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모방한 아베의 5가지 '착각'
일본의 수출규제가 촉발한 한-일 마찰의 열기가 좀체 식을 줄 모른다. 가장 외교적이어야 할 일본 외상이 공개된 자리에서 한국 정부가 무례하다고 비난하는 ‘무례함’을 보일 정도다. 이번 사태가 언제,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단언하기 힘들다. 하지만 양국의 퇴로 없는 공방이 상당 기간 불가피해 보인다. 일본이 빈손으로 물러나려 하지 않겠지만, 일본의 애초 기대대로 사태가 진행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수출규제 카드를 꺼낸 일본은 이 조처가 ‘회심의 일격’이 될 것으로 기대한 듯하다. 경기둔화로 고민에 빠진 수출 중심 한국에 직격탄을 날렸기 때문이다. 수출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반도체산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재 공급을 죔으로써 어렵지 않게 한국 정부의 양보를 받아낼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일본 정부의 선제 공격은 신속하고 예리했으나, 정교하지는 못했다. 전격 수출규제의 명분과 이유를 설명하는 첫 단계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일본 주장은 상호 모순을 불렀고, 한국 반박으로 설득력이 떨어졌다. 공격 명분이 약해지면서 지휘부인 총리 관저와 행동부대인 경제산업성 사이에서도 엇박자가 노출됐다.
일본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한국에선 불매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등 ‘반일 대오’가 공고해졌고, 국제 여론은 일본에 비판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전개 양상은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한 일본 수뇌부의 판단에 오류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베가 어떤 ‘착각’에서 2019년 7월 ‘경제공습’을 단행했는지 짚어보는 것은 이번 사태의 전망을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된다.
1.아베는 트럼프가 아니다
일본 수출규제는 다목적 카드다. 참의원 선거용 성격도 있지만 못마땅한 문재인 정부에 본때를 보이겠다는 의도가 가장 크다. 한국 정부를 흔들어 이후 코드가 맞는 보수세력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데 기여한다면 금상첨화다. 일본 정부의 거센 반발에도 박근혜 정부 때 양국이 맺은 ‘일본군 위안부 합의’는 휴지 조각이 됐다. 한국 대법원에서 승소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미쓰비시의 국내 자산 매각에 나설 태세다. 정상회의에서 노골적으로 박대할 만큼 심사가 틀린 아베로선 문재인 정부를 손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일본 정부는 이런 상황을 ‘양국의 신뢰관계 훼손’이라고 표현했다.
문제는 신뢰 훼손이라는 정치외교 현안에 무역보복이라는 ‘경제적 무기’를 쓴 점이다. 강제징용 문제 등으로 신뢰가 훼손됐다고 밝혀놓고 수출규제가 보복은 아니라고 하려니 스텝이 꼬이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언론도 일본 정부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다.
수출규제와 한국의 백색국가(수출 절차를 간소화해주는 안보상 신뢰 국가) 명단 제외가 ‘혜택을 없앤 것이니 원상회복일 뿐’이라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칼로 찔렀지만 상해를 입힌 것은 아니라는 식이다. 이후 내세운 대북 수출 관리의 허술함도 일본 쪽이 더 심한 것으로 나타나 빈축을 살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화웨이 봉쇄’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무역보복을 공공연히 떠든다. 전방위 무역전쟁을 벌이고 일관되게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켜왔다. 하지만 아베는 그렇지 않다. 그는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서도 자유무역을 강조했다. 트럼프 흉내를 내 힘을 과시하면서도 군색한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아베와 트럼프의 결정적 차이다.
2. 일본은 미국이 아니다
트럼프가 국제질서를 흐리는 망나니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 패권국이기 때문이다. 기축통화인 달러와 첨단무기를 양손에 든 미국이 제멋대로 해도 국제사회가 제어하기는 힘들다. 미국이 2위 강대국인 중국을 대놓고 압박해도 주요국은 미국 쪽에 줄을 선다. 미국 일방주의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를 가장 공격적으로 활용하는 대통령이 트럼프다.
일본은 미국과 ‘체급’이 다르다. 경제대국이긴 하지만 초강대국은 아니다. 한때 중국과 동북아 지역 패권을 놓고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으나 오래전 얘기다. 세계무역 규범을 어기고도 끄떡없는 나라는 미국과 중국 정도다. 일본이 무역보복을 카드로 쓰기 힘든 이유다.
더욱이 일본은 한국 못지않게 국가경제에서 수출 비중이 큰 나라다. 미국 같은 만년 무역 적자국이 아니다. 미국은 최대 수입국이기 때문에 보복관세라는 ‘실탄’을 언제든 쏟아부을 수 있다. 미국이 중국과 무역전쟁에서도 느긋한 이유다. 반면 일본은 국제사회가 예외로 인정할 만큼 강한 나라가 아니며, 무역전쟁을 치를 정도로 무기가 충분한 것도 아니다.
