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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컬럼,글

한글날이 국경일 아니라도 한글을 하나씩이라도 살려 쓰는 노력은 해라!

by skyrider 2010. 10. 9.

'힌트' 대신 '귀띔', '휴게소' 대신 '쉼터' 어때요?
[아이들과 함께 하는 행복 4] 564돌 한글날을 맞이하면서
10.10.09 15:20 ㅣ최종 업데이트 10.10.09 15:20 정호갑 (mos0805)

얼마 전 EBS 10주 완성으로 언어영역 비문학 지문을 수업 할 때이다. 지문의 내용을 간추리면, 위법성조각사유가운데 하나로 긴급 피난이라는 것이 있는데 긴급 피난은 이러이러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각(阻却)'이란 낱말이 걸렸다. 사전을 찾아보니 '방해하거나 물리침'이라고 되어 있다. 이 낱말을 아이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아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조각이란 낱말을 설명해 주고 다시 물었다. 이 법률 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어 보면 무엇이라 바꿀 수 있는가?

 

아이들은 머뭇거리면서 여러 가지 답변을 내놓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와 닿은 것이 위법성인정사유였다. 법을 어긴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사유로 긴급 피난이라는 것이 있다. 모든 사람이 다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물었다. 이렇게 바꾸자고 하면 법조계에서 바꿔줄 것 같은가? 아이들은 법조계의 권위 때문에 바꿔주지 않을 것 같다고 한다. 사실 위법성조각사유를 위법성인정사유로 바꿔도 괜찮은지는 법률 전문가가 아닌 사람으로서 판단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법률 용어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 많고 그것을 쉽게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은 해 왔다.

 

학교에서 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머리나 마음 가운데 그 어느 하나라도 좋으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중요한 어떤 상황에서 바른 판단으로 자신은 물론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고, 마음씨가 좋은 사람은 자기보다는 못한 사람에 대한 배려를 하기에 사회가 따듯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머리가 나쁜 사람은 그럴듯한 거짓으로 남을 속아 넘겼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남은 속아 넘어가지 않았는데 속아 넘어 갔다고 믿는 사람이고, 마음씨가 나쁜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아직은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 놓이지 않았기에 머리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고, 적어도 마음씨만은 좋게 가져달라는 부탁도 덧붙인다.

 

오늘 564돌 한글날을 맞이하여 모두들 한글의 우수성을 이야기하고 외래어가 넘쳐나고 있음을 꼬집는다. 하지만 정말 잊지 않고 되새겨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세종대왕은 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훈민정음을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므로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나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드신 것은 가진 것 없고 힘없는 백성들을 헤아리는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세종대왕의 그 마음을 곰곰이 되새겨보면 걸어갈 길이 보인다. 그 첫걸음이 바로 말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닐까? 더불어 살고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헤아리는 아름다운 마음은 바로 쉬운 말에서 나온다.

 

말은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전달하는 단순한 도구만은 아니다. 사람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됨을 헤아려 볼 수 있다.

 

괜히 어려운 말을 쓰는 사람은 좀 잘난 체 하는 사람이거나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사람일 것이고, 말을 얼버무리는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일 것이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마구잡이로 살아가는 사람일 것이다.

 

이와는 달리 말을 쉽게 쓰는 사람은 남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는 속이 깊은 사람일 것이고, 바른 말을 쓰는 사람은 바른 사람일 것이고, 고운 말을 쓰는 사람은 마음씨가 따듯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밝고 바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하여 바르고 쉽고 고운 말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아야 할 것이다.

 

'밥집 - 식당 - 레스토랑'에서 받는 느낌은 어떠한가? 똑 같은 곳을 뜻하는 말들이지만, 그 낱말들에서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는가? 우리에게 가고 싶은 곳을 고르라고 하면 사람들은 과연 어떠한 곳을 고르겠는가? 우리의 말이 이렇게 무시당하면서 틈이 생겨나면 밝고 바른 사회로 나갈 수가 없다.

 

우리 사회나 학교에서 우리말 가운데 살려 쓰길 바라는 말 몇 가지를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골라 보았다.

 

- 걸림돌

장애물이라는 낱말을 대신하여 쓰는 말이다. 뜻도 뚜렷하고 발음도 좋다.

 

- 귀띔

어느 날, 글을 쓰면서 '힌트'라는 외래어 대신에서 우리말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떠오르지 않아 이리저리 헤매기만 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사전을 펼쳐 보았다. 그 때 '귀띔'이란 낱말을 보고서 얼마나 기뻤는지. 알려고 애쓰는 모습, 살짝 가르쳐 주기 위해 귀띔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는가? 바로 그 모습이 교육이라는 생각이 든다.

 

- 따라잡기

벤치마킹은 '경쟁 업체의 경영 방식을 면밀히 분석하여 경쟁 업체를 따라잡는 경영 전략'이라는 말이다. 바로 알아들을 수 있고 따라잡고자 하는 마음도 새록새록 돋아나게 한다.

 

- 뒤침

번역이라는 낱말을 대신하여 쓰는 말인데 뜻이 고스란히 와 닿아서 좋다. 조금만 노력하면 한자어 대신해서 아름다운 우리말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 낱말이다.

 

- 뜻매김

정의(定義)라는 낱말을 대신하여 쓰는 말이다. 발음도 좋고 뜻도 뚜렷이 잡혀진다. 아울러 개념(槪念)이란 말 대신에 뜻넓이라는 말도 널리 쓰이길 바란다.

 

- 말길

말이 돌아다니는 길, 곧 소문이라는 낱말을 대신하여 쓰는 말인데 뜻을 재미있게 살렸다.

 

- 쉼터

휴게실이라는 말을 우리말로 잘 바꾼 보기라 할 수 있는 말이다. 지친 몸을 잠깐 쉬는 곳으로 딱 들어맞는 말이다.

 

- 흠

하자라는 낱말을 대신하여 쓰는 말이다. 흔히 한자어를 우리말로 바꾸고자 할 때 낱말의 길이로 문제를 삼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는 짧고 뜻도 뚜렷하여 하자라는 말을 버리고 흠이 널리 쓰이길 바란다.

 

외래어 대신 새로운 말을 만들고, 숨어 있던 말들을 찾아내고, 이렇게 만들고 찾아낸 우리말들을 살려 쓸 수 있도록 애쓰는 우리의 노력, 그 노력이 우리 사회를 밝고 바른 사회로 이끄는 첫 걸음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