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 쿠데타 50년이 되는 시점에 박정희 통치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의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권력자들의 음모와 살생 게임, 야만적 고문과 공포정치, 한강의 기적의 실제 경제성적표, 그리고 대통령의 술과 여자... '박정희 시대의 이야기'를 일주일에 2회 정도 풀어나갈 예정이다. - 기자말
10·26 박정희 살해사건과 그 거사자인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엇갈린다. 김재규의 거사 동기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탓이다. 박정희 권력의 후예들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은총을 입은 제2의 권력자가 내부 불만 때문에 배신한 '모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갈수록 10·26 거사가 많은 국민의 희생을 사전에 막은 정당방위라고 보고 김재규를 '의인'으로 평가하는 견해가 늘어나는 추세다. 특히 10·26 군사재판에 참여한 변호인단은 모두 김재규에 대한 역사 재평가를 주장해 왔다. 이들은 김재규를 고대 로마시대 공화정을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의 은인이며 직속상관인 카이사르(시저)를 살해한 브루투스에 비유했다.
|
▲ [오디오] 김재규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제거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 부장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대통령 한 사람을 제거했다"고 밝혔다. 이 오디오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1980년 1월 24일 계엄사 고등군법회의 결심공판 최후진술을 담고 있다. |
ⓒ 오마이TV |
| |
박정희와 김재규, 카이사르와 브루투스
|
▲ 1979년 12월 20일 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제10회 선고 공판에서 김재규 피고인이 법정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
ⓒ 연합뉴스 |
| |
1979년 12월 18일 계엄사 보통군법회의 제9회 결심공판.
사실심리가 모두 끝나고 변호인단의 변론과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을 듣는 차례다. 변호인들은 김재규의 행동이 독재 체제에 대한 저항권 행사와 국민희생을 막기 위한 정당방위임을 들어 한결같이 사형만은 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동일 변호사 : "본건은 역사상 그 유례를 굳이 찾아본다면 시저와 브루투스의 예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대통령과 가까웠던 한 나라의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태윤기 변호사 : "옛날 로마에서 절대 권력을 가졌던 시저가 부하로부터 칼에 찔려 쓰러질 때, '너마저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브루투스는 '나는 로마를 더 사랑한다. 속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사죄할 뿐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사감(私憾)에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바로 로마의 공화정을 회생시키기 위해서 절대 권력자를 제거했다는 뜻일 겁니다."
'박정희 - 김재규 관계'를 로마시대의 '카이사르- 브루투스'로 비견하는 것은 꼭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그만큼 사건 자체가 드라마틱하기 때문이었다. 브루투스가 로마 공화제를 수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은인인 카이사르를 찌른 것처럼, 김재규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박정희를 쏘았다는 변론이었다.
여인과의 사랑에선 물불 안 가린 호색한 카이사르
기원전 44년 3월 15일 10시, 로마 시내의 폼페이우스 대회랑에서 600여 명의 귀족들이 참석하는 원로원 회의가 열리기로 공지됐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55년 전의 이야기다.
카이사르는 사흘 뒤 다시 먼 원정길에 나설 예정이었다. 로마의 3월 날씨는 그때도 변덕스럽고 거칠었던 모양이다. 3월 14일 밤부터 15일 새벽까지 폭풍우가 거리를 휩쓸었다. 평소 볼 수 없던 엄청난 규모의 새떼가 날아들기도 했다. 게다가 아내 칼푸르니아는 아침 일찍 이상한 악몽을 이야기하며 꺼림칙하다는 표정이었다.
당시 로마에는 카이사르의 애인인 클레오파트라가 와 있었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49년 폼페이우스를 쫓아 알렉산드리아에 원정 온 카이사르를 사랑으로 사로잡았다. 클레오파트라가 오늘날까지도 미녀의 대명사로 불리듯 그녀는 절세의 아름다움을 타고 난데다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로서 권력의지도 남달랐다. 마치 가시 있는 장미꽃이라고나 할까, 정복왕 카이사르에게는 좋은 연애 상대였던 셈이다.
