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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잘 돌아가나?

어이! 니네들이 수구골통이 아니고 보수라며?? 국가를 위해 목숨바친 사람에게 위로금 5천원주면서 니네들이 그래도 보수라고 할 거야?

by skyrider 2011. 10. 18.

"가족 잃고 구걸, 글도 못배웠는데… 나라가 5000원 내미나"

'오빠 戰死 보상금 5000원' 판정받은 김명복씨
오빠는 전쟁터로 가고 폭격에 두 딸 잃은 어머니는 정신질환에 '미친×' 욕 들어
난 학교도 못가고 눈물 세월 "오빠 찾아라" 엄마 유언에 10년간 혼자 찾아헤매다 '현충원 안장' 알아냈는데… 보훈처가 내민 5000원은 가족들의 고통 비웃는 것

조선일보 | 조백건 기자 | 입력 2011.10.18 03:19 | 수정 2011.10.18 08:03 | 누가 봤을까? 30대 여성, 강원



"어떻게 나라가 이럴 수 있나?"

오빠의 전사(戰死) 대가로 국가로부터 '5000원 보상금' 판정을 받은 김명복(63)씨는 하염없이 울먹였다. 17일 경남 김해 에 사는 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세상천지에 대한민국 이 뭐 하는 짓이냐"는 말을 반복했다.

김씨 가족은 6·25 전쟁으로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어머니와 단둘이 남은 김씨는 학교를 다녀본 적도 없이, 구걸하다시피 생계를 이어야 했다고 했다. 수화기를 통해 건네오는 그의 목소리는 그 세월이 온통 묻어 있는 듯 했다.

↑ [조선일보]6·25전쟁 때 전사한 오빠의 사망 보상금을 신청한 김명복(63)씨가 지난 4월 창원보훈지청으로부터 받은 군인 사망 보상금 지급 안내 통지서(왼쪽). ‘지급금액 5000원’이라고 적혀 있다.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김씨는 1948년 경북 영덕군 영해면의 해변 마을에서 1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1950년 5월 지병으로 먼저 떠났다. 한 달 뒤 6·25 전쟁이 터졌고, 당시 포항고등학교 3학년인 오빠 김용길(당시 18세)씨는 집으로 돌아왔다가 며칠 뒤 군대를 갔다.

김씨는 "(군대 가러 모인) 운동장에서 오빠는 저를 등에 업은 어머니에게 '동생들이 너무 불쌍하다' '금방 돌아와서 취직해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겠다'고 말한 뒤 전선(戰線)으로 갔다고 들었다"고 했다. 김씨 가족도 곧바로 피란길에 올랐지만, 도중에 폭격을 만나 언니 둘이 죽었다. 모친 등에 업힌 김씨만 살아남고 뒤따르던 언니들은 죽은 것이었다. 며칠을 앓아누운 어머니는 그 뒤로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했다. 정신질환이었다.

모친과 함께 경북 영덕의 산골 마을로 피신한 김씨는 이때부터 남의 집 밭일을 도와주고 숙식을 해결했다. "엄마 손 잡고 이 집 가서 한 그릇 얻어먹고 또 저 집 가서…"라고 했다. 김씨는 "어머니와 함께 길을 가다가 누군가 '미친×'이라며 던진 돌멩이에 맞아 울었던 기억도 난다"고 했다. 학교는 다니지 못해 지금도 문맹이다. 열 살 때 마을 이장에게 입양이 됐고, 그때부터 50년간 '박(朴)씨'로 살았다. 10대 중반에 홀로 부산으로 건너가 미용실에 취직한 그는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어머니를 모시고 시집을 갔다.

김씨는 1996년 모친으로부터 오빠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는 "엄마가 그 해 정신이 잠시 맑아져, 제게 '네 오빠 이름은 김용길이다. 네가 꼭 찾아야 한다'고 당부하고는 며칠 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때부터 김씨의 '오빠 찾기'가 시작됐다. 국방부 와 보훈처 를 수차례 찾았지만 "오빠의 군번(軍番)을 알아오기 전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김씨는 2006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국립대전현충원 민원실을 찾았다. "이름은 김용길, 고향은 경북 영덕군…." 간단한 신상 정보를 대자, 10년간 국방부와 보훈처가 찾지 못한 오빠의 행방이 나왔다. '일병 김용길' '1950년 11월 24일 경기도 가평에서 전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 김씨는 "듣자마자 감격스러워서 주저앉아 울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2008년 재판을 통해 원래의 성을 되찾았고, 그해 12월 보훈처에 유족 등록 및 사망보상금을 신청했다. 그러나 보훈처는 "보상금 청구 기간 5년이 지났다"며 이를 거부했다. 소송 끝에 보훈처는 지난해 6월 김씨를 유족으로 인정하면서도 보상금 지급은 "국방부 소관이니 국방부에 문의하라"고 했다. 국방부에 찾아가니 "보훈처 업무"라고 했다. 김씨는 "법원 결정이 났는데도 두 기관은 계속 자기 업무가 아니라고만 하다가 올해 대뜸 5000원 결정 통지서를 보내왔다"고 했다.

김씨는 17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4월, 5000원 보상 통지서를 받고 너무 어이없고 화가 나서 잠시 정신을 잃었었다"고 했다. "저같이 힘없고 배운 거 없는 사람이 무시당하는 건 세상 이치라 해도, 나라 지키려고 전쟁 나가서 죽은 오빠 같은 사람한테 나라가 어떻게 5000원을 줄 수 있습니까?"

김씨는 "어머니의 유언 때문에 오빠 찾기를 시작했지만 '까막눈'이 나라 상대하려니 막막해서 수백번 포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김씨는 "유족에게 보상금은 일종의 위로금"이라면서 "5000원은 그동안 유족들이 겪은 고통을 비웃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전쟁 유족이 나처럼 이렇게 먼 길을 돌아오는 일이 다신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씨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 비용으로 1000만원을 썼다. 이 돈은 제대한 아들을 위해 모아둔 등록금이었다고 한다.

김씨는 김해에서 남편 남모(64)씨, 1남2녀의 자녀와 살고 있다. 한때 미용실을 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지금은 그만뒀다.6.25 전쟁때 전사한 친오빠의 위로금으로 5000원이 정해진 데 반발해 기나긴 보훈청과의 싸움을 벌여온 김명분씨가 경남 김해시 자택에서 보훈청에서 보내온 공문들을 보여주고 있다.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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