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서해성의 직설] “명동성당은 순복음교회가 되길 원하는가” | |
정부 눈치를 보는 정진석 추기경에게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인국 신부가 다시 한번 고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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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서해성의 직설] 제31화 ‘거리 사제’의 크리스마스 선물
묵상부터 해야 할 분위기다.
오늘의 직설은 거룩하다. 신부님은 스마트폰의 ‘성경찾기 앱’을 검색하며 말씀을 인용했다. 강론을 하듯 느릿느릿 조용조용 말했다. 그럼에도 그 누구보다 직설적이었다. “그대로 써도 되느냐”고 물어봐야 할 정도였다. 때로는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에 상대방이 웃다 쓰러졌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 총무인 김인국(47·청주 금천동성당) 신부를 모셨다. 사제단 대표인 전종훈 신부와 함께 ‘거리 미사’의 최전선에 섰던 인물이다. 삼성비자금 폭로(2007년)-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2008년)-용산참사 거리 미사(2009년)-사대강 공사 반대 기도회(2010년)의 중심엔 늘 그가 있었다. 얼마 전엔 ‘추기경의 궤변’이라는 성명 발표를 주도하여 가톨릭 내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에게 좀더 속 깊은 이야기를 들었다. 교계의 높은 어르신들이 들으면 뼈마디가 쑤시겠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겐 ‘성탄 메시지’가 될 만한 선물이다.
2005년까지 사제단 신부들은 숯가마 찜질방에 몰려다녔다. 매주 월요일 친목모임이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폭로로 상징되는 현실참여의 전통을 가진 사제단이지만, 더이상 거리로 나갈 이슈는 말라가는 듯했다. 재시동을 건 것은 2006년 이른바 ‘대추리 투쟁’ 때부터다. 뒤이은 이명박 정부 출범 뒤부터는 ‘일거리’가 쏟아졌다.
이젠 숯가마 대신 여의도다. 사제단 신부들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반 국회의사당 맞은편 거리에 모여 시국미사를 연다. 민주주의의 회복, 남북 화해, 4대강 사업 중단 촉구를 위해서다. 이 정권이 끝날 때까지 간다고 한다. 직설 대담이 끝난 뒤, 김인국 신부도 짐을 챙겨 여의도로 떠났다.
진행·정리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서해성(이하 서) ‘빨갱이 신부’라고 막되게 퍼붓고 그러던데요. 김인국(이하 김) ‘머리 좀 잘라’라는 말도.(웃음) 원래 곱슬입니다. 한홍구(이하 한) 저보고는 수염 자르라 하는데요.(웃음) 서 광주에서 신학부를, 대학원은 대구에서 마쳤는데. 정의구현사제단에 대구교구 신부도 있는지요. 김 최근에 한 분이 나타났어요.(웃음) 권혁시 신부. 엠비정부가 탄생시킨 유일한 대구 출신. 대구는 주교들이 신부들에게 사제단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는 분위기였죠. 한 천주교란 데가 위계질서가 엄격한데, 추기경을 정면 반박하는 일은 전례가 없었죠? 김 사람들이 ‘추기경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식으로 말을 하더군요. 한 ‘정부를 편드시는 남모르는 고충이라도 있는 것인지 여쭙고 싶다’는 대목에선 비아냥도 묻어나더군요.
주교단조차 용납하지 못한 ‘말씀의 위기’
김 교회에서 윗분들을 ‘장상’이라고 하는데 신부들은 장상에 대한 순명이 뼛속까지 스며든 고분고분한 사람들이에요. 그런데도 이런 일이 나온 것에 대한 위중함, 막중함을 봐야죠. 서 이 말에 앞서 지난 3월 천주교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주교회의가 ‘4대강 사업은 난개발’이라는 성명을 냈다는 걸 전제해야겠지요. 김 주교회의 합의를 추기경이 꼭 실천할 의무는 없어요. 다만 주교회의 결정에 대한 합의정신은 있어요. 주교회의 의견에 다른 견해가 있다 해도 사사로이 말하지 않는 거죠. 그걸 깼다는 겁니다. 사제단 견해가 그저 추기경과 다르기 때문에 이의를 단 게 아니라는 거죠. 교회 안의 중요한 절차에 따라 주교회의 결정이 있었고 곧 신자대중에 공포됐는데 그걸 추기경이 뒤엎었다는 충격이 있었던 거죠. 