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영 사장의 'PD수첩 고해성사'
오늘의 언론史 | 2009/04/08 20:51 | 방짜진짜 별 일 다 일어납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언론사(言論史)가 오늘 만들어졌습니다. 검찰이 압수수색에 나섰습니다. <PD수첩> 수사를 위해 MBC에 쳐들어갔다고 합니다. 검사 2명에 수사관도 15명이나 동원됐다는 소식에 그저 말문이 막힐 뿐입니다. Photo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 정도면 언론의 비판 감시 기능을 완전히 말살시키려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언론자유를, 민주주의를 유린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검찰은 '개검'이라 불려도 할 말이 없게 됐습니다.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황당한 언론사(言論史)를 하나 꺼내봤습니다. 물론 주인공은 <PD수첩>, '악역'은 현대그룹이 되겠습니다. 금력이 언론을 억누르려고 했던 일입니다. 2000년 4월 8일, 일단의 현대그룹 관계자들이 MBC를 방문합니다. PD수첩이 재벌의 황제경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대로서는 다급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취재 협조 요청을 그렇게 거부했는데도, 기어코 보도한다고 하니, 부랴부랴 '공식 답변'이라도 전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멈췄으면 좋았을 것을, '오버질'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디어오늘>을 보면 그들의 '부탁'은 이랬습니다.
지난 일을 왜 들춰내느냐. 보도하지 말아달라. 취재내용이 뭐냐? 좀 보여달라. 아니면 보도 수위라도 낮춰 달라. 그래도 통하지 않자, 돈 봉투까지 건네려고 했다는 것이 <PD수첩>의 주장이었습니다. 물론 현대그룹 측에서는 이를 부인했습니다. 방영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것까지는 인정했지만, "전혀 듣지 못한 이야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반박했습니다.
당시 PD수첩 측 '증언'은 구체적입니다. 이우환 PD는 <미디어오늘>을 통해 "현대 측 관계자가 답변서를 담은 노란 서류봉투 안에 1cm 두께 흰 봉투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해 돈 봉투라고 직감하고 받지 않았다"면서 "봉투 받기를 거부하자 현대 측 관계자는 수 차례 다시 권유했으나 끝까지 거부하자 서류 봉투에서 답변서만 건네 주고 돌아갔다"고 밝혔습니다. 9년 전 오늘, 있었던 일입니다.
PD수첩 이춘근 PD, MBC 촬영화면 Photo 오마이뉴스 권우성
다만 PD수첩팀에게는 이 정도 사건, '새 발의 피'만도 못할 겁니다. 짐작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만, '날이 날인만큼', <PD수첩> 역사를 돌려보니 확실히 그랬습니다. 당초 오늘의 언론사(言論史)로 <PD수첩>을 한 번 '진하게' 다루고 싶었던 날은 5월 8일이었습니다만. 이 정권은 그때까지 기다려줄 줄 모르네요. 그만큼 PD수첩 '숨통'을 빨리 끊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 이유를 'PD수첩 잔혹사'를 살펴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1990년 5월 8일, 첫 방부터 '잔혹사'로 출발합니다. '하필' KBS 사태와 겹친 것이 문제였는데요. KBS 노조가 '서기원 낙하산 사장' 반대 투쟁에 나서고, 여기에 MBC 노조가 동참하니, PD수첩 소속 PD들도 제작 거부에 들어갑니다. 원래 2일 방영 예정이었던 <PD수첩> 첫 방송이 일주일 미뤄진 '사연'입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이랬으니, 회사 경영진에게 완전 찍힌 꼴이 됐습니다. 당장 그 해 9월에는 UR 협정으로 피폐해진 농촌 현실을 다룬 '그래도 농촌은 포기할 수 없다'가 남측의 치부를 드러낸다는 이유로 당시 사장에 의해 방영이 무기한 연기됩니다. 할 말을 하기 위해 '내압'과 먼저 맞서야 했던 셈이지요.
