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일 오후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에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의원에 대한 선고가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를 비롯한 의원들이 방청한 가운데 열리고 있다. 이날 대법원은 한명숙 의원에 대한 징역 2년형으로 확정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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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의 수사기록은 던져버려야 합니다."
2006년 9월 19일 대전고등법원과 대전지방법원을 찾은 이용훈 대법원장은 말했다. 검찰 수사기록에 의존하던 관행을 버리고 법정에서 모든 증거를 면밀히 살핀 다음 사건의 실체를 판단해야 한다는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한 말이었다. 이후 공판중심주의는 형사재판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그런데 20일 이상훈·김소영·김용덕·박보영·이인복 대법관은 사법부 스스로 공판중심주의를 져버렸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한명숙 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한만호 한신건영 대표로부터 불법정치자금 9억 원을 받았다는 공소사실을 전부 유죄로 인정한 양승태·권순일·김신·김창석·민일영·박병대·박상옥·조희대 대법관에게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검찰에선 '돈을 줬다'던 한 대표가 1심 법정에선 '주지 않았다'고 번복했기 때문이었다.
공판중심주의는 법정진술의 신빙성을 더 높이 산다. 재판부가 증인 또는 피고인이 거짓말을 할 경우 처벌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고,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변호인 반대신문까지 허용해서다. 이것을 배제하고 검찰 진술을 믿을 때는 객관적인 자료가 뒤받쳐줘야 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한명숙 전 의원과 한만호 대표 사이에 오갔다는 9억 원을 모두 입증하는 확실한 물증은 없었다. '결정적 한 방'은 한 대표의 검찰 진술뿐이었다.
70여회 조사했는데, 기록은 6개뿐
▲ 한명숙 "정치권력 개입된 불공정한 판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을 확정 받은 한명숙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대표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법리에 따른 판결이 아닌 정치권력이 개입된 불공정한 판결이다"며 결백을 호소하고 있다. | |
ⓒ 유성호 |
이때 남는 문제는 그의 말을 기록한 검찰 조서를 어디까지 믿느냐다. 그런데 한명숙 전 의원에게 전부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는 이 기록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한만호 대표는 첫 조사를 받은 2010년 3월 1일부터 1심 법정에 출석한 2010년 12월 20일까지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70회 넘게 드나들었다. 하지만 검찰이 법정에 제출한 기록은 그가 직접 쓴 진술서 한 부와 다섯 번의 조사 내용을 기록한 조서가 전부였다.
공소사실 가운데 수표 등 출처가 명확한 3억 원만 유죄라고 소수의견을 낸 다섯 대법관도 이 대목을 두고 "한만호가 일단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진술을 하자 검사가 번복하지 않도록 부적절하게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다른 기록을 살펴봐도 한만호 대표의 검찰 진술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없다고도 했다.
핵심 증거인 한 대표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면 9억 원 전부를 유죄로 판단한 항소심 판결을 어떻게 봐야할까? 대법관들은 또 "원심(항소심)이 한만호를 직접 증인으로 신문하지도 않고 1심 판단을 뒤집은 것은 공판중심주의 등 형사소송의 기본원칙에 비추어 적절하지 않다"며 "다수의견에 찬성할 수 없다"고 했다. 사건을 다시 심리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검찰 출신 변호사 역시 한만호 대표의 검찰 조사기록이 일부만 존재하는 점을 의아해했다. "(검사가) 70번 넘게 불렀으면 조사하려고 불렀을 텐데, 그때마다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공판중심주의가 법정 밖에서 있던 것이 다 거짓이라는 뜻은 아니다"라면서도 "검찰 조서를 믿으려면 한만호 대표를 왜 70번이나 불렀는지, 당시 상황은 어땠는지를 재판부가 충분히 따져야 했다"고 말했다.
의문 남긴 수사, 눈감아버린 법원
'수원역 노숙소녀 살인사건' 피고인을 변호한 박준영 변호사의 생각도 비슷했다. 피고인이 검찰 조사에서 허위자백했다는 사실을 밝혀내 무죄 판결을 이끌어냈던 인물이다. 그는 "진술증거가 중요한 사건인데, 검찰이 한 대표를 수십 차례 소환한 과정이 전혀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면 굉장히 의심스럽다"며 "(검찰이) 자료를 숨겼다면, 한 대표의 진술이 검찰에게 불리한 내용이 많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 "물론 검찰 진술을 믿고 유죄판결을 할 수도 있지만, 불합리하고 자의적인 수사의 책임은 전혀 묻지 않겠다는 것이냐"고 지적했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중요하다지만, 진술은 여전히 중요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박 변호사는 "수사하는 사람은 진술번복을 우려할 수밖에 없어서 (한 대표를 70여회 부르듯) 이런 식의 수사가 얼마든지 많아질 수 있다"며 "법원이 그것을 제대로 검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다수의견은 검찰 조서를 전부 믿기로 했다. 던져버려진 쪽은 수사기록이 아닌 재판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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