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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자료창고

왜? 이 나라는 친일파들이 득세한 나라이니까!

by skyrider 2008. 12. 10.

"어떤 때는 이 곳이 내 나라인가 싶다"
'근로정신대', 일본 최고재판 끝내 '기각'...관련 소식마저 외면
  이국언 (road819)
  
▲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어린 나이에 부모 품을 떠난 조선여자근로정신대원들이 일본 감독자의 인솔하에 행진을 하고 있다.
ⓒ '나고야 미쯔비시 근로정신대소송 지원회' 제공
강제동원

혹자는 웬 투정이냐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두고…. 그것도 벌써 20여일이 지난 문제인데 말입니다. 지난 11일 일본 최고재판소의 최종 '기각' 결정이 전혀 의외였던 것은 아닙니다. 안타까운 것은 어쩌면 오늘의 이 결과를 우리가 자초했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지난날 아픈 역사에 대한 망각과 그리고 무관심…. 못내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지난 11월 11일 도쿄 최고재판소에서는 우리의 무관심 속에 한일간의 과거사 청산과 관련한 또 하나의 중요한 재판 하나가 최종 패소하고 말았습니다.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이 그것입니다.

 

최고재판소는 이날 일제 강점기 시절 미쯔비시중공업에 강제동원 되어 피해를 입은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출신 피해 할머니 등 원고 7명이 일본국과 미쯔비시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최종 '기각' 결정을 내렸습니다.

 

"일본에 가면 여학교도 갈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4년 5월경, 김성주(80, 경기도 안양시) 할머니는 순천 남초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가사 일을 돕고 있던 초등학교 담임선생의 부름에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일본에 가면 여학교도 갈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

 

일본인 담임선생은 일본에 갈 것을 부추겼습니다. 그의 나이 14살. 어머니는 일찍 여읜 상태였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징용을 가고 없던 상태입니다. 배고프던 시절, '여학교에 갈 수 있다'는 말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나주 출신 24명을 포함해 목포, 나주, 광주, 순천, 여수 등 광주전남 5개 지역에서 일본 나고야로 동원된 사람만 140여 명. 불과 13~15살의 어린 소녀들이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 공업도시 중의 하나인 나고야. 그곳 미쯔비시 공장에서의 혹독한 환경과 고생은 더 언급하지 않으렵니다.

 

어린 소녀들은 군용 정찰기를 생산하는 이 공장에서 주린 배를 틀어잡고 하루 8시간~10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 중 6명은 지진으로 현지에서 목숨까지 잃어야 했습니다.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왔지만 이들에겐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집 딸은 일본 갔다 왔다더라."

 

졸지에 몸 버린 여자 취급을 당한 것입니다. 오가던 혼담도 번번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어렵게 가정을 꾸렸지만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몇 놈이나 상대했느냐?"

 

그때부터 남편의 부정(不貞)과 폭력이 이어졌습니다. 심지어 밖에서 데리고 온 여자와 한 방 생활을 하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너는 몸 팔고 왔는데, 내가 바람피웠다고 해서 뭔 죄냐?"


견디다 못하고 파혼을 당하는 등 대부분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환갑이 넘은 나이에 이혼해야 했습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투쟁... 끝내 패소

 

  
▲ 미쯔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1944년 5월 31일 13~15살 어린 소녀들이 나고야 미쯔비시 군수공장의 숙소에 도착하는 모습
ⓒ '나고야 미쯔비시 근로정신대소송 지원회' 제공
근로정신대

1999년 3월 1일 떨리는 심장을 안고 일본 땅을 밟았습니다. 뒤늦게 용기를 내 일본국과 미쯔비시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한 것입니다. 

 

내년 3월 1일이면 꼭 만 10년째. 고령의 할머니들은 그 당시 일부러 3·1절에 맞춰 이 날을 제소일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1심, 2심에 이어 최고재판소 판결까지 장장 10년에 걸친 세월이었습니다.

 

'기각'의 이유는 단순합니다. 일본 사법부는 1965년 일본과 맺은 '한일협정'을 빌미로 삼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 우리 정부는 일본 정부로부터 경제협력자금 명목으로 무상 3억, 유상 2억불을 받는 조건으로 일제 징용 피해자 등의 청구권 문제에 대해 눈을 감고 말았지요. 결국 다툼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들의 나이가 거의 80세입니다. 돌아보면 모진 세월이었습니다. 이웃에는 '서울 사는 딸네 집에 좀 다녀 올란다'고 둘러대고, 대신 자식들한테는 '계모임에서 강원도 며칠 단풍 구경 갔다 오기로 했다'는 거짓말을 해야 했습니다. 피해자이면서도 오히려 '군 위안부'라는 사회적 오인 때문에 주변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외로운 투쟁.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리고 현해탄을 넘기를 수십 차례….

 

불편한 몸을 이끌고 때론 휠체어에 의지해 나서는 고단한 투쟁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하나 어떻게 사는지 안부하나 물어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 인권, 평화도시를 자부하는 광주전남의 정치권, 자치단체, 시민단체 어느 누구 관심 한 번 가져 준 적도 없었습니다.

 

지난해 5월 31일. 저는 원고 할머니 몇 분과 함께 나고야 고등재판소의 항소심 선고재판을 방청한 바 있습니다. 재판정 앞마당은 일찍부터 수많은 방송사 언론사 기자들로 장사진을 이뤘습니다. 그리고 판결이 끝나자 그 결과를 앞다퉈 비중 있게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수많은 카메라 셔터 소리 중에, 그 취재경쟁 속에 대한민국 기자는 없었습니다.

 

과거사와 관련해 남아 있는 재판이 불과 몇 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많은 원고들이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입니다. 일본 주요 신문들이 사회면 주요기사로 다루고 있는 이 재판의 소식을, 놀랍게도 저는 일본 외신을 인용해 단신 기사로 처리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남의 일인양 말입니다.

 

"어떤 때는 이 곳이 내 나라인가 싶다"


  
▲ 이 소녀들 기억해 주세요 1944년 12월 7일 나고야 일대를 강타한 도난카이 대지진 당시 희생된 광주출신 김순례의 생전 모습.
ⓒ 이국언
강제동원

이번도 예외가 아닙니다. 70세에 법정에 섰던 할머니는 어느새 80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시민의소리> 기사를 예외로 치면 아예 보도자체를 찾기 어렵습니다. 이런 재판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신문에 단 한 줄 보도조차 없는 현실…. 이러고서도 재판에 이기기를 바랄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이번 재판의 결과는 처음부터 정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때는 이 곳이 내 나라인가 싶고, 일본 사람들 보기도 민망할 때가 많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설움도 설움이지만 찬밥 취급하는 정부가 더 밉더라."

 

어느 할머니의 이슬 맺힌 독백입니다. 누구보다 따뜻하게 위로받아야 할 우리의 할머니들이, 인생의 황혼녘에 이르러서까지 오히려 숨죽여 살아야 했던 현실…. 현대사 특강이 논란인 모양인데, 마음이 착잡해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