어느 정도 회사 안에서 '입지'를 구축한 다음 상대는 '종교'였습니다. 1993년 할렐루야 기도원을 시작으로, 다음 해에는 영생교 비리를 고발합니다. 특히 1999년에는 '목자님, 우리 목자님' 때문에 만민중앙교회 신도들이 MBC에 난입, 방송을 중단시키고 PD를 폭행하는 사건까지 일어납니다.
황우석 사건 당시 서울신문 만평
허나 <PD수첩>은 결코 '쫄지' 않았습니다. 2000년에는 광림교회 등 대형교회 비리와 문제점을 고발했고 이에 기독교계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MBC 시청거부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요. 대기업과 언론재벌 그리고 사학재단과도 맞섰습니다. 덕분에 그로 인한 '훈장'도 하나하나 늘어났습니다.
1998년 4월 '위기의 한국신문, 개혁은 오는가'로 재벌언론을 비판합니다. 삼성은 광고중단으로 '복수'합니다. 다시 2000년에 '족벌은 영원하다' 방영, 다시 삼성은 '파바로티 공연' 협찬을 취소하지요. 2001년에는 26억 짜리 소송을 당하는 일까지 일어납니다. '로비에 흔들리는 사립학교'로 비리재단 문제를 제기하니까, 전국 521개 사학재단이 일제히 들고 일어난 결과였죠.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발 프로그램으로 입지를 구축한 <PD수첩>. 이제는 '감히' 정부와 본격적으로 맞서기 시작합니다. 그 시기가 '하필' 2004년쯤이었다는 것, 노무현 정부의 '비극'이라면 '비극'이었지요. 5년 내내 트집잡기에 혈안이 돼 있었던 조중동보다 훨씬 더 '강펀치'를 많이 날렸으니까요.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든 2005년 황우석 보도가 대표적입니다. 바로 다음해에는 '론스타와 참여정부의 동상이몽'을 통해 한미FTA 반대 여론을 들끓게 하지요. 뿐인가요. 동원호 피랍사건 문제점과 그 실상을 김영미 독립PD를 통해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외교부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던 일도 아직 생생합니다. 와중에 <PD수첩>이 어떤 '벌'을 받았는지 굳이 다시 소개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PD수첩 잔혹사
1990년 05월 KBS 사태, 제작거부 동참으로 인한 첫 방영 연기
1990년 09월 UR 농촌문제 고발하자, 남측 치부 드러낸다며 사측이 방영 취소 압력
1993년 02월 왜 자꾸 5.18을 끄집어 내냐며 폭발물 위협협박
1993년 04월 기도원 의혹을 제기했다고 할렐루야 기도원 신도 5천여명이 MBC를 항의방문
1994년 02월 탁명환씨 피살사건. 영생교 비리 고발했다고 신도로 추정되는 이들이 위협협박
1996년 07월 치과의사 살인사건 취재 도중 법정 장면 촬영으로 재판부 법적 대응 항의
1996년 11월 훈장공화국 편. 서훈 문제 취재, 총무처 항의방문. 이어진 회사의 제작중단 압력
1997년 02월 개정노동법 무엇이 문제인가 편. 날치기 파동 다루려하자 회사에서 제작중단 압력
1998년 04월 위기의 한국신문, 개혁은 오는가 편. 재벌언론을 비판하자 삼성이 광고 중단 조치
1998년 11월 오보, 그 진실을 밝힌다 편. 이승복군 보도에 의문을 제기하자 유족이 소송 제기
1999년 05월 목자님, 우리 목자님 편. 만민중앙교회 신도들 MBC에 난입·폭행·방송 중단
2000년 05월 족벌은 영원하다 편. 족벌재벌 비판하자 삼성이 파바로티 공연 협찬 취소
2000년 12월 한국의 대형교회 편. 기독교계가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 MBC 시청거부운동
2001년 03월 로비에 흔들리는 사립학교 편. 이번에는 521개 사학재단이 26억짜리 소송 제기
2002년 11월 웃돈 50조, 소비자가 봉인가 편. DTV 전송방식 비판하자 정보통신부 소송 제기
2003년 01월 음지의 절대권력 국가정보원 편. 국정원 직원이 PD를 폭행
2004년 03월 친일파는 살아있다 2편. 17대 총선 영향 미친다는 이유로 방송위가 제작진 징계
2004년 04월 철저 해부 이종기 리스트 편. 대전법조비리 보도로 이종기 변호사 PD 상대 소송
2004년 07월 송두율과 국가보안법 편. 법원이 공문으로 문제 제기, 회사측이 제작 중단 지시
2005년 11월 아...황우석. PD수첩을 죽여라!
