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바보’가 세상을 바꾼다
-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맡은 몫을 해내려 애쓰고 있는 여러 언니, 친구, 동생들의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이들의 고민과 좌절, 그리고 희망을 통해 우리 시대 ‘배운 녀자’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오늘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숨은 ‘배운 녀자’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려 합니다. 매주 수요일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여성 오피니언 리더의 글로 찾아 뵙겠습니다.
배운녀자 ④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
노무현 만나고 뒤집어진 내 인생
청와대에서 일을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아는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걸리기만 하면 가만 안둔대요. 조심하세요.”
“교수가 걸릴 일이 뭐가 있겠어요?”
<조선일보> 기자가 사방으로 내 뒤를 캐고 다닌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자신만만했다. 모든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내 양심은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으니, 별일 없으려니 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유치하고 터무니없는 말장난을 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의 소설 실력은 교과서처럼 살아온 내 상상력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들은 양심은 없었지만, 유능했다. 중요한 말 하나를 뒤집어 180도 다른 의미의 발언을 만들어내는데 천부적이었다. 오죽하면 왜곡보도에 그렇게 많이 당한 노무현 대통령마저도 감쪽같이 속았다. <월간조선>은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기사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내가 처음부터 보수언론과 척을 졌던 것은 아니다. 나는 운동권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진보지식인임을 자처한 적도 없다. <조선일보> 기고는 거부했지만 다른 보수언론에는 비교적 자주 글을 쓰는 편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보수적인 전문가’로 칭했다. 실제로 내가 보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소위 보수를 자처하는 조중동과 한나라당이 얼마나 수구적인지를 폭로하기 위한 수사였다.
30대 초반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후, 계속 언론 노출을 피하다 마흔의 나이가 되면서 한국의 정치 현안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학 3학년 때 겪은 5.18 당시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던 교수들을 보면서, 내가 불혹의 나이가 되면 젊은 사람들에게 시시비비를 명백히 가려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한 결심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만약 내가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면 나중에 잘못을 겸허히 인정하고 논평을 그만두면 된다. 내 생각을 강요해서는 안 되지만 매사에 분명한 입장을 밝혀 젊은이들의 판단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언론 논평을 할 때 대중적 인기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발언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원칙을 세웠다. 전문 분야가 아니면 발언하지 않았고, 같은 주제의 겹치기 칼럼 쓰기나 방송 출연을 금해 대중적 스타가 되는 걸 경계했다. 무엇보다 여론의 방향이 너무 한 쪽으로 쏠린다 싶으면, 다수의 입장을 지지하기보다는 욕을 먹더라도 소수의 입장을 대변해 주려 노력했다. 민주주의의 생명은 여론의 다양성과 균형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기관리를 철저히 했기 때문인지, 중립적이었기 때문인지, 신문과 방송에서 많이 찾았다. 그러자 내가 방송PD들에게 술 접대를 잘해서 언론에서 띄워 준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행동해도 사람들은 쉽게 곡해했다.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나는 속살이 풀잎에 베인 듯 마음이 쓰렸다. 평생 나의 중심은 ‘우리’였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양보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섯 살 때 처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고민을 시작했다. 그때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내가 죽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세상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며칠 밤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눈물을 쏟기도 했다.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것이 인생이라면 내가 왔다 간 후에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당과 지옥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우리가 이웃과 협력하면 이 세상이 천당이 될 수도 있고, 협력을 거부하고 나만 위하면 지옥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린 마음에 그 이야기가 그렇게 충격적일 수 없었다. 나는 이웃과 협력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희생하고 양보하여 상대의 협력을 이끌어내,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었다. 단, 내가 고통을 느낄 정도의 숭고한 희생은 피하고 싶었다. 최근 수단에서 의료 봉사를 하다 돌아가신 이태석 신부님에 관한 다큐영화를 보며 내 삶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던 적이 있다. 내 속에는 위인의 피보다는 소시민의 피가 흘렀다. 성격 탓일 것이다.