이를 바로잡고자 사제단이 성명을 냈습니다. (목소리를 높이며) ‘반기를 든 게’ 아닙니다. 주교님들 결정을 보호하고 지지한 거죠. 한 주교단이란 원래 대단히 보수적인 집단인데, 군사정권 시절에도 주교단이 합의로 입장을 발표한 사례가 없었는데 4대강 문제에 관해 뜻을 밝히고 나와 내심 놀랐어요. 김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할 때도 주교들은 침묵했어요. 여간해선 침묵하는 분들이 보기에도 이 정부의 거짓말이 너무 심했던 거죠. 또, 주교단의 세대교체가 어느 정도 이뤄진 점도 입장 표명을 가능케 한 기반이 되었고. 서 성명서를 굳이 영문으로 번역한 까닭은. 김 사제단에 관해 굴절된 정보가 교황청으로 올라가곤 해요. ‘사제단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고 해서 성명서를 영역해 보냅니다. 한 ‘봉은사 땅밟기’니 난리를 치는 사람들도 예수를 따른다고 하잖습니까? 사제단이 보는 성경하고 그들이 보는 성경이 다른 것 같아요. 김 성경은 제대로 읽으면 위험한 책이죠. 문제는 자기가 만나고 싶은 예수를 지어내서 만나는 데 있죠. 천주교의 경우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이 성경에 준하는 지위를 가지고 있어요. 그 문헌정신에 준해서 출간된 사회교리 가르침에 교회의 현실참여를 명시적으로 요구해요.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에도 현실참여를 해야 한다고 나오죠. 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일 텐데 바오로 6세가 ‘인간의 기본권을 유린하고 공동선을 극도로 해치는 폭군적 압제가 오래 지속될 경우에는 혁명적 봉기나 무력저항이 가능하다’고 했어요. 김 위험한 거죠.(웃음) 사제단이 우리 사회에서 행하는 저항은 무척 평화롭죠. 조약돌 하나 쥐어본 적 없는걸요. 서 엠비정부 뒤 일어난 삼성문제-촛불집회-용산참사-4대강 등 가장 중요한 사회적 쟁점의 중심에서 ‘광장기도’를 이끌어왔습니다. 이른바 예언자적 길로 고난에 찬 행보인데. 한 사제들이 길바닥에 나가는 일이 70~80년대보다 더 많아졌어요. 김 그때보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더 망가진 거죠. 교회가 신도들에게 헌금 받고 사회적으로 지불하는 역할은 말씀 봉사거든요.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 때도 사제단 역할은 말하는 거였죠. 엠비정부는 강을 죽이기 전에 말을 죽였죠. 강을 죽이면서 살린다고 하고 있잖아요. 이 지점이 주교단조차 용납할 수 없는 말씀의 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광장미사를 두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죠. 미사를 정치집회로 만드느냐고. 그게 아니라는 건 용산에서 판명이 났어요. 지붕도 없는 ‘남일당성당’에서 유가족과 철거민들을 1년 동안 위로하고 지켜줬어요. 예수도 성전에서 일한 적이 없어요. 서 성전에서 물건 파는 사람들을 후려쳤죠.
이문열·김원일·김성동, 그리고 정진석
김 5월에 명동성당에서 ‘4대강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전국사제 단식노숙 시국기도회’를 했어요. 성당 측이 천막을 치지 말라고 하니 노숙이 되었죠. 개막미사를 하는데 성당 밑에서 어버이연합 할아버지들은 ‘성당으로 들어가라’(웃음), 뒤에서 명동성당 사목회 임원들은 ‘각 성당으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명동성당 들머리가 교회도 거리도 아닌 경계죠. 우리 시대 사제들의 자리가 경계일 수밖에 없구나 했죠. 한 명동성당은 누구 겁니까? 김 정 추기경님 것이죠. 재단법인 천주교회유지재단 이사장이니. 한 70~80년대를 산 사람들에게 너무나 소중했던 명동성당이란 네 글자의 의미와 권위가 등기부등본 속에 들어가버린 셈인가요? 서 역사의 대장에 등기된 건 지울 수도 바꿀 수도 없는 법이죠. 김 정 추기경님은 나를 신학교 들어가라 허락했고 신부로 만들어주셨어요. 이분이 청주교구장으로 계시다가 서울교구장으로 가실 때 송별회 사회를 보며 질문 열개를 준비했는데, 마지막 질문이 ‘앞으로 명동성당 주인이 되시는 건데, 명동성당에 대한 세간 평가는 박해받는 자들을 품어주는 민주화 성지다, 주교님이 살아온 삶을 보면 그런 기대를 충족시킬지 모르겠다’는 거였어요. 한 갑자기 반기를 든 게 아니었군요.(웃음) 김 그때 말씀이 ‘시대가 바뀌었고 김 추기경님이 했던 일과 내 할 일은 다르다’였죠. 서 명동성당에 학생들과 가끔 답사를 갑니다. 성당이 3·1운동 지지를 안 해서 신도 수가 줄어들었죠? 태평양전쟁 나고 공출당할 때 성당이 자랑으로 여기는 게 고작 종 지켜낸 일이거든요. 