3. 삼성은 화웨이가 아니다
미국과 일본 수출규제의 공통점은 핵심 기술이나 소재·부품의 공급을 차단해 상대국 주요 기업을 강타하는 것이다. 자국 기업에도 상당한 손실이 불가피한 ‘자해’ 방식이다. 최첨단 5세대(5G) 통신 선두 주자로 떠오른 화웨이에 미국이 느끼는 위기감과 불쾌감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시장을 장악한 삼성에 느끼는 일본의 감정과 그리 다르지 않다. 기술패권을 위협하는 경쟁국을 밟아버리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게 작용한다.
일본은 2000년대 초반부터 디지털 양산 기술에 앞선 삼성에 가전,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에서 차례로 세계 1위 자리를 내주며 울분을 삼켜왔다. 1980년대 일본이 80% 점유율을 자랑하던 반도체 시장의 70% 이상을 현재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삼성은 화웨이에 비해 한결 여유 있는 상황이다. 화웨이 봉쇄에는 다른 나라 주요 기업도 동참했다. 자력 개발이 아니고서는 봉쇄망을 뚫기가 매우 힘들다. 이 때문에 화웨이는 엄청난 부담을 안고 칩부터 운영체제까지 대체 기술을 독자 개발해왔다. 삼성은 사정이 다르다. 가장 영향이 큰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만 해도 시간이 걸릴 뿐,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 대체재를 조달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또 5G 통신은 이제 시작 단계다. 화웨이가 발목이 잡힘에 따라 5G 통신 확산이 늦어질 뿐 당장 다른 나라 기업과 소비자가 피해를 입을 우려는 크지 않다. 화웨이가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삼성과 비교되지 않는다. 삼성의 생산 차질은 곧바로 세계시장의 불안 요소로 작용한다. 반도체 등의 가격이 치솟고 세계 IT 공급사슬이 연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삼성을 때리면 이들도 같이 피해를 본다. 삼성은 화웨이와 같은 외톨이가 아니다.
4. 계산이 잘못됐다
일본 안팎에서 이번 수출규제가 자기 무덤을 파는 행위라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호에서 일본의 수출규제는 “경제적으로 근시안적”이며 무모한 자해 행위라고 비난한 것이 대표적이다. 얼마 전 [뉴욕타임스]도 비슷한 취지의 기사를 실었다. 국제 여론을 반영하는 유력 언론이 특히 문제 삼은 것은 ‘트럼프 모델’의 확산 우려다. 세계 경제와 무역을 정치 도구로 쓰는 “비열한 질서”를 말한다.
아베는 국제 여론전에서 이미 패배한 상태다. 일본 수출규제가 공정한 세계무역 질서를 해치는 경제보복이라는 점이 사실상 공인됐다. 일본 정부가 그런 부담을 안고 한-일 무역전쟁을 길게 끌고 나가기는 쉽지 않다.
다음은 실리적 계산이다. 삼성의 피해는 일시적 생산 차질에 지나지 않는다. 삼성의 공급 지연으로 ‘도미노 피해’를 입는 애플, 아마존, 구글 등 세계 IT 기업들의 비난은 일본 정부를 향하게 된다. 또 한국은 자연스럽게 자체 개발이나 일본 외의 나라를 통해 소재와 부품 조달 창구를 확보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본 기업에 돌아간다.
일본 반도체 전문가 유노가미 다카시 미세가공연구소 소장은 전문 사이트 칼럼에서 “이번 수출규제로 많은 일본 기업이 손해를 입고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며 “요컨대 일본 정부는 무덤을 판 꼴이며, 한번 무너진 신뢰 관계는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삼성 등 한국 기업이 ‘불안한 거래처’인 일본에 완전히 의존하는 일은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5. 한국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일본은 한국에 가장 타격이 큰 1~3위 화학제품을 볼모로 잡았다. 불순물 세정제와 감광제 등 민감한 공정에 사용되는 이들 제품의 일본산 비중은 41.9~84.5%에 이른다. 단기적으로 치명적 영향이 예상된다. 한국의 백색국가 명단 제외는 일본 정부가 수출 통제 고삐를 계속 쥐고 있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이 정도면 마땅한 대응 수단이 없는데다 최저임금 논란, 경기둔화 등으로 궁지에 몰린 문재인 정부가 금방 손을 들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오판’했을 법하다. 한국의 불매운동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던 유니클로 임원의 주장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전략은 화려하게 폈다가 지는 일본의 ‘벚꽃 문화’나 과거 경험과도 무관치 않다. 일본은 청·러와의 전쟁에서 단기 집중 공세로 손쉽게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중일전쟁처럼 장기화 단계로 들어서면 상황은 정반대로 바뀐다. 지금이 그런 모양새다. 한국에 일본의 수출규제는 경제침략과 동의어가 되고 있다. 한국 경제를 뒤흔들기 위한 도발로 비친다. 더욱이 사태 발단인 강제징용 문제는 일제침략의 산물이다. 거센 불매 열기는 그런 인식을 깔고 있다. 쉽게 달아올랐다 식기도 하지만 한 번 감정에 불이 붙으면 어느 국민보다도 강력한 에너지를 내뿜는 게 한국인이다. 정치외교와 역사의 문제를 경제적 압박으로 해결하려 한 아베의 ‘불장난’이 성공하기 어렵고 위험한 이유다.
박중언 기자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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