어릴 적 나는 수줍음이 많아 남 앞에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꿈꾸는 작은 천국을 만들겠다는 생각에 힘들고 귀찮은 일에는 늘 먼저 팔을 걷어붙였다. 친구들과 함께 등산이나 여행을 가면 준비물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아 가면 나는 늘 주방의 도우미가 되어 있었다. 유학시절에 모임이 있으면 장소는 늘 우리 집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떤 모임에서든 나는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리더의 역할을 자주 맡게 되었고, 매우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리더로서 성공한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뒤에서 조용히 궂은일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설 기회를 많이 주는 유형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내 성향이 소극적이었기에 유능한 사람들이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하도록 기회를 주었고, 내가 나서는 것보다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리더십 연구를 하면서 깨달은 거지만, 나는 한 번도 뭐가 되겠다는 꿈을 가져본 적이 없다. 역사의 바벨탑 한 구석에 박힌 작은 돌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나는 공부를 별로 즐기지도 않았고, 또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 하지만 조혼으로 공부를 중단한 아버지의 못 이룬 꿈이 박사였기에 아버지의 소원이나 이뤄 드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자고 생각했다. 원래 하고 싶었던 사회복지학 대신에 정치학을 택하게 된 것도 아버지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사회복지가 세상을 점진적으로 바꾼다면 정치는 세상을 일거에 바꾼다는 아버지의 설득을 받아들였다.
학위를 마치고 돌아와 정치학회에 데뷔했다. 그때만 해도 정치학계는 여성에게 불모지나 다름없었고, 또 배타적이었다. 하지만 뒤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성격 탓에 보수적인 남자 교수들과도 사이가 좋았고, 공동연구를 통해 책도 많이 썼다. 지금이야 남녀 학자 간 공동연구가 흔한 일이 되었지만 그때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렇게 쌓은 남성 학자들과의 우정 덕분에 당시에는 당연시 되었던 정치권의 빽(?)을 쓰지 않고도 떳떳하게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 선배교수가 내게 단정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참 야심이 많은 사람이야. 도대체 당신의 목표는 뭐야?”
“저는 그냥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는데요.”
“당신은 야심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만큼 무서운 사람이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렇게 모든 사람이 당신을 좋아할 수 있지? 사람이 살다 보면 성격이 안 맞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니야.”
그때까지만 해도 내 별명은 ‘사교계의 여왕’이었고, 나는 남자교수들이 우스갯소리로 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결혼하고 싶은 여자 1위에 꼽힐 만큼 가부장적 사회에 잘 적응했다. 남에게 싫은 소리나 ‘No’를 못했으니 대인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선배교수의 예언은 적중하게 되었다. 운동권 경력도 언론인 경력도 없으면서, 그리고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지지도 않은 내가 노무현 대통령의 홍보수석으로 발탁되었으니 말이다.
역사의 평가가 중요하지 당장 남에게 비쳐지는 이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인수위 때부터 동참 요청을 받았지만 계속 고사하다가 2005년에 청와대에 합류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더 이상 대통령을 외롭게 둘 수 없다는 것.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국민의 기대를 너무 높여놓았다. 나는 ‘인터넷이 조중동을 이겼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내 판단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은 일회성 기적이었고, 앞으로 이어질 국민들의 실망과 노대통령이 감당해야 할 앞날이 심히 걱정스러웠다. 무엇을 이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대통령과 함께 거센 바람을 맞아 주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대통령의 제안에 응했다. 후에 아들이 “엄마 그때 뭐했어요?” 하고 물으면 “노대통령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알리바이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바보’를 넘어 ‘현명한 바보’를 꿈꾸다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은 2002년 대선정국에서 동아일보에 월 1회 고정칼럼을 기고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 나는 중립적 논평가로 남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논평으로 이름이 알려지면 블랙홀에 흡수되듯 모두 정치권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기 싫었다. 그런데 나의 글이 조금만 이회창 후보에게 불리하거나 노무현 후보에게 유리하면, 일부가 사라지고 편집되고 이상한 제목이 붙었다.
현실 정치에 참여한 후 여기저기에서 상처를 받고 다치면서 깨달은 교훈이 하나 있다. 나만 협력하고 선의를 갖는다고 세상이 천국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 선의를 배반하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들을 견제하는 것은 희생이나 양보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마음을 바꿔먹자 내 안에 숨어있던, 나도 모르던 엄청난 전투력이 발휘되었다. 나는 아직도 학생들에게 꾸중 한마디 못할 만큼 마음이 약하다. 하지만 ‘강자에 강하고 약자에 약한 사람이 되자’는 좌우명에 따라 앞뒤 재지 않고 수구언론과의 싸움에 뛰어들었다.
주요 언론이 특정후보에게 불공정하게 대하는 상황에서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기득권의 편을 드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켜야 할 약자는 노무현 후보였고 보수언론은 제어해야 할 대상이었다.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의 지지를 철회해 그가 위기에 처하던 2002년 12월 19일 대선 날, 나는 망설임 없이 오마이뉴스에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글을 실었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을 것이고, 교수직도 어찌됐을지 모를 일이다.
