신이 요구한 내용대로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 초안을 얻어냅니다. 이 조약이 오늘날 연합방위 체제의 법적 근간으로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과 정부 간 또는 군사 당국자 간 각종 안보 및 군사관련 후속 협정들의 기초를 제공한 것은 자명합니다.

 

그 이승만을 위해 이명박 정부하의 KBS가 8월 15일부터 5부작 특집 다큐멘터리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제1공화국>이라는 제목의 이승만 특집을 방송할 예정입니다. 지난 6월 24일 다큐멘터리 2부작 <전쟁과 군인>을 통해 친일거두 백선엽을 전쟁 영웅으로 미화한 KBS가 마침내 '친일종결자' 이승만까지 미화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KBS가 공영방송의 외피를 벗어던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극우보수세력의 결집을 위해 이제 역사쿠데타마저 서슴없이 자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영화는 '엔딩 15분' 직전 애록고지에 짙게 내려앉은 안개 속에서 남북의 병사들이 '전선야곡'을 합창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연출합니다. 예고된 살육의 현장을 관통하며 고지에 울려 퍼지는 노래는 그러나 노래가 아닙니다. 그것은 휴전협정을 조인했음에도 자신들을 지옥으로 내모는 남북의 위정자들을 향한 장송곡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남북의 두 장교는 '엔딩 15분'을 전후로 분단 60년을 건너 뛰어 냉전의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이명박 정부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던집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건 살아남는 것이다. 우리는 빨갱이랑 싸우는 게 아니라 전쟁과 싸우는 거야."

"내레 처음에는 싸우는 이유를 확실히 알고 있었어. 근데 이제는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