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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글,뉴스

이런 며느리, 진짜 있을까?

by skyrider 2013. 6. 19.

 

 

 

    지방에 사시는 시어머니가 올라오셨다.

 


 

결혼한지 5년이 되었지만, 우리집에 오신 것은 결혼 초 한 번을 빼면

 

처음이다.



청상과부이신 시어머니는 아들 둘, 모두 남의 밭일 논일을 하며 키우셨고,


 

농한기에는 읍내 식당일을 해 가며 악착같이 돈을 버셨다고 한다.


 

평생 그렇게 일만하시던 시어머니는 아들 둘을 다 대학졸업 시키신 후

 

 

일을 줄이셨다고 한다.  


 

 

 


결혼 전 처음 시댁에 인사 차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그러셨었다.


 

고생도 안 해 본 서울아가씨가 이런 집에 와 보니 얼마나 심란할꼬.


 

집이라 말하기 민망하다. 가진 거 없는 우리 아랑 결혼해 준다고 해서 고맙다.


 

 


 

장남인 남편과 시동생은 지방에서도 알아주는 국립대를 나왔고,


 

군대시절을 빼고는 내내 과외아르바이트를 해 가며 등록금을 보태고


 

용돈을 썼다고 했다.

 


 

주말이나 방학에는 어머니를 도와 농사일을 하느라 연애는 커녕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렇지만 주변에 늘 좋다는 친구들 후배들이 줄줄 따른다.

 

 

둘 다 대학 졸업 후 남편은 서울로 취업을 해서 올라왔다.

 


 

그리고 회사에서 나를 만났다. 나는 서글서글한 외모에 건강하게


 

그을린 얼굴이 좋았다 .


 

건강하고 밝은 성격에 회사에서도 그는 늘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됐고, 내가 먼저 고백했다.

 


 

그는 망설였다. 자기는 가진 거 없는 몸뚱이 하나뿐인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후였고, 삼고초려 끝에


 

그는 나를 받아주었다.

 


 

그의 집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그를 우리 집에 데려갔다.


 

그의 외모와 직업에 우리 부모님은 그를 반겨주었다.


 

집이 지방이고 어머니가 농사를 지으신다고 했을 때 엄마 얼굴이


 

어두워졌다.

 


 

당장 가진 거라고는 월세 원룸보증금과 얼마간의 저축이 전부다 했을때

 

 

아빠가 담배를 피우셨다.

 


 

그가 말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자랐지만, 허리 한 번 못 펴시고 우리 형제 위해 평생을 밭에


 

서 엎어져 살아 온 어머니께 배운 덕분으로 어디 가서도 영은이 굶겨


 

죽이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공주처럼 고이 키우신 딸 고생문이 훤하다 걱정되시겠지만, 그래도


 

영은이에 대한 저의 사랑, 열심히 당당하게 살 각오가 되어 있는

 

 

제 결심 이것만 높이 사주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결혼했다. 친정아버지가 마련해 주신 돈과 회사에서


 

받은 전세자금 대출로 신혼 집을 마련하고, 그와 내가 모은 얼마간의


 

저축으로 혼수를 했다.

 


 

너무 행복했다. 결혼 후 처음으로 시댁으로 내려갔다.


 

마침 어버이 날과 어머니 생신이 겹쳤다. 일부러 주말을 잡아 내려갔다.


 

시동생도 오고 마당 평상에서 고기도 구워 먹고 밭에서 상추를 뜯어다 먹는데


 

그 맛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삼겹살이었다.

 

 

 

그날 밤 작은 방에 예단으로 보내 드렸던 이불이 깔려 있었다.

 

 

 

어머니는 한 번도 그 이불을 쓰시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우리더러 그 방에서 자라고 하신다.

 


 

싫다고 뿌리치는 어머니 손목을 끌어 작은방으로 모셨다 .


 

어머니하고 자고 싶어요. 신랑은 도련님하고 넓은 안방에서 자라고


 

할거에요.

 


 

어머니는 목욕도 며칠 못했고, 옷도 못갈아 입었다고


 

이불 더럽혀 지고 니가 불편해서 안된다.


