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일보 편집국장이 거리로 나선 이유는
한겨레 입력 2012.10.19 20:20 수정 2012.10.19 22:10[한겨레][토요판] 커버스토리아, 부산일보
'해고' 편집국장 이정호씨 인터뷰
그날 윤전기 앞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 건너
▶ <부산일보>는 웬만한 중앙일간지 못지않은 발행부수와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 신문의 편집국장이 거리를 헤매고 있다. 인터뷰 도중 이정호 부산일보 편집국장은 1988년 단협에 명시된 '편집권 독립 조항'을 또렷이 기억해내곤 외우기 시작했다. "편집권 독립은 외부나 경영진의 부당한 간섭과 압력으로부터 침해받지 아니하고, 독자들의 알권리와 사회정의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
책상을 빼앗긴 '거리의 편집국장' 이정호
정수장학회에 치이는 이 신문의 미래는…
이정호 편집국장은 지난 7월 <부산일보>를 나와 '거리의 편집국장'으로 살고 있다.
부산일보 현관 앞에 책상을 차리고 앉아 있다가 9월엔 서울시 태평로 언론회관 앞으로 이사왔다. 이정호 편집국장을 지난 18일 오전 부산시 수정동 부산일보사 앞에서 만났다. 부산일보 건물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왜 들어가지 못합니까?
"들어가면 벌금 100만원을 내야 하거든요. 회사가 출입금지 및 업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놓았어요."
이 국장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부산일보 건물에서 사원들이 몰려나왔다. 사원들은 이 국장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국장님" "잘 있었어?"
부산일보의 소유주인 정수장학회가 민간 기업에 비밀리에 매각을 추진한 사실이 최근 드러나면서, 국내 최대 지방일간지인 부산일보가 기로에 서게 됐다. 군부정권이 강탈한 신문사를 원래 소유주에게 반환하지 않고 그대로 운영해도 되는가? 유력한 대선 후보와 관련된 신문사가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논란의 한가운데를 이정호 편집국장이 뚫고 왔다. 한때 이사장을 맡았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조만간 정수장학회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로 한 상태여서, 이에 따른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결정에 따라 부산일보의 미래가 결정될 전망이다.
부산일보는 지난해 11월30일 창간 66년 만에 초유의 발행 중단 사태를 겪었다. 오전 11시 경영진의 신문 제작 중단 명령이 떨어졌고 인쇄를 기다리던 신문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날 신문은 '부산일보 사태'를 다룰 예정이었다.
노사 대립은 이 일을 전후로 극으로 치달았다. 경영진은 이정호 편집국장에게 대기발령을 내렸다. 하지만 기자들은 이 징계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 국장도 반년 이상 대기발령 상태에서 출근해 신문을 만들었다. 회사는 올해 정치·사회·편집부장도 타 부서로 인사 조처를 내렸으나, 이들은 원래 부서에서 취재·편집을 지휘하고 기자들 또한 이를 따르는 중이다.
-부산일보 발행 중단 사태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지난해 11월18일이 시발이었어요. 신문 발행이 두 시간 늦어졌죠. 그걸로 이호진 노조위원장이 면직(해고)되고 나도 징계위에 회부되고…."
부산일보 노조는 당시 전국언론노조와 함께 언론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의원에게 정수장학회의 사회환원을 요구했다. 부산일보 기자들은 이를 취재하고 이 국장과 편집간부들은 1면 사이드 기사로 배치한다. 신문 발행 직전 이 기사의 게재 사실을 알게 된 경영진은 삭제를 요구한다.
-회사에서 정수장학회 문제를 다룬 기사를 실을 수 없다고 했는데요, 어떻게 했나요?
"독자들의 알권리가 있기 때문에 보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쪽이 기사의 절반 분량으로 정수재단(정수장학회)의 반론을 넣자고 제안했습니다. 내가 답했죠. 그렇게 써주는 기사는 없다고. 그러니까 제목에서만 정수재단을 빼자고 하더군요. 제목 바꾸는 거나 기사 바꾸는 거 똑같다, 못 한다, 했죠."
"국장님, 책상이 없어졌습니다"
결국 '부산일보 노조, 정수재단 사회환원 촉구'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간다. 이어 11월30일에도 비슷한 상황이 재연된다. 28~29일 부산일보는 징계위원회를 열어 이호진 위원장의 해고를 확정하고 이 국장 또한 징계위원회에 회부한다.