2006년 09월 조국은 왜 우리를 내버려두는가 편. 동원호 피랍사건 보도로 외교부 소송 제기
2007년 02월 삼성공화국, 언론은 침묵하라 편. 시사저널 사태, 금창태 사장 소송 제기
2007년 04월 취재도 안 했는데 하나님의 교회 신도 500명이 MBC 항의 시위
2007년 10월 위기의 조계종, 그 청정의 길은 편. 조계종 소속 승려 방송 내지 말라 소송 제기
2008년 04월 아...광우병. 청와대 민형사소송 방침 공표. 농식품부 수사 의뢰
너무 무서우니까 … '퍽치기'를 해서라도, '개'를 동원해서라도
어떻습니까. 굵직굵직한 이슈만 꼽아봤는데도, 거의 한 해에 한 번 꼴로 일어납니다. 생각해보니 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회사와 싸우더니, 그 다음에는 종교 나아가 족벌언론·족벌재벌, 그리고 정부와 사법부에 이르기까지 … '고발 성역'을 넓혀나갔으니까요. PD수첩의 역사, 참으로 치열한 '잔혹사'임에 분명합니다.
더욱 '독한 것'은 이렇게 숱한 내압·외압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한 불방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반드시 끝장을 봤다는 것,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권력자들로서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니 어떻게든 '숨통'을 끊고 싶은 겁니다. 무서우니까. '퍽치기'를 해서라도, 집을 뒤져서라도, '개'를 동원해서라도.
그렇다면 <PD수첩>이 무서워하는 건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자기 자신, 할말을 하지 못하는 방송입니다. 이는 1998년 2월 방영한 '방송문화,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성의 광고 중단을 불러온 '위기의 한국신문, 개혁은 오는가'를 방영하기 전, '자기비판'을 한 것이었죠.
말 그대로 철저한 '고해성사'였습니다. 방송사의 무분별한 시청률 경쟁을 비판했습니다. 정권과 재벌의 외압으로 굴절된 방송 사례를 담당 PD와 기자들의 입을 통해 고백했습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에 MBC가 어떻게 했는지도 낱낱이 '고발'했습니다. 일찍이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도 볼 수 없었던 냉엄한 '자기비판'이었습니다.
2006 MBC 창사기념 '아름다운 만남 45년' 사진전의 엄기영 '기자' Photo MBC
그 결론은 이랬습니다. 방송의 독립성을 지키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 방송인 자신의 책임이 크다. 방송이 정권으로부터 독립돼 있지 않으면 권력과의 유착은 반드시 일어난다. 방송이 독립성을 갖기 위해선 시청자의 감시와 비판이 필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 MBC가 되새겨야 할 '결론'입니다. 몰상식한 정권이 압수수색을 빌미로 MBC에 쳐들어갔습니다. 신경민 앵커와 김미화님을 갈아치우려 한다고 합니다. 엄기영 사장은 심사숙고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PD수첩 잔혹사'도 반드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시 <PD수첩> '고해성사'에 '엄기영 정치부장'이 동참했다는 사실 또한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엄 사장님, 그 때 당신의 결론은 이랬습니다. "시청자의 압력을 받아들여 시청자와 방송간 상호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시청자의 압력보다 권력으로부터의 압력을 더 받아들였다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방송의 독립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많은 희생 끝에 얻은 이 귀한 '결론', 당신의 '고해성사'를 내팽개치지 않기 바랍니다.
지난 번 'MBC 노조 비상총회'에서 김보슬 PD Photo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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