 

냄새나 안된다고 자꾸 도망가려 하셨다


 


그런 어머니께 어머니랑 술 한 잔 마시고 싶다고 응석을 부려 함께 소주를 먹었다.

 

 

어머니가 찢어주시는 김치가 너무 맛있어서 소주를 홀랑 홀랑 비우고 취해


 

들어버렸다.

 


 

자다가 목이 말라 깨어 보니 나는 이불 한 가운데 누워 자고 있고


 

어머니는 겨우 머리만 요에 얹으신 채로 방바닥에 쪼그리고 주무

 

계셨다.

 


 

슬쩍 팔을 잡아 요위에 끌어드렸다. 


 

야야~ 고운 이불 더럽혀 진다. 냄새밴대이............ 어머니에겐 냄새가 났다 정말!

 

 

울엄마에게 나던 화장품 냄새가 아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부뚜막 냄새, 흙냄새 같은 그 냄새가 좋아서 나는 내려 갈때마다


 

어머니와 잔다.

 


 

이제는 손주와 주무시고 싶다며 나를 밀쳐 내시지만


 

악착같이 어머니 한쪽 옆자리는 나다. 어떤 밤이던가 어머니 옆에 누워 조잘거리내게


 

니는 꼭 딸 낳아라.이래서 사람들이 딸이 좋다 하는갑다.

 

 

니가 이래 해 주니 니가 꼭 내 딸 같다~


 

뒷집이고 옆집이고, 도시 며느리 본 할망구들 다 나 완젼 부러워 한다.

 

 

며느리들이 차갑고 불편해 해서 와도 눈치보기 바쁘다 하드라.


 

뭐 당연하다.

 


 

내도 니가 첨 인사 왔을 때 어찌나 니가 불편 하진 않을까, 싫다진 않을까 걱정을 했던지...


 

 

말도 못해.

 

 

그러니 당연한 거 아이가... 그러니 딸이 좋다 카는거지...


 

 

나는 니가 이래 딸처럼 대해 주니 뭐, 딸 없어도 되지만

 

 

니는 꼭, 딸 낳아라...

 


 

진즉부터 혼자 계시던 어머니가 걱정이었는데 결국 사단이 났다.


 

상을 들고 방에 들어가시다 넘어지셔서 가뜩이나 퇴행성 관절염이


 

심한 다리가 아예 부러지셨다 했다. 도련님이 있는 대구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노인이라 뼈도 잘 안붙는다고 철심도 박고 수술하고 3개월을 그


 

렇게 병원에 계시다가 지난 주 퇴원을 하셨다.


 

 


 

어머니가 뭐라거나 말거나 그 사이 나는 내려가서 간단히 어머니 가지며 짐을 챙겨

 

 

우리집에 어머니 방을 꾸렸다.


 

아들녀석은 할머니가 오신다고 신이 나 있고, 표현할 줄 모르는 남편은


 

슬쩍슬쩍 그 방을 한 번씩 들여다 보며 웃는 것을 나도 안다.

 

 

당연히 우리집에 곱게 오실 리가 없다.

 


 

어머니! 저 둘째 가져서 너무 힘들어요!! 우리 친정엄마 허구헌날


 

노래교실에 뭐에 승민이도 잘 안봐주시고, 제가 회사일에 임신에 육


 

에 힘들어 죽겠어요!

 

 

오셔서 저 좀 도와주세요. 임신하니까 어머니 음식이 그렇게 땡겨 죽겠단말이에요! 


 

어머니 김치 담아주세요~ 그 말에 못 이기는 척 어머니가 오셨다.

 


 

친구들이 말했다. 니가 모시고 살아봐야 힘든 줄을 알지. 착한 며느 노릇 아무나 하는 줄

 

 

알아?


 

그래 맞다. 내가 안 해 봐서 너무 쉽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머니와 살면서 힘든 일이 생기고 어쩌면 어머니가 미워질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럴때마다 내 마음을 다잡기 위해 이렇게 글 을 쓰고 올린다.

 


 

여기 많은 분들이 이렇게 증인이니, 혹여나 어머니가 미워지고 싫어져도


 

나는 이제 어쩔수 없다. 그냥 이게 내 팔자려니 열심히


 

지지고 볶고 하면서 같이 사는 수밖에~


 

 

승민 아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