-이 역시 신문에 실릴 예정이었죠?
"그때 사장이 더는 못 참는다면서 자회사 사장들까지 불렀어요. 그리고 '이런 기사 나가는 신문은 발행 못 한다' '앞으로도 안 낼 거다' '오늘 신문 내지 마' 한 거죠. 기사 출고를 다 마치고 윤전기만 돌리면 될 때였습니다. 돌발 상황이었죠."
제작은 중단됐다. 결국 11월30일치 제20861호 부산일보는 결호된다. 부산일보 누리집에는 '본사 내부 사정으로 신문 발행과 인터넷 뉴스 제공을 하지 못했습니다'는 사과문이 뜬다.
"경영진이 기사 맘에 안 든다고 신문 안 찍은 건 아마 처음일 겁니다. 사원들이 경악했죠. 이런 사태가 반복된다면 미래에 위기가 다가올 거라 생각한 거죠."
다음날에도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기자들은 전날 발행 중단 사태에 대한 기사를 써서 올렸다. 하지만 이날 사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역시 발행 중단 지시가 내려졌을 텐데요.
"마찬가지 상황이었죠. 윤전기 돌리기 전에 '기사 빼라' '안 된다'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경영진이 윤전실에 내려와서 안 된다고 하고, 조합원들이 막고… 그 와중에 노조위원장이 윤전기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윤전기가 덜컹덜컹 돌아가자 잉크 냄새가 퍼졌다. 윤전기가 뱉은 부산일보 12월1일치 1면 머리기사는 '부산일보 제2의 편집권 독립운동'이었다. 적어도 이날 부산일보 편집국은 '완전한 독립'을 구가했다.
이 국장에게는 11월18일의 일로 대기발령 조처가 내려진다. 대기발령이 6개월 지속되는 동안 구제조처가 없으면 해고다. 그래도 이 국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편집국장 자리로 출근해 일했다. 편집국 기자들도 이 국장의 지시를 받고 일했다.
"지난 4월인가요? 새벽에 출근하는데, 사회부장이 전화 와서 '국장님 책상이 없어졌습니다' 하는 거예요. 폭탄 맞은 듯 내 자리만 비었더라고. 밤새 책상을 들고 가 버린 거야. 책상 하나를 빌려와서 근무했어요. 그런데 열흘 뒤 또 책상을 치웠더라고. 허허."
-전화와 컴퓨터는 안 치웠나요?
"전화는 이미 지난해 11월부터 끊어서 휴대전화로 업무 봤어요. 컴퓨터는 옆에서 빌려오고."
이 국장은 회사가 제기한 '업무금지 및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인 지난 7월 편집국에서 쫓겨난다. 반년 이상을 회사가 인정하지 않는 편집국장 밑에서 기자들이 일한 것이다.
이정호 편집국장은 1988년 부산일보에 입사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입사하자마자 언론 자유를 만끽한 세대"였다. 1980년대 후반 언론민주화 운동의 열풍은 부산일보에도 몰아친다. 부산일보 노동자들은 1988년 엿새 동안의 총파업을 단행해, 편집권 독립 조항과 노조가 편집국장 후보를 추천해 사장이 임명하는 '편집국장 3인 추천제'를 쟁취하는 데 성공한다.
경영진은 왜 새 편집국장을 임명 못했나
-편집국장에 취임한 건 언제죠?
"2010년 12월. 2년 임기죠. 지난해 한진중공업 사태는 우리가 잘 다뤘어요. 4대강 사업, 고리원자력발전소 등도 다뤘고요. 우리 아니면 (지역에서) 목소리 낼 곳이 없어요. 처음 1년은 회사에서 이런저런 요구가 있었어요. 기관장 비판 기사 나오면 말 나오고. 그런 기사들이 못마땅한 거지. 하지만 내가 (경영진의 요구를) 쳐낼 수준이어서 크게 불거지진 않았어요. (경영진이) '기사 왜 나가냐'고 하면 내가 '알겠습니다' 하고는 그냥 쓰고 그랬거든요."
-재단은 지면에 대해 직접 간섭하지 않았나요?