기원전 45년 카이사르는 국내외 반대세력과 분란을 모두 평정한 뒤, 로마에 돌아와 절대 권력자로서 영화를 누리고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도 이때 카이사르와의 사이에 태어난 3살된 아들 카이사리온(훗날 이집트 왕이 된 프톨레마이오스 15세)과 함께 로마로 들어왔다. 이것 역시 로마 귀족들 사이에 카이사르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을 조성했다. 카이사르는 전쟁을 비롯한 일에는 냉정하고 합리적이었지만, 여인과의 사랑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호색한이었다.
모처럼 아침식사를 함께 한 아내가 불길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이 카이사르의 일정을 변경시키지는 못했다. 그런 전조들은 평생을 험한 전쟁터에서 보낸 그에게 별 부담감으로 작용하지 못한 셈이다. 카이사르에게는 언제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유명한 승전고가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카이사르의 관용, 결국 본인의 비운을 재촉하다
그날 관저에서 원로원 회의장까지 카이사르를 수행한 사람은 그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 장군인 데키무스 브루투스였다. 그는 20대부터 갈리아 등 수많은 전투에서 카이사르와 함께 한 충성스런 장수였다. 카이사르는 그를 트란살피나갈리아의 총독으로 중용하기도 했다.
원로원 회의장은 격론이 벌어지기 일쑤여서 무기를 휴대하는 것이 금지됐다. 그러니까 카이사르 파는 모두 맨 몸이었고 암살 모의자들만 옷 속에 단도를 숨겨 입장한 것이다. 암살파는 카이사르의 측근들 중 안토니우스의 완력이 걱정이었다. 비록 무기를 안 가졌다고 해도 안토니우스는 힘이 장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안토니우스를 회의에 참석하지 않도록 지략을 써 다른 곳으로 유인했다.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의원들이 왔다 갔다 하며 인사도 나누고 어수선할 때, 수십 명의 원로원 암살자들이 카이사르를 에워쌌다. 그들은 순식간에 단검을 꺼내 들어 카이사르를 찔러 댔다. 너무도 긴장되고 서두른 나머지 자기들끼리 찌르기도 했다. 카이사르는 그들 중 두 사람의 브루투스가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사람은 아침부터 수행해 온 데키무스 브루투스였으나, 다른 한 사람은 마르쿠스 브루투스였다.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미망인으로 카이사르의 정부였던 세르빌리아의 아들이었다. 카이사르는 애인의 부탁으로 마르쿠스를 관직에 임명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부르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항하는 적의 진영으로 들어간다. 카이사르는 적들을 모두 평정한 뒤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용서했으며, 계속해서 요직에 기용했다. 이것은 카이사르의 관용이었으나 자신의 비운을 재촉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제2의 상속자인 브루투스, 카이사르를 찌르다
카이사르는 마지막 순간에 탄식했다.
"오, 브루투스, 너 마저 …!"
카이사르는 모두 23곳이나 칼에 찔렸다. 그는 비참한 최후를 감추려는 듯 붉은 망토로 상체와 얼굴까지 휘감은 채 쓰러졌다.
훗날 역사가들 사이에 카이사르의 탄식이 어떤 브루투스를 두고 외친 말인지 논란이 많았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배신감을 토로한 것임은 분명하고, 그렇다면 두 부루투스 모두 이에 해당된다. 이 논란에 대해서는 카이사르의 유언장 공개가 해답이 될 것이다. 카이사르는 죽기 6개월 전 써 둔 유언장에 제1의 상속자로 옥타비아누스를, 그리고 제2의 상속자로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지정했다. 유언장이 공개된 장소에서 브루투스는 얼굴이 흙빛이 된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니까 카이사르가 충격적으로 느낀 배신감은 자신이 제2의 상속자로까지 지정해 놓은 테키무스 부루투스로 향했다는 이야기다.
