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야말로 그 어떤 정치인보다도 경제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있다.”

<가디언>의 미 경제 담당 부장인 하이디 무어가 최근 쓴 칼럼 제목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거듭 강조하고 있는 불평등의 문제야 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경제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교황과 같은 세계적인 인물이 이 문제를 거론하는 데 이처럼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는 지적이기도 했다.

불평등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문제의식은 지난 달 26일 발표한 장문의 권고문(복음의 기쁨)에 선명하게 표현돼 있다. 교황은 “과거 10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이제는 ‘배제와 불평의 경제체제를 유지하지 말라’고 말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금융자본의 전 세계적 약탈성과 투기성을 강조하면서 “고삐 풀린 자본주의야말로 ‘새로운 폭정’”이라고 규탄하기도 했다.

“세계화는 우리를 이웃으로 만들었지만 형제가 되게 한 것은 아니다”

   
▲ <뉴스위크> 12월 11일자 기사 '교황은 사회주의자인가?'. <뉴스위크>는 교황은 사회주의자와 거리가 멀고 오히려 교리 측면에서 보수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행이 큰 울림을 갖는 것은 그의 검소한 삶의 방식 못지 않게 그가 '시대의 질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풀이다.
 
특히 전 세계 경제가 ‘머니게임’에 미쳐 돌아가고 있는 금융자본의 약탈성과 그 세계화와 대한 그의 비판은 통렬하다. 교황은 “과거 황금에 대한 숭배는 이제 돈에 대한 숭배로 바뀌었다”며 “나이 든 노숙자가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것은 뉴스가 되지 않는데 주가가 2포인트 빠진 것은 어떻게 주요 뉴스가 될 수 있느냐”면서 ‘비인간화 된 배제의 사회’에 둔감해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쳤다.

“고액 연봉과 보너스는 탐욕과 불균형에 바탕을 둔 경제의 상징물”, “보이지 않지만, 경제와 금융 영역에서도 생명과 가족을 파괴하는 전쟁이 이뤄지고 있다”, “세계화는 우리를 이웃으로 만들었지만 형제가 되게 한 것은 아니다. 불평등과 가난이 형제애와 연대의식을 없앴다”, “국가는 가난한 자와 부자의 격차를 좁히는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어려운 금융위기, 경제위기 때에도 자신의 소비와 소득에서 만족을 찾으려 하지만, 지속되는 경제적 위기는 경제 발전의 모델을, 또 우리 삶의 방식의 변화를 제 때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고 있다” …


교황이 내년 1월1일 ‘평화의 날’을 맞아 미리 발표한 담화문 내용이다. 역시 ‘불평등’과 ‘가난’을 마구 만들어내고 있는 기존의 자본 시스템을 정조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교황은 기존 시스템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가디언>의 하이디 무어와 같은 저널리스트에게 그는 “그 어떤 정치인보다도 경제문제를 잘 이해하고 있는 교황”이겠지만, 어떤 이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험한’ 인물이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12월11일자 기사는 이런 교황에 대한 미국 내 보수주의자들의 의구심을 적시에 짚어낸 것이다. 기사 제목은 이렇다. “교황은 사회주의자인가?”

교황의 언행에 대한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불안은 일찍부터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가 라틴아메리카 출신이라는 점에서부터 불안을 느끼지 시작했던 그들이다. 최근 교황의 언행은 이들의 불안이 기우가 아니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보수 우파로 분류되는 라디오 진행자 러시 림보 같은 이는 “교황은 정말 극적이며 황당하다. 도대체 그가 왜 그리 잘못됐는지 알 수 없다”면서 “교황이 말하고 있는 경제 문제는 전적으로 마르크스주의”라고 말했다.

미 보수 우파 “교황, 사회주의자 아냐?”


그러자 미국의 일부 강경 보수주의자들은 최근 교황을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있다. 미국의 극우 라디오 진행자인 러시 림보는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생각하면 딱하다’는 제목의 방송에서 “교황이 말하는 것은 순수한 마르크스주의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폭스뉴스의 경제 뉴스 진행자 스튜어트 바니는 “교황이 나의 정치적 판단에 영향을 미치려 하는 것 같다”며 “교회는 영혼을 구하러 가는 것이지 투표(정치)와는 상관이 없다”며 교황의 ‘정치적 언행’을 불쾌해 했다. 사실 이 정도의 반응은 ‘교황’이라는 권위 때문에 아주 절제된 것일 수 있다.

교황은 과연 사회주의자일까? 혹은 사회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는 것일까? <뉴스위크>의 판단은 분명하다. 교황은 결코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와는 더더구나 거리가 멀다. 그가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는 금융자본주의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평등과 박애의 가치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교리에 따른 것이라는 풀이다. 그는 교리의 측면에선 오히려 ‘보수적’이라는 것.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가톨릭 교계 안팎의 평가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뉴스위크>는 그럼에도 그가 역대 교황과 다른 점은 그가 지극히 소박하고 검소한 삷을 생활로 실천하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꼽았다. ‘교황은 사회주의자인가’라고 물은 <뉴스위크>의 기자는 기사의 맨 마지막 문장을 “만약 교황이 가톨릭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기적이 될 것”이라고 썼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언행이 가톨릭교도는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도 큰 울림이 되고 있지만, 과연 그가 교회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는 관측이기도 할 것이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올해의 인물’로 프란치스코 교황을 선정했다. 미디어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은 <타임>이 에드워드 스노든 대신 교황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데 대해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미국의 전 세계적인 감시 시스템의 실상을 여지없이 폭로한 스노든이 미친 파장과 영향력이 교황 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컸다는 것이다. <타임>이 나름 상업적 이유로 스노든 대신 교황을 선정한 것 아니냐는 의심까지 불거졌다.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이야말로 ‘올해의 인물’로 전혀 손색이 없다며 <타임>의 선정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교황이 가져올 수 있는 변화와 개혁이 보다 근본적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미국의 한 칼럼리스트는 이렇게 썼다.

“교황은 ‘불평등’을 수지가 맞는 이야기로 만든 분”

“타임은 아마도 한 부라도 더 판매해야겠다는 비즈니스 차원에서 교황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아주 잘한 결정이다. 왜냐하면 프란치스코 교황이야말로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를 수지가 맞는 이야기 거리로 만든 분이기 때문이다. 교황은 빈자들을 위한 휘슬블러어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볼멘소리들에 신경이 쓰였던 것일까?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4일 이탈리아 일간신문 <라 스탬파>에 실린 인터뷰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잘못이다. 그러나 나는 그동안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만나왔다.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크게 괘념치 않는다. …(이른바 낙수효과에 대해서) 그러자면 이런 전제가 있어야 한다. 잔이 가득차면 넘쳐야 한다는 전제 말이다. 그래야 가난한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잔이 넘칠라 치면 마치 마술처럼 잔이 더 커져버린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에겐 떨어지는 것이 전혀 없다…거듭 강조하건대 나는 (경제) 전문가로서 하는 말이 아니다. 교회의 사회 강령에 따라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를 두고 혹자는 무신론자들도 왜 교황을 위해 기도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교황의 말처럼 그는 결코 경제 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경제 문제가 결국 무엇이던가. 사람이 더불어 사는 세상에 관한 핵심이 바로 경제문제라고 한다면 교황보다 전문가도 없을 터이다. 교황은 사람과 영혼의 파수꾼이 아니던가. 그가 이데올로기와 국경을 떠나 지구촌 변화와 성찰의 아이콘이 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타임>의 ‘올해의 인물’ 선정이 나름 탁월해 보이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