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며, 영화는 1월 20일 개봉했습니다.
작가주의 독립영화와 다큐멘터리의 창구 역할을 하는 대표적 영화제는 선댄스 영화제입니다. 선댄스 영화제가 대중적인 지명도를 갖게 된 계기는 배우이자 감독인 로버트 레드포드가 선댄스 재단을 설립하면서 부터입니다. 영화제의 이름인 선댄스는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레드포드가 맡은 역할인 선댄스 키드에서 따왔으며, 이후 선댄스 영화제 출신의 감독을 '선댄스 키드'라고들 부릅니다.
'자유롭게 사고하며 인디 영화들을 장려 육성한다'는 그 선댄스가 26회를 맞아 여성감독 데브라 그래닉이 연출한 <윈터스 본>을 주목했습니다. 마약과 빈곤에 찌든 공동체의 차가운 시선을 맞받으며 빈곤의 공포에 처절하게 맞서는 한 소녀의 생존을 그린 영화에 선댄스는 심사위원 대상과 각본상을 안겼습니다. 영화는 경제위기 이후 미국사회를 기저로부터 뒤흔드는 빈곤에 대한 '섬세한' 성찰을 섬뜩하리만치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17살 소녀의 눈으로 고발한 세계 최강국 미국의 빈곤
미국 미저리주 남서부 오자크 산간마을의 17살 소녀 리 돌리(제니퍼 로렌스). 어느 날, 마약 제조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아빠가 낡은 집을 담보로 보석금을 낸 뒤 종적을 감춥니다. 보안관은 재판 당일 아빠가 법정에 출두하지 않으면 모든 걸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졸지에 정신지체 엄마와 어린 두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소녀가장이 된 돌리는 아빠의 실종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비밀투성이인 마을의 빗장을 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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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지에 집을 잃고 길거리로 내쫓기게 된 돌리가 큰아버지 티어드롭과 함께 행방이 묘연한 아빠를 찾아 밤길을 걷고 있다. |
ⓒ CJ 엔터테인먼트, CJ CG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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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까운 친척은 물론 이웃들마저 돌리를 외면합니다. 큰아버지 티어드롭(존 호키스)은 도움을 요청하는 돌리의 머리채를 잡고 목을 움켜 쥔 채 "노우"라고 말합니다. 옆집에 사는 외삼촌은 아빠를 마지막으로 본 곳이라며, 돌리를 마약 제조하다 불에 타 재만 남은 헛간으로 데려 갑니다. 하지만 삼촌이 데려간 곳은 불탄지 1년이나 지난 곳입니다.
아빠의 행적을 쫓을수록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점점 차갑게 굳어져 갑니다. 보석청구인은 남은 기간은 일주일이라며 최후통첩을 하고, 돌리는 아빠가 죽은 뒤 돼지 똥 무더기가 됐을 거라며 차갑게 응수합니다. 이윽고 아빠의 죽음을 증명하기 위한 돌리의 마지막 추적은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파르게 치닫습니다.
<원터스 본>은 미국 영화의 단골메뉴인 '영웅주의'이나 '화목한 가족'과는 선을 긋습니다. 오히려 영화는 할리우드가 애써 외면했던 절대적 빈곤과 그로 인한 가족의 붕괴에 카메라 앵글을 맞춥니다. 세계 금융위기를 전후로 미국사회를 지탱했던 중산층이 붕괴되어 어떻게 도시빈민으로 전락하면서 '가족'의 해체가 촉진되는 지를 돌리의 시선을 쫓아 가시화합니다.
아울러 영화는 사회안전망에서 외면당한 미국의 도시빈민들의 생존의 법칙을 마약과 공동체의 폭력을 매개로 스크린에 조명합니다. 마을은 마약에 찌들어가고, 어른들은 피폐해진 공동체의 규율을 유지하기 위해 침묵의 카르텔을 강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트리는 사람은 누구든지 제거합니다. 그렇게 영화는 '빈곤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세계 최강국 미국을 17살 소녀의 눈을 통해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돌리는 두 동생을 학교에 데려다 주기 위해 차를 빌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또래 친구들의 공부하는 모습은 부러울 뿐입니다. 그래도 돌리는 당차고 다부집니다. 아빠의 실종으로 직면한 일용할 양식 앞에서도 비굴하지 않습니다. 외삼촌 부부가 사슴고기를 손질하는 것을 본 남동생이 주린 배를 움켜쥐며 침을 삼키자 "먼저 권하기 전에 절대로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며 단단히 못을 박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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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존을 위해 동생들에게 총 쏘는 법을 가르친 돌리는 다람쥐를 사냥해 저녁거리를 대신한다. |
ⓒ CJ 엔터테인먼트, CJ CG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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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돌리는 동생들이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도록 총 쏘는 법을 가르칩니다. 동생들과 함께 나선 사냥에서 돌리는 다람쥐 몇 마리를 잡습니다. 남동생에게 다람쥐 가죽 벗기는 법을 전수하려고 하지만 무섭다며 한사코 뒷걸음칩니다. "앞으로 살다보면 이보다 더 무서운 일 천지"라며 동생의 손을 잡아끈 돌리는 익숙한 솜씨로 가죽과 내장을 발라냅니다.
