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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여름이면 더위를 식히기 위한 극장가의 단골 레퍼토리를 이루는 것이 호러 영화와 재난영화다. 호러든 재난이든 사람이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공포로 더위를 식혀보려는 것은 마찬가지다. 2004년 초여름 초대형 블록버스터 재난영화 <투모로우>(롤랜드 에머리히 감독)가 더위를 꽁꽁 얼려버릴 초대형 얼음폭풍이 불러오는 추위로 극장가를 강타했을 때만해도 날씨가 이렇게까지 요란법석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요즘 들어 영화 속에 그려졌던 재난 상황이 자꾸 되새겨진다.
사전을 찾아보면 ‘뜻밖에 일어난 재앙과 고난’을 재난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날씨가 빚어내는 온갖 상황은 재난이 아니다. 이미 예고되었고, 경고되었던 사건이므로 필연이다. 지구온난화로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 환경오염으로 오존층에 뻥 뚫린 구멍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것, 지구 곳곳에서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화석연료의 사용을 그만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연스레 흐르던 물길을 바꾸겠다고 삽질에 돈질까지 하고 있다.
기상 이변, 재난이 아닌 이유
잠자던 화산이 폭발한다거나, 하늘 저편에서 혜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온다거나, 아니면 외계의 생물이 느닷없이 지구를 침공해온다거나 하는 일들은 그야말로 뜻밖의 일들이니 재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알면서도 피할 길 없는 운명이 아니라 뻔히 그럴 줄 알면서도 스스로 만들어낸 재앙과 고난에 대해서 ‘뜻밖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충분히 예상가능한 사건으로서의 인재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투모로우>는 지금 상태대로라면 머지않은 날 인류를 덮치고야 말 것이 거의 틀림없는 재해를 경고하는 영화다. 남극의 빙하가 녹아서 갈라지고, 그 녹아내린 얼음물이 해류를 바꾸고, 바뀐 해류를 타고 급속히 차가워진 공기가 초대형 얼음폭풍을 만들어내면서 북반구가 온통 얼어붙어, 지구는 다시 빙하기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가장 먼저 감지해서 경고하는 것은 과학자의 몫이지만, 이런 경고에 귀를 기울여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정치가의 몫이라고 한다면 <투모로우>는 현재 미국 정부를 어지간히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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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투모로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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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재난영화에서 전지구적 규모의 재난이 닥치면 어김없이 세계의 지도자 노릇을 하던 미국 정부가 이 영화에서는 시쳇말로 ‘쪽’도 못쓴다. 부통령은 거듭되는 경고를 무시하고 안일한 정치논리로 사태를 악화시키는가 하면, 심지어 대통령은 뭐 뾰족한 수하나 내지 못하고 피난길에 얼어 죽는다.
하긴 전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28%나 차지하는 공해물질을 쏟아내면서도 지구온난화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국제적 기후변화협약의 구체적 이행 방안으로 선진국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규정한 교토의정서에서 자국
산업보호를 핑계로 제멋대로 탈퇴해버린 미국이 엄청난 얼음폭풍 앞에서 속수무책 얼어붙는 것을 보는 것은 사필귀정으로 보이기도 한다. 늘 국제질서를 쥐락펴락하며 다른 나라들을 겁주던 미국이 영화에서나마
제3세계를 향해
사과를 하는 모습을 보는 건 영화 속 한파가 주는 것과는 또 다른 시원함을 느끼게도 한다.
번성의 댓가로 바쳐진 제물 ‘환경’…인류의 내일을 생각하라
그러나 그런 시원함을 오락거리로 즐기기에는 영화가 보여주는 세계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순진한데 비해 문제는 너무 현실적이고 위협적이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빙하기는 문을 닫아걸고 책더미를 태우는 동안 잦아들 정도의 추위 밖에 안되기 때문에 영화 속 아들은 아버지가 구하러 올 동안 믿음을 갖고 기다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배워왔던 빙하기는 한때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을 모조리 멸종시킬 만큼 강력한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영화 속 아버지가 아들을 구해 준 것처럼 인류의 후손을 구해 줄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영화 속 아버지와 아들이 화해한 것처럼 인류의 미래를 행복한 결말로 이끌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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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투모로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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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이 살던 시대의
식물들이 오랜 세월과 풍상을 거쳐 화석연료가 되었고, 인류는 그 연료를 파내어 번성해왔다. 그 번성의 댓가로는 환경이 제물로 바쳐졌다. 이제 파괴된 환경을 견디다 못해 지구가
복수를 시작한다면 인류도 공룡처럼 화석으로 묻히게 될 것이다. 영화 속 난민들이
도서관으로 도망가 추위를 견디기 위해 인류의 문명의 바탕인 책을 태워 몸을 녹이듯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누려온 많은 것을 희생해야 생존이나마 할 수 있는 상황을 맞닥뜨리고 있다. 이미 늦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내일을 위해 지구가 지르는 비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바로 내일이 멸망의 그날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