"직접 연락받은 적은 없어요. 보통 재단은 사장과 연락하고 그런 입장이 저에게 전달되곤 하죠. 부산이 3당 합당 이후 여권 일색이 되어버렸어요. 지역사회 기득권층도 견고해졌고요. 이에 대한 비판들이 필요한데 경영진은 우리가 야당 편을 든다고 합니다.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우리를 '빨갱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최 이사장이 오래전부터 갈망한 게 편집국장 3인 추천제를 없애는 거였어요. 그래야지 마음에 맞는 사람(편집국장) 임명하고 지면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지속적으로 요구를 해왔습니다."
-노조위원장 해고 같은 회사 내부 문제를 신문에 싣는 게 바람직합니까?
"개인 간의 문제라면 보도할 필요가 없죠. 하지만 부산일보를 누가 소유하는 게 적절한가는 공적인 문제입니다. 부산일보 노조뿐만 아니라 전국언론노조도 사회환원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했어요. 다른 공적 문제는 보도하면서 부산일보에 관한 공적 문제를 보도 못 한다면 결국 어디까지 올라가겠습니까? 박근혜까지 올라갑니다. 나중에 박근혜 사진을 1면에 올리라고 할 때 선택의 기로가 생길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근혜 대선 후보가 정수장학회 이사장일 때는 지면에 대한 간섭이 없었습니까?
"박 후보가 1995~2005년 이사장을 했습니다. 1998년 대구에서 당선되고 정치를 시작했으니, 그때만 해도 박 후보는 부산을 기반으로 한 우리 신문과 부딪힐 일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2004년에 한나라당 대표가 됩니다. 그때부터 정수장학회와 부산일보 문제가 불거집니다. 노조 산하 공정보도위원회도 신문에 '박근혜가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기 시작했고요."
-최필립 이사장과 이진숙 <문화방송> 기획홍보본부장 등의 대화록을 통해 부산일보를 비밀리에 민간에 매각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요.
경영진 맘에 안 든다고 발행 중단
다음날 그 사태를 기사화하자
경영진 또 윤전실에 와 "기사 빼라"
"빼라" "못 뺀다" 실랑이하다
노조위원장이 윤전기 스위치 눌러
2004년 박근혜 한나라 대표 된 뒤
장학회-부산일보 사태 불거져
편집국장 추천제를 없애는 걸
최필립은 오랫동안 갈망
최필립 퇴진만으론 해결 안돼
정수재단 해체해 공익법인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요구하고 싸웠는데, 결국 저분의 머릿속에 든 건 자기 생명 유지하면서 시끄러운 건 분리하면 된다는 것이었으니… 허탈했습니다. 특정 기업에 팔아넘기면 부산일보는 기업의 방패막이가 됩니다. 문제가 더 커집니다."
-박근혜 후보가 조만간 입장을 밝힌다고 합니다.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첫째, 정수재단 해체하고 공익법인을 만들어 지역 상공계, 학계, 시민단체, 언론계 등의 덕망 있는 인사로 이사진을 구성하는 방법입니다. 둘째, <한겨레>처럼 국민주 방식이나 우리사주 방식도 검토할 만하고요. 중요한 원칙은 공공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소유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정수장학회를 그대로 두고 최필립 이사장만 물러나게 하거나 이사 몇 명을 교체하면 계속 논란을 부를 겁니다."
-부산일보는 1988년 국내 처음으로 편집국장 추천제를 도입한 언론사입니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지금 부산일보의 편집권 독립은 어느 정도입니까?
"기자들의 경각심이 높아졌습니다. 1년 가까이 지면 논조가 변하지 않고 경영진이 새 편집국장을 임명 못 하는 이유는 간부들의 희생과 기자들의 의지 때문입니다."
이 국장의 주요 징계 사유는 '상사 명령 불복종'이다. 첫 대기발령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자 회사는 다시 대기발령 징계를 내렸다. 인터뷰를 한 날은 두번째 대기발령 징계를 받은 지 6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6개월이면 자동해고된다.
인터뷰 막바지 그는 부산지검에 나가봐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회사가 업무방해 혐의로 이 국장을 고소한 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나와달라고 요청해서다. 그는 "대기발령 상태에서도 일을 도와줬는데 무슨 업무방해라고 하는 건지…" 하며 일어섰다.
지금 부산일보의 편집국장은 거리에 있다. 매일 오전 서울 태평로 거리에 나가 농성을 한다. 징계 무효확인소송 등을 내며 법정 투쟁을 한다. 이날 밤 이정호 국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결국 해고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네요. 19일 0시부터랍니다."