사제단이 결성되고 6월항쟁 거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명동성당이 과연 먼저 손을 내뻗는 사랑을 베풀어주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게다가 그 역사는 사실 짧아요. 김 시민들이 명예롭게 섬기는 사연들을 서울대교구는 부끄럽게 여기는 거 같아요. 성당에 찾아오는 농성천막들을 번거롭다고 허무는 건 무서운 일이죠. 큰 영적 자산을 망가뜨리는 거죠. 교회 영성에 따르면 가난한 자는 예수의 친구요 교회의 귀부인입니다. 성당이 천막을 뜯으니까 더는 아무도 안 가게 되는 거죠. 한 가톨릭 교회가 왜 그렇게 보수화되었나요? 김 교회가 부자 된 다음부터 그랬을 거예요. 서 천주교는 정의와 평화에 이바지하는 활동을 통해 신도 수가 빠르게 늘었는데. 김 여론조사나 종교사회학자들은 한국 천주교 성장 이유로 사제단과 김수환 추기경님이 상징하는 성직자들의 열렬한 사회참여를 첫손에 꼽습니다. 요즘 교회는 그걸 진정 원하지 않는 것 같아요. 명동성당이 순복음교회 정도 되기를 원하는지.(한홍구 서해성 웃다 쓰러짐)
서 정 추기경이 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를 두번씩이나 소환했죠? 강제 ‘안식’년을 보내고, 또 거듭해서 석삼년 안식년을 주고. 김 정 추기경님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은 거예요. 전 신부가 사제단 일만 할 수 있도록 놔준 셈이거든요. 그게 아니었다면 용산 미사에 그렇게 투신할 수 없었을 테고 4대강도 마찬가지죠. 징계성 안식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추기경님이 그런 사제단 활동을 배후에서 용인하고 조종한 게 아닌가.(웃음) 당신은 반공주의자로 처신하려고 해도 성령께서 그걸 선용하시는 거죠. 한 정 추기경 아버지께서 일제 때 공산주의운동 하다가 북으로 가서 고위직을 지내셨죠? 그런 아버지를 둔 자식들 반응이 극과 극으로 나뉘는 편인데…. 서 월(납)북자를 둔 아들의 세가지 반응이 있어요. (이념적) 아비 부정과 살해를 통해 자기 존재를 입증시키는 오이디푸스형, 일상을 통해 아비 부재를 확인시켜 현실에 없는 아비를 현실로 불러내는 망각호출형, 아비의 삶과 가치를 적극 옹호하는 아비 되찾기형. 대개 이는 산문(작가)을 통해 잘 드러나는 편인데 이문열/이문구·김원일/김성동 등의 조응양태에서 엿볼 수 있죠.
안중근을 부인한 뮈텔 주교의 그림자
김 정 추기경님이 청주교구에 계실 땐, 사제단 일에 예스나 노를 하지 않고 모르는 체해 주었죠. 상당한 지혜죠. 평양교구장(겸임)으로 북한 사회를 대하는 건 냉정했어요. 아무래도 가난한 사람들과 벗할 기회가 없었던 게 원인이 아닌가 싶어요. 서른여덟 즈음 주교가 되었고. 한 김수환 신부도 일찍 주교가 되었는데…의식적으로 약한 자와 가난한 자, 힘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귀를 유지하느냐 못하느냐 문제겠죠. 아버님 문제가 나중에 밝혀졌지만, 처음에 가톨릭뉴스 같은 데는 세살 때 대학생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걸로 나오더라구요. 아버지를 지우다가 너무 많이 지우신 거 같아요. 서 19일은 대통령 당선 3돌 되는 날이었는데 엠비는 3년 쇼를 이튿날 연평도 불꽃놀이로 한 셈이죠. 갈등에 불을 붙일 수 있는 포격훈련을 감행하는 등 위기가 정점에 와 있습니다. 한-미 에프티에이 양보한 일을 두고 이미 조지워싱턴호에 실려 있었다는 말도 돕니다. 21세기 첫 10년을 보내고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의미를 짚어보죠. 김 예수 탄생은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뜻하죠. 예루살렘의 지배세력은 술렁거렸고, 베들레헴 사람들은 여관방 한 칸도 안 내줬죠. 헤로데스(헤롯왕)는 끝까지 예수의 싹을 없애기 위해 칼질을 했죠. 그리스도라고 하는 새로운 질서를 2010년만큼 열심히 거부할 수가 없죠.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그랬고 일생 동안 성전세력에게 배척당했죠. 그래서 길에서 사람을 만났죠. 성전 사건에서 보듯 그들과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데까지 간 거죠. 그게 예수 죽음의 원인이 되는 거고. 한 ‘화해할 수 없는’이라고 했는데 엠비정권과 민중, 자연과는 어떤 관계인지. 김 화해하기 어렵습니다. 추기경은 4대강 문제에서 그걸 억지로 양립시키려 했어요. 발전적 개발과 파괴적 개발이 있다면서. 서 그걸 ‘궤변’이라고 한 거잖아요. 