카이사르의 원망에 대한 브루투스의 답변과 해명은 그 다음날 카이사르의 관저가 있던 시내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브루투스는 연설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카이사르를 사랑한다. 그러나 나는 로마를 더 사랑한다. 그래서 그를 죽였다. 카이사르를 그대로 두면 로마인은 모두 그의 노예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로마인의 자유를 빼앗으려 한 카이사르를 쓰러트렸다. 속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사죄할 뿐이다."
"민주화 지연시키다간 80년 4, 5월께 국가적 혼란 사태"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박 대통령 각하는 나에게 동향 출신으로, 은인이며 상관이다. 친형제 간도 그럴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관계다. 그러나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해 대통령 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를 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1980년 1월 24일 오전, 법정에서 하는 것으로는 마지막인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1980년 5월 광주시민항쟁을 예언했다. 이 예언은 불과 석 달 뒤 정확히 적중했다. 그는 "민주화를 지연시키다간 80년 4, 5월 경 국가적 혼란사태가 야기된다"고 경고했다. 그 최후진술의 육성녹음은 가히 역사적 증언이다.
김재규의 이 같은 예언은 이미 1979년 12월 18일 1심 최후진술에서도 등장한 바 있다. 그는 조속히 민주회복을 해야 하는 것이 국민의 요구며 이것을 하지 않으면 민심이 폭발할 수밖에 없는 한계점에 도달해 갈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다.
"빨리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안 하고 인위적으로 자꾸 끌다가는 내년 3, 4월이면 틀림없이 민주회복 운동이 크게 일어납니다. 그 때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아까 말씀드렸습니다만 지금 핵이 없습니다. 정부가 통제력이 없고 국민은 자제력이 없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큰일을 당하면 뭐가 될지 모릅니다."
한편 전두환의 정치장교 비밀조직 하나회가 주도한 신군부 집단은 민주화는커녕 민심에 불을 댕기는 짓만 골라서 했다. 김재규의 경고는 우선 김대중·김영삼·김종필, 3김의 정치활동 재개와 함께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학생운동권의 시위 등 '서울의 봄'으로 나타났다. 전두환 집단은 학생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하면서 민심을 더욱 자극했다. 특히 신군부가 1980년 5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강행하며 김대중과 언론인 등을 전격 체포한 것은 울고 싶은 국민의 뺨을 때려 준 격이었다.
특히 광주의 시민학생들이 "김대중을 석방하라"고 외치고 나서자 신군부는 눈에 쌍심지를 켰다. 그들은 사납기로 소문난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들을 투입했다. 1979년 10월 부산·마산에 보냈던 바로 그 부대들이었다. 10·26으로 저지된 발포명령과 가혹한 진압작전이 몇 달 뒤 광주에서 자행된 것이다.
김재규는 항소심 최후진술 후반부에서 이같은 사태를 우려하면서 조속하게 민주회복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으나 헛수고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달라"
|
▲ 궁정동 만찬장의 시해 현장을 재연하고 있는 김재규. |
ⓒ 1980 보도사진연감 |
| |
"다음에, 원컨대 이 사건 처리가 재판장님께서는 여러 면에서 유능하신 분이니까 잘 알아서 하시겠지만,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군인인 여러분들은 역시 보시는 눈이 또 사회이기 때문에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처리가 군 내부에 미치는 정도라면 별 것이 아니지만, 이 결과가 정치에 미칩니다. 앞으로 계엄이 해제되든지 장기화되면 반드시 4·19 같은, 4·19가 좋은 예입니다만, 경우가 생기면 매우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서 자칫 잘못해서 마지막에 가서 잘못해서 결과가 아주 나빠지면, '김재규가 나라 망쳐 놨다'는 소리 듣기 딱 알맞게 생겼습니다. 나는 죽어도 이 소리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상되는 기상도가 잘은 몰라도 얼멍얼멍한 것으로 압니다, 국내외적으로.