부산/남종영 기자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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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 편집국장 이정호씨 인터뷰
그날 윤전기 앞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 건너
▶ <부산일보>는 웬만한 중앙일간지 못지않은 발행부수와 영향력을 갖고 있다. 이 신문의 편집국장이 거리를 헤매고 있다. 인터뷰 도중 이정호 부산일보 편집국장은 1988년 단협에 명시된 '편집권 독립 조항'을 또렷이 기억해내곤 외우기 시작했다. "편집권 독립은 외부나 경영진의 부당한 간섭과 압력으로부터 침해받지 아니하고, 독자들의 알권리와 사회정의를 위해 쓰여져야 한다."
정수장학회에 치이는 이 신문의 미래는…
이정호 편집국장은 지난 7월 <부산일보>를 나와 '거리의 편집국장'으로 살고 있다.
부산일보 현관 앞에 책상을 차리고 앉아 있다가 9월엔 서울시 태평로 언론회관 앞으로 이사왔다. 이정호 편집국장을 지난 18일 오전 부산시 수정동 부산일보사 앞에서 만났다. 부산일보 건물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왜 들어가지 못합니까?
"들어가면 벌금 100만원을 내야 하거든요. 회사가 출입금지 및 업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놓았어요."
이 국장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부산일보 건물에서 사원들이 몰려나왔다. 사원들은 이 국장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지나갔다. "안녕하세요, 국장님" "잘 있었어?"
부산일보의 소유주인 정수장학회가 민간 기업에 비밀리에 매각을 추진한 사실이 최근 드러나면서, 국내 최대 지방일간지인 부산일보가 기로에 서게 됐다. 군부정권이 강탈한 신문사를 원래 소유주에게 반환하지 않고 그대로 운영해도 되는가? 유력한 대선 후보와 관련된 신문사가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논란의 한가운데를 이정호 편집국장이 뚫고 왔다. 한때 이사장을 맡았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는 조만간 정수장학회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로 한 상태여서, 이에 따른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의 결정에 따라 부산일보의 미래가 결정될 전망이다.
부산일보는 지난해 11월30일 창간 66년 만에 초유의 발행 중단 사태를 겪었다. 오전 11시 경영진의 신문 제작 중단 명령이 떨어졌고 인쇄를 기다리던 신문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날 신문은 '부산일보 사태'를 다룰 예정이었다.
노사 대립은 이 일을 전후로 극으로 치달았다. 경영진은 이정호 편집국장에게 대기발령을 내렸다. 하지만 기자들은 이 징계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 국장도 반년 이상 대기발령 상태에서 출근해 신문을 만들었다. 회사는 올해 정치·사회·편집부장도 타 부서로 인사 조처를 내렸으나, 이들은 원래 부서에서 취재·편집을 지휘하고 기자들 또한 이를 따르는 중이다.
-부산일보 발행 중단 사태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지난해 11월18일이 시발이었어요. 신문 발행이 두 시간 늦어졌죠. 그걸로 이호진 노조위원장이 면직(해고)되고 나도 징계위에 회부되고…."
부산일보 노조는 당시 전국언론노조와 함께 언론회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의원에게 정수장학회의 사회환원을 요구했다. 부산일보 기자들은 이를 취재하고 이 국장과 편집간부들은 1면 사이드 기사로 배치한다. 신문 발행 직전 이 기사의 게재 사실을 알게 된 경영진은 삭제를 요구한다.
-회사에서 정수장학회 문제를 다룬 기사를 실을 수 없다고 했는데요, 어떻게 했나요?
"독자들의 알권리가 있기 때문에 보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쪽이 기사의 절반 분량으로 정수재단(정수장학회)의 반론을 넣자고 제안했습니다. 내가 답했죠. 그렇게 써주는 기사는 없다고. 그러니까 제목에서만 정수재단을 빼자고 하더군요. 제목 바꾸는 거나 기사 바꾸는 거 똑같다, 못 한다, 했죠."
"국장님, 책상이 없어졌습니다"
결국 '부산일보 노조, 정수재단 사회환원 촉구'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간다. 이어 11월30일에도 비슷한 상황이 재연된다. 28~29일 부산일보는 징계위원회를 열어 이호진 위원장의 해고를 확정하고 이 국장 또한 징계위원회에 회부한다.
-이 역시 신문에 실릴 예정이었죠?