사제단이 주교회의의 결정을 재확인하면서 4대강 사업을 ‘창조주의 질서를 거스르는 일’이라고 했거든요. 실로 지엄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김 세간사람 입을 통해 ‘창조주의 질서를 거스른다’는 말을 들으니 두려움을 새삼 느낍니다. 성탄 사건이 뜻하는 건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사이라는 겁니다. ‘보라, 나의 거처는 사람들 사이다!’ 한 용산 참사 때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친 건 ‘여기 하느님이 계시다’는 말과 같죠. 김 그래요, 용산 참사는 ‘여기 하느님이 있어요’라는 거죠. 서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불이 치솟을 때 외친 마지막 말이 ‘여기 사람 있어요’였죠. 신부님은 광장기도가 이 시대 대중들의 부름에 대한 화답이라고 했는데, 그 말엔 대중구원의 뜻이 들어 있다고 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떠났지만 사회적 타살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구원의 여지가 있다는 말도 했는데. 김 ‘세상의 꿈과 희망, 고통과 슬픔은 온전히 우리 그리스도인의 것’이라는 게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정신이에요. 세상이 울고 있는데 그 슬픔을 나눠야죠. 교회가 불행을 막고자 ‘자살하면 구원 없다’고 하지만 정말 숨쉴 수 없어서 스스로 떠난 자에게 구원 없다고 하면 무서운 폭력이죠. 성경정신이 아닙니다. 한 천당 문 앞에서 자살한 사람더러 ‘저리로 가’라고 하겠어요, ‘너 힘들었구나’ 하겠지. 서 정 추기경 발언 직후 김 신부께서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파리외방전교회 소속)가 안중근을 외면한 일에 빗대었더군요. 응칠다묵(안중근의 옛 이름과 세례명의 조합)이 신도가 아니라고 두번씩 부정한 일은 큰 죄가 아닐까 싶은데요. 그 뒤 뮈텔은 슬픈 마음으로 ‘이또 공’(히로부미) 조문을 갔죠. 김 황해도 청계동성당은 안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 진사가 지은 거고, 뮈텔 주교가 거기 묵은 적이 있어요. 해주 오가는 길엔 총을 멘 안 의사가 호위하고. 뮈텔과 안 의사는 정 추기경과 저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였죠. 서 뮈텔 주교와 정 추기경은 백년을 사이에 두고. 김 명동성당 주인의 내력인 거 같아요.(웃음) 뮈텔 주교는 식민지 백성의 애환을 나누지 않았죠. 오히려 자비와 사랑으로 백성들의 아픔을 끌어준 토마 안중근을 배척했죠.
추기경은 뭐가 무서워 눈치를 보는가 서 천주교는 오랫동안 안 토마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김 겨우 김 추기경 시절에 했죠. 올해 순국 100주년 미사를 정 추기경께서 주관했고. 서 이제야 회복된 거군요. 김 완전회복인데, 정신은 계승하지 않고 브랜드만 가져온 거죠.(서해성 쓰러짐) 한 삼성비자금 폭로하고 사제단이 압력을 받은 게 있는지요? 김 별로…. 전종훈 신부 안식년 강요받은 게 피해라면 피해겠죠. 서 한국 가톨릭에 한 분뿐인 추기경이라면 자신 있게 진리와 정의를 말할 수 있을 터인데 왜 눈치를 보는 느낌을 주는 건지. 김 나도 그게 궁금한데요.(웃음) 한국 천주교가 과분하게 누리는 도덕적 권위와 힘이 어떤 건지 아직 모르시는 거 같아요. 서 마지막으로 성탄 메시지를. 김 흔히 성탄 때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하죠. 여기서 평화란 정치적인 말이에요. 팍스로마나에 대응하는 마구간의 평화. 성탄 때 평화라는 말을 쓰는 건 지배체제가 구성해놓은 ‘평화’를 뒤엎겠다는 뜻이죠. 예수가 주려고 한 평화는 오늘날 그저 말하는 평화와 크게 다르다는 것만큼은 알고 성탄 인사를 했으면 싶습니다. 서 교회가 말씀 봉사를 한다고 했는데, 가장 좋아하는 말씀 한 줄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리라’거든요. 창조주를 거스르는 배역의 강물인 4대강 사업을 돌아보는 데 딱 어울리지 않는가 싶습니다. 한 ‘내게 강 같은 평화’라는 노래도 있죠. 노무현 대통령이 어느 방명록에 ‘강물처럼’이라고 남겼는데, 엠비가 4대강 사업 하며 강을 죽일 줄 미리 알았나보네요. 김 ‘평화가 내 원이건만 그 말만 하여도 사람들은 싸우고자 달려들더라.’ 시편 120편 7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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