그러니 제 몸뚱이 처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리 졸속하게, 또 잘못 편견을 갖고 처리했다가 나중에 되돌릴 수 없는 결과가 온다면, 땅 속에 들어간 저도 불행한 것이고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불행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지배적으로 뚜렷한 재판이니만큼, 국민들이 앞으로 어떤 문제를 삼는 데 그 이슈가 되지 않도록 저스스로 제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달라, 그래서 아무런 요인을 만들지 말아라,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이 사건은 전적으로 저 한 사람이 이 혁명사건의 전부입니다. 누구에게도 의논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의하지 않고 사전모의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전체가 저요, 책임질 전부가 저입니다. 저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안된 이야기입니다만, 정승화 육참총장 정말 억울합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억울합니다. 이렇게 육군대장이 목이 달아나서야 육군대장을 누가 하겠습니까. 그러니 장성이란 신분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계획적으로, 의도적으로 사전에 불러다가 대기시켜 놓고, 처음부터 접촉을 계속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개인이 좋고 안 좋고가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의 불행입니다. 이런 역사나 판례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지극히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김계원 실장이 그 자리에 있든 없든, 혁명은 결행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김계원 실장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총을 쾅, 쾅 쏴서 문제를 다 만들어 놓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날더러 이야기하라고 하면 이번의 실패는 김계원 실장 때문에 있는 겁니다.
김계원 실장이 24시간만 입만 막아줬더라도 모릅니다, 상황이 어떻게 됐을지. 그런데 김계원 실장이 지금 사형 언도를 받고 있다는 것은 내가 볼 때는 지위의 고하라든가 그 때의 형편이라든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건 난센스다', '무섭다' 이렇게 보입니다. 원컨대 이 유신헌법은 대통령 한 분을 제거하니까 완전히 무너지듯이 이 10·26 혁명사건에 저 하나 처리하면 완결됩니다. 그러니 제발 여타의 생명에 대해서는 본인도 본인이려니와 거기에 딸려 있는 가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박흥주라고 내가 중위 때부터 전속 부관으로 데리고 있다가 포병 대대장을 끝마치고 대령이 되어서 날 좀 도와달라고 하고 데려다 놨다가 이 지경을 당했습니다. 내가 아는 바로는 그 가족과 면회하는 광경을 보고 옆에 있는 모든 사람이 눈물을 안 흘릴 수가 없을 정도여서 모두 다 울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이 비참한 불행을 더 이상 파급시켜 주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호적으로 한두 살 적게 되어 있지만 사실 쉰여섯입니다. 병든 몸이고 거의 다 살았습니다. 잘 해야 3~4년, 4~5년 더 사는 것뿐입니다. 적어도 이것이 문제가 안 됐으면 몰라도 문제가 된 한은 저는 죽어야지요. 여러분이 죽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저 스스로 목숨을 끊든지, 저도 군인으로서 중장까지 됐던 사람입니다. 제 목숨 하나 스스로 끊지 못할 정도의 사생관이 아직 확립되지 않을 정도의 졸장부는 아닙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고 깨끗이 마무리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정말 부탁드립니다. 불행을 최소로 해 주시고,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불쌍한 가족들 심정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10·26에 연루된 부하와 동료들을 걱정했다. 특히 자신의 수행 부관으로 현역 대령인 박흥주에 대해서는 거듭 가슴 아파했다. 박흥주는 육사 18기의 선두주자였다. 전형적인 야전 출신이었으나 김재규와의 인연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다가 비운을 겪었다. 박흥주는 산동네의 허름한 판잣집에 살고 있었다. 그는 당시 힘깨나 쓰는 하나회 장교들과 판이하게 청렴한 가정을 꾸려 온 것으로 알려져 많은 이들이 탄식을 금치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