"그때 사장이 더는 못 참는다면서 자회사 사장들까지 불렀어요. 그리고 '이런 기사 나가는 신문은 발행 못 한다' '앞으로도 안 낼 거다' '오늘 신문 내지 마' 한 거죠. 기사 출고를 다 마치고 윤전기만 돌리면 될 때였습니다. 돌발 상황이었죠."
제작은 중단됐다. 결국 11월30일치 제20861호 부산일보는 결호된다. 부산일보 누리집에는 '본사 내부 사정으로 신문 발행과 인터넷 뉴스 제공을 하지 못했습니다'는 사과문이 뜬다.
"경영진이 기사 맘에 안 든다고 신문 안 찍은 건 아마 처음일 겁니다. 사원들이 경악했죠. 이런 사태가 반복된다면 미래에 위기가 다가올 거라 생각한 거죠."
다음날에도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기자들은 전날 발행 중단 사태에 대한 기사를 써서 올렸다. 하지만 이날 사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역시 발행 중단 지시가 내려졌을 텐데요.
"마찬가지 상황이었죠. 윤전기 돌리기 전에 '기사 빼라' '안 된다'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경영진이 윤전실에 내려와서 안 된다고 하고, 조합원들이 막고… 그 와중에 노조위원장이 윤전기 스위치를 눌렀습니다."
윤전기가 덜컹덜컹 돌아가자 잉크 냄새가 퍼졌다. 윤전기가 뱉은 부산일보 12월1일치 1면 머리기사는 '부산일보 제2의 편집권 독립운동'이었다. 적어도 이날 부산일보 편집국은 '완전한 독립'을 구가했다.
이 국장에게는 11월18일의 일로 대기발령 조처가 내려진다. 대기발령이 6개월 지속되는 동안 구제조처가 없으면 해고다. 그래도 이 국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편집국장 자리로 출근해 일했다. 편집국 기자들도 이 국장의 지시를 받고 일했다.
"지난 4월인가요? 새벽에 출근하는데, 사회부장이 전화 와서 '국장님 책상이 없어졌습니다' 하는 거예요. 폭탄 맞은 듯 내 자리만 비었더라고. 밤새 책상을 들고 가 버린 거야. 책상 하나를 빌려와서 근무했어요. 그런데 열흘 뒤 또 책상을 치웠더라고. 허허."
-전화와 컴퓨터는 안 치웠나요?
"전화는 이미 지난해 11월부터 끊어서 휴대전화로 업무 봤어요. 컴퓨터는 옆에서 빌려오고."
이 국장은 회사가 제기한 '업무금지 및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인 지난 7월 편집국에서 쫓겨난다. 반년 이상을 회사가 인정하지 않는 편집국장 밑에서 기자들이 일한 것이다.
이정호 편집국장은 1988년 부산일보에 입사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입사하자마자 언론 자유를 만끽한 세대"였다. 1980년대 후반 언론민주화 운동의 열풍은 부산일보에도 몰아친다. 부산일보 노동자들은 1988년 엿새 동안의 총파업을 단행해, 편집권 독립 조항과 노조가 편집국장 후보를 추천해 사장이 임명하는 '편집국장 3인 추천제'를 쟁취하는 데 성공한다.
경영진은 왜 새 편집국장을 임명 못했나
-편집국장에 취임한 건 언제죠?
"2010년 12월. 2년 임기죠. 지난해 한진중공업 사태는 우리가 잘 다뤘어요. 4대강 사업, 고리원자력발전소 등도 다뤘고요. 우리 아니면 (지역에서) 목소리 낼 곳이 없어요. 처음 1년은 회사에서 이런저런 요구가 있었어요. 기관장 비판 기사 나오면 말 나오고. 그런 기사들이 못마땅한 거지. 하지만 내가 (경영진의 요구를) 쳐낼 수준이어서 크게 불거지진 않았어요. (경영진이) '기사 왜 나가냐'고 하면 내가 '알겠습니다' 하고는 그냥 쓰고 그랬거든요."
-재단은 지면에 대해 직접 간섭하지 않았나요?
"직접 연락받은 적은 없어요. 보통 재단은 사장과 연락하고 그런 입장이 저에게 전달되곤 하죠. 부산이 3당 합당 이후 여권 일색이 되어버렸어요. 지역사회 기득권층도 견고해졌고요. 이에 대한 비판들이 필요한데 경영진은 우리가 야당 편을 든다고 합니다.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은 우리를 '빨갱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최 이사장이 오래전부터 갈망한 게 편집국장 3인 추천제를 없애는 거였어요. 그래야지 마음에 맞는 사람(편집국장) 임명하고 지면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지속적으로 요구를 해왔습니다."