외삼촌이라는 작자는 남동생을 입양하겠다고 나섭니다. 여동생은 사절입니다. 말먹이에 장작패기 등 그나마 노동력을 갖췄기 때문입니다. 온 몸에 피멍이 들게 린치를 당하고, 굶주려도 끝내 눈물을 비추지 않던 돌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두 눈을 치켜뜬 채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합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 헤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돌리의 이런 일상은 우리네 소년소녀가장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음습한 잿빛이 차갑게 내려앉은 집에서 겹겹이 옷을 껴입고 추위를 이겨내며 다람쥐고기를 먹는 돌리나 혹한의 겨울에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 낮에는 동생들과 대형서점이나 마트에 가 꽁꽁 언 몸을 녹인뒤 시식코너에서 점심을 때우는 우리네 소년소녀가장과 닮은꼴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 5명중 1명꼴로 무료급식을 받는 미국 사회와 한시적 생계구호비 4181억 원, 저소득층 에너지보조금 903억 원, 결식아동 급식지원금 541억 원과 연탄보조금을 전액 삭감당한 채 절대적 빈곤으로 내몰리고 있는 한국 사회의 소년소녀가장이 닮은꼴인 것처럼.
빈곤의 탈출구, 자원 입대
영화는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폭력을 절제의 미학으로 표현합니다. 유혈 낭자한 폭력과 사지를 찢어발기는 고어 장면이 없어도 숨통을 죄어오는 긴장과 공포는 관객들로 하여금 '빈곤이 낳은 폭력'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지를 절감케 합니다.
아빠의 주검이라도 찾기 위해 마을의 리더인 밀튼의 집을 방문하지만 돌리는 창고로 끌려가 이가 부러질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고 기절합니다. 정신을 차린 돌리에게 밀튼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하고, 돌리는 남은 가족들이 개처럼 내팽개쳐지지 않으려면 아빠의 주검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때 마침 티어드롭이 나타나 입을 함부로 놀리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 구사일생 살아납니다.
돌리가 살아 날 수 있었던 것은 티어드롭의 맹세 즉, 한 치라도 마을의 비밀이 세어나갈 경우 어떤 대가도 감수하겠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티어드롭은 돌리에게 비밀의 한 자락을 털어 놓으며 돌리의 아빠 찾기에 제동을 겁니다.
생존과 생존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살벌한 현실에서 돌리의 마지막 선택지는 강도질을 하거나 자원입대하는 것뿐입니다. 해병대 모병소를 찾은 돌리는 자원 입대에 4만 달러라는 거액이 걸린 것을 다시 확인합니다. 하지만 미성년자는 부모의 서명이 필요하다는 난관에 봉착합니다. 가족을 살리기 위한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진 돌리의 뒤로 가난에 찌든 젊은이들이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습니다.
'빈곤 대국' 미국의 밑바닥을 가로지르는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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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튼의 아내와 함께 배를 타고 호숫가에서 수장된 아빠의 주검을 찾고 있는 돌리는 평생 잊지 못할 충격에 직면한다. |
ⓒ CJ 엔터테인먼트, CJ CG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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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가진 거라곤 사지육신 밖에 없는 돌리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충격적인 결말을 선사하며 엔딩 크레딧을 올립니다.
돌리의 숨통을 짓누른 공포는 이웃사촌들의 차가운 눈빛도, 무자비한 린치도, 가난한 친척들이 몇 푼 건네줄 때의 모멸감도 아닙니다. 그것은 미국 인구의 14.3%인 4천 290만 명이 절대적 빈곤에 허덕이고, 영화의 무대인 미주리주의 빈곤율이 미국의 평균 빈곤율인 15%(2009년 현재)에 근접한 14.6%에 이를 정도로 미국 사회에서 공포의 대상이 된 '빈곤의 공포'입니다.
그것은 또한 미국인 8명 중 1명꼴인 3700여만 명이 굶주림으로 인해 비상식량을 지원 받고, 이중 1730만 명이 주기적으로 끼니를 거르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5명중 1명이 돈이 없어서 병원에도 못가며, 장기실업자는 880만 명을 넘어서고, 무디스가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될 소지가 다분하다고 경고하고, 재정 적자로 파산에 직면한 주정부들이 갚아야 할 이자만 13억 달러에 이른 '빈곤 대국' 미국의 공포에 다름 아닙니다.
영화는 그런 미국을 그나마 지탱해 온 '가족'의 도덕성마저 흔들리고 있다며 레드카드를 꺼내 듭니다. 반면에 미국식 삶을 국가적 표준으로 삼기 위해 안달이 난 한국 사회의 주류와 조중동은 야당과 시민사회단체의 보편적 복지론을 씨알도 먹히지 않는 허튼소리라며 포퓰리즘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먹고, 어떻게 죽어가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의지이며, 신자유주의 시장을 왜곡하는 어떠한 감언이설도 용납할 수 없다며 벼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돌리의 두 눈에 박힌 공포가 사실은 신자유주의가 휘두른 폭력의 찌꺼기라고. 자유의 여신상과 하늘을 찌르는 맨해튼의 마천루가 사실은 빈곤의 공포로 인해 밑바닥에서부터 균열이 가고 있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