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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히라누마(平沼), 소속과 계급은 일본군 오장이었다. 1927년 평양에서 태어난 히라누마 오장은 가미카제 특공대로 출격을 기다리던 1945년 해방을 맞는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1947년 북한 인민군 중위로 변신한다. 공산 정권이 싫어 1948년 38선을 넘어 월남한 그는 대한민국 육군 항공대(공군의 전신)에 들어간다.
그리고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전투기를 몰고 북한과 맞서 싸웠다. 올해 83세의 예비역 공군 소장인 윤응렬. 노병의 삶은 한 편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일본군→북한군→대한민국 공군으로 살아온 윤응렬옹의 스토리를 중앙SUNDAY가 단독으로 발굴했다.
윤옹은 “하늘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고 말한다. 일본 규슈 비행학교는 한국인 학생을 잘 받아주지 않았지만 전투기 조종사가 필요했던 일본은 평양 출신의 16세 소년의 입학을 허용한다.
유응렬은 6개월간의 지상 교육과 40시간의 기본 훈련을 마친 뒤 1944년 인도네시아 자바의 일본 공군기지에 배속된다. 소년은 그곳에서 전투 비행훈련을 하면서 출격을 기다렸다.
비행기를 몰고 미국 군함으로 돌진하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일원이었다.
미국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하자 일본이 마지막 발악을 한 겁니다.”
윤응렬은 다시 자바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45년 8월, 윤응렬은 그곳에서 해방을 맞는다. “나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종전을 반겼어요. ‘아, 이제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종전 이후 10개월 동안 포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영국군 총사령관에게 진정을 한 끝에 1946년 4월에야 풀려날 수 있었지요.”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말에 그는 1947년 북한군 공군 장교(중위)에 임용된다. 일본군 비행사 경력을 인정받았은 덕분이었다.
어느새 요주의 인물로 찍혔던 거지요. 어느 날 민족보위부의 사상담당관이 날 부르더군요. 당시 심사과장이 소련군 소속 소좌(소령)였는데 나이가 아버지뻘은 돼 보여요. 나를 척 보더니 ‘동무 앉으라우’ 그래요.
그러더니 ‘지금부터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할 테니까니 모든 걸 사실대로 이야기 하라우’ 그러더군요. 가슴이 철렁했어요. 당시엔 인민 사상을 심사받은 뒤 인민재판에 회부되면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내곤 했거든요.”
그는 들키지 않기 위해 바닷속에 몸을 숨겼다.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그는 더 이상 바닷속에 몸을 숨길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나서 남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환한 불빛이 보였다. 자유의 불빛이었다. 당시 남한 당국은 월남민들을 위해 환한 전등을 켜놓고 있었다.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자 윤응렬은 크게 외쳤다.
윤응렬은 북한군 공군 체제에 대해서 숨김없이 말했다. 그랬더니 미군 정보당국은 당장 그를 기차 일등석에 태워 서울로 데려갔다. “서울 용산에 미군 7사단 본부가 있었어요. 당시 한국 HID(육군첩보부대) 총책임자로 미스터 위다카란 미국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나를 부르더니 이름부터 물어봐요.
공산 정권의 테러가 있을까 두려워하던 시절이라 다른 이름을 댔지요. ‘내 이름은 윤광빈입니다.’ 그랬더니 위다카란 양반이 갑자기 한자로 이름을 써보래요. 급한 대로 ‘尹光敏’이라고 썼더니 ‘너, 이름 가짜구나’ 하고는 호통을 치더군요.” 얻어 1948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다. 대한민국 공군이 없던 시절이었다. 6개월여 만인 1948년 11월 11일 그는 육사 7기로 졸업과 동시에 육군 항공대(공군의 전신)에 배속됐다. 일본군 히라누마 오장이 북한군 중위를 거쳐 이번엔 대한민국 소위로 변신한 것이었다.
국민 성금으로 마련했다 해서 ‘건국기’로 불리는 AT-6 고등연습기가 낙동강 전선을 날아다니기도 했다. 전쟁 통에 잠자리 비행기를 몰던 한국 조종사들의 희생이 속출하자 정부와 미군 당국은 조종사들을 제주에 불러모았다.
그러고는 몇 달 동안 전투 비행훈련을 시켰다. 윤응렬도 거기 있었다. 제주도에서 실전 위주의 훈련을 받은 그는 1951년 10월 11일 적진인 황해도 해주를 향해 처음으로 출격했다. 제3편대 2번기가 그가 탄 비행기였다. 그랬는지 편대를 이탈해서 공격 목표를 향해 나머지 두 발을 더 퍼부었지요. 목표물을 정확하게 명중시켰는데 귓전에서 ‘나이스 슈팅’ 하는 말소리가 들려요. 어찌됐든 목표를 완수한 뒤 급하게 편대를 따라붙어 경남 사천 비행장에 내렸지요. 내리자마자 기합을 받은 건 당연했지요.”
일주일여간의 달콤한 신혼 생활을 뒤로 하고 그는 강릉 비행장으로 복귀했다. 결혼한 조종사는 6개월간 일선에 배치하지 않는 게 관례였지만 그는 자진해서 전방에 나갔다. 이듬해인 1952년 1월 15일, 그는 대한민국 공군사에 길이 남을 만한 업적을 이뤄낸다.
평양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승호리 철교는 북한군이 만주에서 황해도 중부전선으로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던 요충지였다. 미군이 500여 차례에 걸쳐 폭파를 시도했지만 지형이 까다로워 번번이 실패하곤 했던 쉽지 않은 임무였다.
윤응렬은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에 편대장으로 참가했다. 평양 출신이라 이 지역 지형을 잘 안다는 점도 이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강릉기지 사령관이었던 김신 장군이 ‘한국 공군의 명예를 빛내라’며 미군이 좋아하던 캐나디안 위스키 한 병을 부상으로 내걸었습니다.
위스키 한 병에 목숨을 걸었던 셈인데 막중한 책임을 느끼며 F-51 전투기를 몰고 출격했어요. F-51은 8500피트로 날아가다가 최소한 3000피트 부근에서 폭탄을 던진 뒤 급상승해야 하는 게 상식입니다. 그런데 거리가 멀면 정확도가 떨어지잖아요. 나는 6500피트로 날아가다 1500피트 부근에서 폭탄을 투하한 뒤 하늘로 올라갔지요.”
폭파 작전을 완수하자마자 미 공군 비행기가 확인차 현장에 출격했다. 미 공군은 끊긴 다리 사진을 대한민국 공군에 보내왔고, 윤응렬 일행은 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대가로 공군참모총장 표창을 받았다.
미 해군이 바다에서 함포로 먼저 공격하면 육군이 대포로 지원 사격을 한 뒤 공군이 출격하는 순서였다. 윤응렬은 이때도 F-51을 몰고 편대군장의 중책을 맡아 출격했다. 미셸 위의 할아버지 위상규옹도 그와 함께 출격했다.
당시 윤응렬은 소령, 미셸 위의 할아버지는 대위였다. 고 위상규옹은 우리나라 최초의 항공공학 박사로 2008년 82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돌아가시기 전 내게 전화를 걸어와 ‘미셸 위가 바로 내 손녀’라고 자랑을 하곤 했는데 먼저 가다니 무척 안타까워요.”
이날은 윤응렬이 351고지 작전을 수행한 지 정확히 57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윤응렬 옹은 1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미셸 위에게 위상규 옹과 함께 찍은 사진과 당시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그림을 전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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