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는 얼굴 없는 천사가 산다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서상옥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금요반
오른손이 행한 선행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구절이 떠오른다. 모든 인간은 다 본능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식욕과 성욕, 그리고 물질적인 욕망과 명예욕이 그것이다. 그 중에도 물질적인 욕망은 한계가 없다. 속담에 아흔아홉 섬 가진 자가 백 섬을 채우려고 욕심 부린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옛날 어느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생각난다. 자기 논에 있는 볏단을 밤새도록 나르고 있었다. 형은 아우의 논에 아우는 형님의 논에 열심히 옮기고 있다가 날이 밝자 서로 만나 형제간에 얼싸안고 우정을 나누던 장면을 보고 가슴 찡하게 울려오던 감동이 새삼스럽다.
해마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연말이 오면 크리스마스 캐롤과 구세군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불우이웃돕기 운동이 전개된다. 자원봉사자들의 활동도 눈부시다. 소외계층과 어두운 곳을 밝혀주는 따뜻한 손길이 시청자들의 가슴을 온화하게 해준다. 나눔 1% 이웃돕기 성금이 경향 각지에서 답지하고 있어 흐뭇하다. 정치적인 혼란과 경제적인 불황속에서도 안방까지 찾아오는 정다운 감동이다. 독거노인 집에 연탄을 배달하고 장판도 새로 깔아준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어디에 있느냐고 눈시울을 적시는 노인을 볼 때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인정이 메마르지 않았구나 싶어 안도감이 생긴다.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감동적인 드라마다.
나는 오늘 아침 신문에 대서특필로 소개된 ‘얼굴 없는 천사’ 기사를 읽었다. 전주시 노송동자치센터에 전해온 이웃돕기 성금이야기다.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불우한 이웃을 도와달라면서 돼지저금통과 함께 팔천만 원이 넘는 거액을 보내준 ‘얼굴 없는 천사’의 기사다. 10년 전부터 매년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을 어려운 이웃에게 써 달라며 소리 없이 선행을 베풀어 온 ‘얼굴 없는 천사’의 미담이 화제다. 지난 12월 28일에 8천26만5천920원을 은행이자까지 한 푼의 에누리도 없이 그대로 보내 주었다는 기사다. 돈이 든 상자에는 “대한민국 모든 어머님이 그러셨듯이 저희 어머님께서도 안 쓰시고 아끼시며 모으신 돈이랍니다. 어머님의 말씀대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였으면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또 “어머님! 존경합니다. 어머님께 사랑합니다.”라고 전하고 싶다는 글을 남겨 주위를 애틋하게 했다. 전주시는 노송동사무소 일대를 ‘얼굴 없는 천사의 거리'로 정하고 기념 표지석을 세우기로 했다고 한다.
선진국에서는 대 기업가들이 자손들을 위해서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남겨주기보다는 사회에 환원하고서 보람을 찾는다. 한 언론인이 펴낸「아름다운 부자 척 피니」라는 책에는 많은 부자들이 본받아야 할 척 피니의 아름다운 삶이 그려져 있다. 그는 한국전 때 공군으로 참전한 바 있다. 주류사업으로 억만 장자가 되어 자선사업과 기부로 미국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다. 25년간 4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돈을 남몰래 기부하면서도 ‘오른 손이 한 선행을 왼 손이 모르게’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왔기 때문에 그의 숭고한 행위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척 피니는 이런 말을 했다. “내게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부를 사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돈을 쓰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돈을 의미 있게 쓰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로이터 통신은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자선 사업가는 170억 달러 이상을 기부한 마이크로소프트 황제 빌게이츠 회장도 아니요, 전 재산의 85%를 기부한 전설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도 아니며 아일랜드계 자선사업가 척 피니에게 그 영광을 돌려주어야 한다고 보도했다. 척 피니는 40억 달러의 자산을 10년간에 걸쳐 모두 기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 ‘살아 있는 동안의 거부’라는 새로운 기부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재벌들은 어떠한가? 황금의 노예가 되어 치부에만 정력을 쏟을 뿐 아니라 어린 손자에게까지 재산을 남겨주고 있다. 어찌 그 뿐인가.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은 외화를 빼돌리기에 정신이 없는 것 같다. 한 때 우리나라에도 재벌들의 기부행위가 없었던 게 아니다. 현대기아차의 정몽구 회장이 1억 원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해서 화제에 오르기도 했고, 삼성그룹에서는 8천 억대의 재산을 내놓은 사례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부행위가 그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따른다. 재벌들의 기부는 반대급부를 바라거나 생색을 내는 일이 되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라는 개념을 가지고 자기가 일궈온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줄 아는 기업인이 되어야 한다.
평생을 홀로 지내온 74세의 조영덕 할머니가 식당을 하면서 어렵게 모은 돈 20억 원을 외국어대학에 선뜻 기부한 예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다. 조영덕 할머니는 항상 가난해서 공부하지 못하는 학생에게 장학금이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또한 4년여에 걸쳐 62억 원이 넘는 재산을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에게 기부한 얼굴 없는 천사 이남림 씨도 있다. 이 씨는 우리나라에도 기부문화가 전파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이 외에도 숨은 천사들이 많다. 김밥 할머니, 삯바느질 아주머니들이 어려운 형편 에서도 힘들게 모은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보도되어 살맛이 나는 세상이구나 하는 생각에 잠긴다.
IMF위기를 당했을 때다. 전국적으로 금 모으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재벌가들이나 큰소리치던 정치가들, 중앙에 있는 장차관들보다 오히려 어려운 계층인 서민이나 말단 공무원들이었다. 나 역시 얼마 되지 않는 금반지를 헌납한 적이 있다. 부끄러울 정도로 적은 정성이지만 구국운동에 참여한 셈이다. 온 국민의 밀알 같은 애국심이 마침내 경제위기를 극복해 내지 않았던가?
우리 민족은 위기에 강한 민족이다. 망국의 분노를 참지 못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어선 3‧1운동이나 광주학생사건, 자유당의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항쟁은 모두 애국선열들의 구국운동이었다. 이처럼 온 국민의 가슴속에 열화와 같이 불타고 있는 애국심이 한데 모아질 때 이 나라는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가 되리라 믿는다.
나는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자원봉사자들을 존경한다. 자신보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는 게 얼마나 고귀한 정신인가?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 소외된 곳에서 어둡게 살아가는 노인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장면을 볼 때마다 가슴이 뿌듯해진다. 장애인의 몸을 손수 씻겨주고 불편한 활동을 도와주는 장면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암으로 고생하거나 노인성 환자들이 죽음을 앞두고 편안한 임종을 맞도록 위안과 안락을 최대한 돌봐주는 호피스들은 마치 구원의 천사 같다. 또한 연예인들이 자선공연을 하거나 사랑의 리퀘스드를 통해 두메산골 오지를 찾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는 모습을 볼 때 안방까지 훈훈한 감동을 받는다. 이 모두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기쁨이 아닌가 싶어 그저 감사할 뿐이다.
정치적인 혼란과 사회적인 불안, 경제적인 위기 속에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순간, 어둠을 헤치고 밝은 태양이 힘차게 떠오르는 경인년이 반갑다, 새해에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2009.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