노대통령과 나의 인연이라고는 대통령이 내 글을 읽고 ‘어떻게 한국정치를 그렇게 정확하게 분석하느냐’며 감탄했다는 전언이 고작이었다. 특별한 친분도 없이 청와대에 들어갔지만 노대통령과 나는 쉽게 마음이 통했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역사의 진보에 대한 강한 믿음이 같았다. 또 이념보다 휴머니즘이 앞서는 것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다. 민생탐방에 대한 의견이 달라 대통령과 자주 심한 언쟁을 벌인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안에 대한 판단이 같았다. 어떤 때는 쓰는 용어까지 비슷해서 내가 대통령 말씀을 듣고 하는 말인지 대통령이 내 말을 인용하시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임기 중반의 청와대는 생각보다 어려운 상황이었다. 수구언론의 공격에 참모들은 주눅이 들어 있었고, 대통령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나는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다. 대통령을 대신해서 일부 언론과 대립각을 세웠다. 당시에는 노대통령, 정연주 전 KBS 사장 다음으로 보수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많이 받는 공적 3호가 되었다. 어떤 날은 나에 대한 비난으로 신문이 도배가 되었는데, 그 비난은 모두 왜곡 기사에 기초한 것이었다.
내가 청와대에서 그 숱한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노무현 대통령 내외분 덕분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고 신뢰를 보내 주는 사람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노대통령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만류하는 대통령을 뒤로 하고 일 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노대통령의 방패 역할을 다했다는 판단도 있었지만 노대통령에게 너무 가혹했던 진보진영에 대한 실망이 더 큰 이유였다.
퇴임이 다가오면서 다시 노대통령을 자주 만나게 되었다. 홀가분하게 다시 시민으로 돌아올 대통령과 함께 앞으로 할 여러 사업의 계획을 세우며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대통령 퇴임 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봉하마을에 내려가 함께 집필할 책 구상을 하며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에 땅을 치고 통곡한다’는 표현은 결코 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잠을 자다가도 실제로 울다 애간장이 끊어지는 고통에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일 년이 넘는 시간을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내가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을 따르고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 덕분이었다. 개인의 사리사욕보다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는 수많은 분들을 보며 나는 겨우 기운을 얻을 수 있었다.
노대통령은 생전에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조기숙 교수 글이 참 좋은데 노빠로 낙인이 찍혀서 글이 신뢰를 잃었지요. 안 오겠다는 사람을 억지로 데려다 상처만 입히고 너무 후회가 돼요.”
대통령을 잃고 나서 내 인생을 되돌아보니 후회가 되는 일도 많다. ‘이타심’을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어야 했는데, ‘이타심’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되어 나를 옭아맸던 것 같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노대통령도 결국 나와 같은 잘못을 범했다고 생각한다. 검찰조직이 자율정화하기를 기대하며 권력을 넘겨줌으로써 그들로부터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분을 잃고 나서 무조건적 ‘이타심’에 대한 나의 집착도 사라졌다. 노대통령의 희생은 의미가 없지 않다. 국민들에게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분명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과 같은 길을 가서는 그분이 세워준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보다 지혜로워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뢰할 만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사회적 지능’을 키워야 한다. 이제는 ‘바보’를 넘어 ‘현명한 바보’를 꿈꾼다.
나는 과거에 내가 서 있던 곳에서 경계를 넘어 노대통령에게로 왔다. 노대통령에 대한 시각 차이로 과거의 인연, 친구, 동료와의 결별을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보람된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대통령과 함께 한 시간이다. 나는 신뢰할 만한 사람을 신뢰했다.
웃는 모습이 봄바람처럼 수줍고 가을 햇살처럼 따사로운 그분이 그립다. 그분이 생각날 때마다 우리 아이들에게 좀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내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더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분을 다시 만나게 되면 이런 말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대통령님, 우리 잘~ 했지요?”
| |
배운녀자 지난회 보기
(http://hook.hani.co.kr/archives/author/baeun)
'명문 컬럼,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mb면전에서 "4대강 하느리 돈 부족해서 신용카드공제 없애냐?" (0) | 2011.02.17 |
---|---|
그러니까 햇볕정책이 맞는다니까! 일시에 무너지면 재앙이란 걸 모를까? (0) | 2011.02.16 |
300억뿐이 아니라 정수장학회,능동어린이대공원,부산일보사,영남대학교등등 (0) | 2011.02.16 |
믿으라고 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어야하는데....ㅠㅠ (0) | 2011.02.10 |
구구절절 옳은 얘기! 숭례문 잡아 먹는 거 보고 나도 불길한 예감을 했지! (0) | 2011.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