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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컬럼,글

"안철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다. 시장의 공정함을 요구하는 시장경제주의자다"

by skyrider 2011. 12. 23.

 

진중권 "'또 다른 이명박' 안철수가 대선 승리한다면…"

[중앙일보] 입력 2011.12.23 00:54 / 수정 2011.12.23 09:22

진보 논객 진중권이 말하는 ‘안철수 현상’
상식적 보수 안철수 메시지 … 급진 목소리로 비치는 역설

안철수


 
진중권

 

진보 성향의 시사평론가 진중권(48)씨가 올해 정국을 뒤흔든 ‘안철수 현상’에 대한 견해를 중앙일보에 보내왔다. 안철수(49)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젊은이의 멘토에서 유력 대선후보로 비약한 현상을 한국 사회의 역설로 풀이했다. 기고문 분량을 다소 축약해 싣는다. 전문은 중앙일보 홈페이지(www.joongang.co.kr)에서 볼 수 있다.

[기사 전문 보기]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안철수는 전혀 정치적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서울시장 출마선언과 더불어 한국 정치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가 출마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시장이 돼 있을 게다. 하지만 압도적 지지율에도 그는 박원순 후보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흥미로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역설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유력한 후보의 자리를 턱없이 낮은 지지율을 가진 후보에게 양보했고, 그 행동을 통해 박근혜 대세론을 무너뜨리며 일거에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올랐다.

 ◆꼰대와 멘토=안철수 현상에서 읽어야 할 것은 정치 패러다임의 변화다. 한국은 이미 정보화 사회로 변모했다. 하지만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낡은 산업사회의 삽질 경제 리더십에 가깝다. 이를 시대착오라고 느끼는 대중은 정보화 사회에 적합한 새로운 영웅을 원한다.

 ‘롤 모델’이라는 말이 있다. 이념의 시대 젊은이에게 인생의 롤 모델이 사회주의적 ‘전사’였다면, 탈이념 시대 젊은이들의 롤 모델은 자본주의적 영웅이다. 안철수는 정보기술(IT) 분야에서 성공한 최고경영자(CEO)고, 그와 단짝을 이루는 시골의사 박경철은 주식투자의 전문가다. 한마디로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삶의 목표는 곧 안철수 혹은 박경철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취업난 시대에 가장 불안과 절망을 느끼는 것은 젊은 세대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베스트셀러의 제목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고민에 빠진 젊은이에게 낡은 산업사회의 ‘꼰대’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아이들은 에어컨 바람 쐬며 일하려고만 한다.” 이와 달리 안철수는 젊은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며 기꺼이 그들의 ‘멘토’가 돼 준다.

 ◆복지에서 시장개혁으로=‘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메시지는 나쁘게 보면 허무한 위로의 제스처에 불과하다. 안철수는 다르다. 그는 지금 젊은이들이 겪는 고통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짚어주며, 추상적으로나마 문제의 해결방향을 지시한다.

 현 정권은 대기업 위주의 정책을 펼쳤다. 덕분에 대기업들은 잘나가고 있으나, 현 정권이 약속했던 떡고물(이른바 낙수효과)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 찾아왔다. 그럼 이제 방향 전환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양극화 극복을 위해 저마다 ‘복지’를 떠든다. 하지만 그보다 시급한 것은 시장개혁, 즉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공정한 게임의 규칙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철수가 던지는 메시지다.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의 문제다. 안철수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시장주의자, 이 사회에서 보기 드문 상식적 보수주의자다.

 ◆대안정당이냐 정당대안이냐=역설은 그의 보수적 메시지가 이 사회에선 졸지에 급진적 목소리가 된다는 것. 시장개혁을 하려면 대기업에 칼을 대야 하는데, 그 일을 누가 맡겠는가? 대기업이라는 고양이 앞에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은 그저 겁먹은 쥐에 불과하다. 두 정당이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주제가 못 된다는, 근원적 절망이다.

 진보정당은 그 절망에서 만들어졌으나, 그들은 존재 의의를 증명하는 데 실패했다. 한때는 그들도 참신하여 10석의 의석과 14%의 지지율을 자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혁명시대의 이념을 정체성으로 가진 진보정당은 정보화 사회 속에서 유의미한 정보를 산출하지 못했다. 대중과 소통(채널) 문제 이전에 그들에게 던질 메시지(콘텐트) 자체의 한계다.

 한때 안철수를 중심으로 한 대안정당(‘제3정당’) 얘기가 떠돌았으나, 안철수 자신이 부정함으로써 논의는 짧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안철수는 ‘대안의 정당’이 아니라 ‘정당의 대안’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현실정치의 맥락에서 안철수는 아직 신기루에 불과하다. 정치를 하려면, 그 역시 어떤 식으로든 정당과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역설=제대로 된 보수가 없고, 진보마저 ‘대안’이 못 되는 상황에서 ‘정당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바로 안철수라는 이름의 상식적 보수다. 그는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환원했다. 이 역시 대중이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보고 싶어 했으나, 그들에게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보수의 미덕(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은 안철수를 ‘또 다른 이명박’이라 즐겨 부른다. 그들의 말대로 안철수 열풍은 디지털 버전으로 진화한 이명박 신화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맥락에서 안철수의 ‘상식’은 그 어떤 진보적 구호보다 급진적이다.

 안철수가 진보적이지 않다는 진보주의자들의 지적은 옳다. ‘분배’의 정의로움이 아니라 ‘시장’의 공정함을 요구하며 재산을 ‘기부’하는 것. 이는 철저히 보수주의의 스탠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그것은 보수의 승리가 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그처럼 커다란 진보가 또 있을까? 안철수 현상의 마지막 역설이다. [기사 전문 보기]

진중권 (시사평론가)

 
◆진중권=1963년 서울 출생. 90년대 중반 이후 온라인에서 한국의 보수세력을 비판해 온 ‘진보 논객’이다. 최근엔 한국 사회의 지나친 편가르기 현상을 잇따라 지적해 왔다. 정명훈 지휘자가 고액 연봉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는 꼼수다’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19일 트위터에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좌우 양쪽의 극단적 세력은 배제하고 좌우에서 서로 말 통할 만한 사람들끼리 특정 주제를 놓고 논쟁을 벌여 어떤 합의에 도달한 후, 그것을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으로 함께 제시하자”고 올렸다. 서울대 미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마치고 독일에서 유학했다.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겸직교수,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빙교수 등을 지냈다. 상업용 경비행기 운항 자격증에 도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