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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컬럼,글

노무현 평전-김삼웅, 지금껏 거대 조선일보에 정면으로 싸운 정치인은 김대중,노무현 뿐이다.

by skyrider 2011.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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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주필, 제7대 독립기념관장, 성균관대학 겸임교수, 민주화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위원회 위원, 제주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 위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조사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고,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현)를 맡고 있다. 독립운동가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인물의 평전을 집필해 왔다. 역사바로잡기와 민주화ㆍ통일운동에 관심이 많으며 이 분야 저서 30여권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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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7회] 조선일보에 승소, ‘노무현 죽이기’ 악연

    노무현 평전/[6장] 3당 야합 거부 야당대변인 그리고 낙선 2011/10/08 08:00 김삼웅
    한국의 정치인 중에서 거대 족벌신문의 횡포에 맞서 정면 대결한 정치인은 손가락에 꼽힌다.
    김대중이 평민당 총재 시절 <조선일보>와 정면 대결한 경우 정도일 뿐이다. 정치인들은 거대 신문이나 방송이 인격모독과 왜곡보도를 해도 꿀먹은 벙어리처럼 꾹꾹 참는다.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다. 저들에게 ‘찍히게 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럴수록 이들의 횡포는 심해지고 안하무인격이 된다.

    노무현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한 성격이다. 그것이 독재자이거나 족벌신문이거나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엄청난 손해를 보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노무현은 <조선일보>에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통합야당 민주당 대변인이 거대 신문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주위에서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버릇을 고쳐놔야 다른 사람이 더이상 억울하게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조선일보>는 출입기자를 통해 통합민주당을 비방하는 기획 시리즈를 내보내겠다고 당지도부를 협박했다.
    내심 두려웠지만 부당한 인권침해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투쟁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고 생각해서 소송을 냈다. <조선일보>는 같은 분량의 해명기사를 실어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해명기사가 아니라 오보에 대한 사과 기사를 써야 한다고 맞섰다.
    (주석 11)

    이것이 노무현의 ‘노무현다움’이다.
    비록 손해가 나더라도 불의와 맞서는 용기와 패기가 그의 장점이고 강단이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거대 언론과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기자들에게 비굴한 모습을 보일 때 노무현은 단호하게 맞섰다. 우리 정계에서 이런 정치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노무현의 민사소송에 법원은 기사 전체가 사실무근으로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2,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선고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거대신문을 상대로 승소했으나, <조선일보> 사장과 담당 기자의 사과를 받고 항소심 진행 중에 아무 조건없이 소송을 취하했다. 역시 노무현다운 행동이었다. 한 언론운동가는 뒷날 이 사건과 관련,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92년 12월 서울민사지법은 노 후보(노무현 대통령후보 - 필자)가 조선일보를 상대로 낸 소송에 대해 “조선일보사는 노 전 의원에게 2천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노 후보는 정치인으로서는 하기 힘든 결단(언론사에 소송제기)을 내렸고 소송에서 이겼다. 그러나 이 ‘재판’은 승소한 재판으로서만 기억되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조선일보와 노 후보가 치르고 있는 ‘전쟁’속의 ‘첫 전투’였으며 첫 싸움에서의 승리는 노 후보 내면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초선의원 시절 겪은 조선일보와의 갈등은 노 후보의 ‘언론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더 이상 노 후보는 ‘언론’을 단순한 ‘활용대상’ 혹은 ‘협조대상’으로 보는 협애한 시각 속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석 12)

    <조선일보>는 왜 노무현을 그토록 적대시했을까.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는 고졸 출신이라는 학벌에 대한 편견, 둘째는 판사, 변호사, 국회의원 등 노무현이 상류층에 편입되고서도 여전히 ‘노동자 의식’을 갖고 있는 반계급성, 셋째는 신문배달원들의 노동조합 결성에 법률적 자문 행위 등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 신문의 노무현에 대한 왜곡은 뿌리가 깊었다.

    지난 89년 현직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 후보의 울산 파업노동자들 방문 일정이 알려지자 ‘국회의원이 노동자들을 만나러 온다’는 이례적인 행위에 당황한 회사측은 “노무현 의원이 다음 선거에 울산에서 출마하려 한다”는 헛소문을 냈다. 이 헛소문에 대해 노무현 후보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

    “노동자 대표 20명만 국회에 보내주면 화끈하게 한 번 하겠는데….”
    “여기 울산에서 노동자 대표 한 번 뽑아주이소. 저는 딴 데 어디 가면 또 안 되겠습니까?”

    조선일보는 노 후보의 연설 내용 중 ‘노동자 대표 20명’을 능청스럽게 ‘나 같은 사람 20명’으로 바꿔치기 하고, ‘화끈하게 한 번 하겠는데’ 하는 농담성 발언을 ‘국회도 흔들 수 있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해 ‘작문’한 의혹을 받고 있다.
    (주석 13)

    언론학자 김동민은 정치인 노무현을 여느 정치인들과 구분하여 ‘안티조선’ 운동참여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이 운동(안티조선-필자)의 연장선상에 정치인 노무현이 있다.
    언론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이나 언론운동 활동가들도 선뜻 나서기를 꺼리고, 대부분의 시민운동단체들이 활용론의 늪에 빠져 조선일보와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일제시대에 해방독립의 희망을 포기하고 친일에 나섰던 자들처럼 진보의 띠를 두른 지식인들까지도 조선일보의 꽁무니를 쫓는 마당에 정치인이 조선일보에 정면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보통 상식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정치인은 아무리 영향력이 작은 언론사라도 무조건 상전으로 모신다.
    (주석 14)


    주석
    11> 앞의 책, 121~122쪽.
    12> 최민희, 앞의 책.
    13> 최민희, 앞의 책, 200쪽.
    14> 김동민, <노무현과 안티조선>, 22쪽, 시와사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