-노조위원장 해고 같은 회사 내부 문제를 신문에 싣는 게 바람직합니까?
"개인 간의 문제라면 보도할 필요가 없죠. 하지만 부산일보를 누가 소유하는 게 적절한가는 공적인 문제입니다. 부산일보 노조뿐만 아니라 전국언론노조도 사회환원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했어요. 다른 공적 문제는 보도하면서 부산일보에 관한 공적 문제를 보도 못 한다면 결국 어디까지 올라가겠습니까? 박근혜까지 올라갑니다. 나중에 박근혜 사진을 1면에 올리라고 할 때 선택의 기로가 생길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근혜 대선 후보가 정수장학회 이사장일 때는 지면에 대한 간섭이 없었습니까?
"박 후보가 1995~2005년 이사장을 했습니다. 1998년 대구에서 당선되고 정치를 시작했으니, 그때만 해도 박 후보는 부산을 기반으로 한 우리 신문과 부딪힐 일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2004년에 한나라당 대표가 됩니다. 그때부터 정수장학회와 부산일보 문제가 불거집니다. 노조 산하 공정보도위원회도 신문에 '박근혜가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기 시작했고요."
-최필립 이사장과 이진숙 <문화방송> 기획홍보본부장 등의 대화록을 통해 부산일보를 비밀리에 민간에 매각하는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요.
경영진 맘에 안 든다고 발행 중단
다음날 그 사태를 기사화하자
경영진 또 윤전실에 와 "기사 빼라"
"빼라" "못 뺀다" 실랑이하다
노조위원장이 윤전기 스위치 눌러
2004년 박근혜 한나라 대표 된 뒤
장학회-부산일보 사태 불거져
편집국장 추천제를 없애는 걸
최필립은 오랫동안 갈망
최필립 퇴진만으론 해결 안돼
정수재단 해체해 공익법인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요구하고 싸웠는데, 결국 저분의 머릿속에 든 건 자기 생명 유지하면서 시끄러운 건 분리하면 된다는 것이었으니… 허탈했습니다. 특정 기업에 팔아넘기면 부산일보는 기업의 방패막이가 됩니다. 문제가 더 커집니다."
-박근혜 후보가 조만간 입장을 밝힌다고 합니다. 어떤 대안이 있을까요?
"첫째, 정수재단 해체하고 공익법인을 만들어 지역 상공계, 학계, 시민단체, 언론계 등의 덕망 있는 인사로 이사진을 구성하는 방법입니다. 둘째, <한겨레>처럼 국민주 방식이나 우리사주 방식도 검토할 만하고요. 중요한 원칙은 공공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소유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정수장학회를 그대로 두고 최필립 이사장만 물러나게 하거나 이사 몇 명을 교체하면 계속 논란을 부를 겁니다."
-부산일보는 1988년 국내 처음으로 편집국장 추천제를 도입한 언론사입니다. 과거와 비교했을 때 지금 부산일보의 편집권 독립은 어느 정도입니까?
"기자들의 경각심이 높아졌습니다. 1년 가까이 지면 논조가 변하지 않고 경영진이 새 편집국장을 임명 못 하는 이유는 간부들의 희생과 기자들의 의지 때문입니다."
이 국장의 주요 징계 사유는 '상사 명령 불복종'이다. 첫 대기발령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자 회사는 다시 대기발령 징계를 내렸다. 인터뷰를 한 날은 두번째 대기발령 징계를 받은 지 6개월이 되는 날이었다. 6개월이면 자동해고된다.
인터뷰 막바지 그는 부산지검에 나가봐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회사가 업무방해 혐의로 이 국장을 고소한 사건과 관련해 검찰이 나와달라고 요청해서다. 그는 "대기발령 상태에서도 일을 도와줬는데 무슨 업무방해라고 하는 건지…" 하며 일어섰다.
지금 부산일보의 편집국장은 거리에 있다. 매일 오전 서울 태평로 거리에 나가 농성을 한다. 징계 무효확인소송 등을 내며 법정 투쟁을 한다. 이날 밤 이정호 국장에게서 문자가 왔다. "결국 해고통지서가 집으로 날아왔네요. 19일 0시부터랍니다."
부산/남종영 기자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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