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경영진 인사를 발표했다. ‘제2, 제3의 김용철’이 나타날까봐 미뤄오던 일을 이제야 실시한 셈이다. 나라 경제가 어려운 만큼 삼성이 이번 인사를 계기로 제대로 중심을 잡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나 전망이 그렇게 밝지는 않다. 삼성 총수와 가신들의 불법행위 재판이 솜방망이 처벌로 끝날 공산이 크고, 삼성의 집사 같은 인물이 경제부처의 신임 수장으로 돌아왔으며, 새 경영진도 삼성의 공식 브리핑과 달리 예전처럼 총수와 가신들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리되면 삼성이 내부적으로 황제 경영을 지속하고 대외적으로 정계·관계·법조계·언론계·학계를 함부로 주무르는 행태가 바로잡아지지 않을 것이다. 미네르바 구속이나 용산 참사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나타내듯 삼성의 구태의연한 모습은 시장경제의 정체를 의미한다. 한국 사회는 선진화가 아니라 후진화로 나아갈 판이다. 답답하기 그지없다. 그래도 뭔가 희망의 싹은 없을까.
삼성 총수의 집안 연회에선 가끔 연예인을 불렀다고 한다. 가수는 대개 두세 곡 뽑아 주면 3천만원을 받았다. 그런데 나훈아씨는 이런 초청을 거절했다. “나는 대중예술가다. 공연 티켓을 사서 입장한 관객 앞에서만 노래를 부른다”고 한 것이다. 필자는 그와 일면식도 없고 사생활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가로서의 이런 자존심은 얼마나 멋진가. 그가 궁정 예술가로서의 자리를 거부했을 때 이미 황제는 황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비슷한 예는 또 있다. 삼성 총수의 신변에 관해 예언을 한 지방의 역술가가 있다. 그의 존재가 삼성 쪽에도 알려져 서울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자 그는 “삼성 총수가 재계에선 1인자겠지만 이 바닥은 다르다. 나를 만나려면 삼성 총수가 직접 나한테 오라”고 했다 한다. 몸값을 올리려는 상술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삼성 총수 알현 한번 시켜 달라고 졸라댄 유명한 동양철학자와는 격이 다르지 않은가.
여러 해 전 김준연 검사는 삼성 총수의 사돈인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의 비자금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임 회장을 체포해서 조사하려 하니 윗선에서 계속 미적미적했다. 그러자 김 검사는 그냥 말로 하지 않고 체포에 대한 건의문을 정식으로 제출해 어쩔 수 없이 체포영장을 발부하게 했다. 또한 전수안 판사는 임 회장 부하들의 판결문에다 임 회장의 범죄 사실을 일부러 적시해 결국 임 회장이 징역 살게 만들었다.
이처럼 드물긴 하지만 삼성에 오염되지 않은 유력인사도 우리 사회엔 있다. 자신의 직업과 인격에 대한 자존심을 가진 분들이다. 아무리 황제라 하지만 노래 안 불러 준다고, 점 안 쳐 준다고 잡아넣을 순 없다. 삼성에 밉보인 판검사나 관료는 혹시 출세가 힘들진 모르지만 그렇다고 백이숙제처럼 굶어 죽진 않는다. 떡값(뇌물), 공짜 골프, 공짜 술 같은 쏠쏠한 재미쯤 포기하면 어떤가. 또 삼성 돈 안 받는다고 학회가 문 닫는 건 아니며, 삼성이 교수들에게 보내주는 해외여행 안 간다고 인생이 비참해지지도 않는다.
물론 삼성과 불가피하게 타협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납품업자나 광고에 의존하는 언론사가 그렇다. 하지만 나훈아씨처럼 사는 길도 있다. 원칙을 위해 생존을 걸고도 삼성 사태를 보도한 <한겨레>와 <경향신문> 같은 곳도 있는데, 생존을 걸지 않아도 될 땐 최소한 자존심을 지키자. 나름대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인사나 단체라면 거창한 일도 해야겠지만 이런 작다면 작은 일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모두가 황제처럼 받드니까 황제지 황제처럼 모시지 않으면 삼성 총수도 남들처럼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할 일개 시민일 뿐이다. 이리돼야 삼성도 나라도 거듭난다.
김기원 방송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