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도 채남지 않은 대선 전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의 아버지 박정희가 피살된 궁정동에서 당대 미모의 연예인들과 자주 만났던 사실, 박근혜 후보와 고 최태민 목사와의 관계 등 유신시절의 비화가 낱낱이 담긴 저서가 재출간돼 주목된다.
이 저서는 1992년 출간돼 당시 세간의 화제를 뿌렸던 ‘남산의 부장들 1·2’로 현직 방송통신위원회 부위원장인 김충식 상임위원이 동아일보 재직시절 3년 여 동안 지면에 연재한 내용을 모아놓은 책이다.
김 부위원장은 22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재출간의 의미에 대해 “구시대에 대한 막연한 향수만으로도 안된다”며 “(유신시절을) 통째로 흑색으로 칠해서 매도해서도 안되겠으나 그 시대를 미화하려는 것은 지나치다. 건전한 비판을 통한 미래로 향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남산의 부장들’을 보면, 지옥같은 유신시절의 끔찍함과 궁정동의 총성에 의한 몰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당시 관계자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담담하게 묘사돼있을 뿐 아니라 그동안 세간의 입으로만 떠돌던 은밀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퍼스트레이디였던 박근혜 후보의 사생활에 대한 기록도 상세히 나와있다.
5년 여 전 이명박 당시 후보와 함께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쟁에 나섰던 박근혜 후보가 검증 TV토론 등에 나와 적극 해명했던 ‘고 최태민 목사’에 대해 김 부위원장은 여러 평가를 해놓았다.
김 부위원장은 김재규 중정부장과 최태민 목사에 대해 “김재규 부장은 박근혜 양을 붙잡은 ‘목사’ 최태민 문제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며 “김재규는 각하에게 최의 비위를 보고했으나 박근혜 양이 최를 비호해 각하 앞에서 대질 친국(親鞫)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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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7일 출간되는 '남산의 부장들' 개정증보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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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위원장은 “천하의 정보부장이 ‘사이비’ 목사(최는 정통개신교 어느 곳으로부터도 안수받은 목사가 아니라고 김계원씨는 증언했다)와 나란히 앉아 우김질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굴욕이었다”며 1979년 11월 합수본부 수사파트 국장의 진술을 이렇게 옮겨실었다.
“김 부장은 ‘최 같은 자는 백해무익하므로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한다’고 증오를 표시했다. 새마음봉사단의 부총재(총재 박근혜)인 사이비목사 최가 사기 횡령 등 비위 사실로 퇴임한 후에도 계속 막후에서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해 각 기업체 사장들을 운영위원으로 선임하고 성금을 뜯어내는 등 새마음운동 취지를 흐리고 해서 계속 동향을 감시하라는 김(재규) 부장의 지시를 받았다. 1979년 5월 내사결과 최의 이권개입 여자봉사단원과의 추문 등 비위사실을 탐지해 김재규 부장에게 보고한 바 그렇게 말했다.”
또한 박정희가 사망한 10·26 당시 심수봉씨가 궁정동 총성의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 단지 그날만의 예외적인 일이 아니었다는 여러 증언이 김 부위원장의 저서에 나와있다. 당시 김 부위원장은 '궁정동'에서의 박정희 사생활을 책에 공개한 이유에 대해 "이제 변호인 접견 기록을 토대로 당시 궁정동 안가운영을 햇볕에 드러낼 때도 된 것 같다"고 밝혔다.
김 부위원장은 예비역대령으로 중정 의전과장이었으나 10·26 현장에 있다가 붙잡혀 1980년 5월 사형당한 고 박선호씨의 육군고등군법회의 재판 당시 증언을 소개했다.
“궁정동 식당을 가리켜 어느 검찰관이 ‘그 집은 사람 죽이냐’고 질문아닌 질문을 했다. 그 집은 그런 집이 아니다. 대통령이 오시는 곳이다. 그곳에는 수십 명의 연예인이 드나든다. 그 명단을 밝히면 시끄러워질 것이다. 거기에서 있었던 일을 폭로하게 되면 세상이 깜짝 놀랄 것이다. 박 대통령은 한달이면 열 번이나 그곳에 왔다.”
김 부위원장은 “대통령의 사생활을 관리한 박선호의 재판증언은 결코 엄포나 부풀린 과장이 아니었다”며 김재규가 1980년 1월 15일 자신을 옥중접견한 강신옥 변호사에게 했던 말을 전했다.
“궁정동 안가를 다녀간 연예인은 100명 정도 된다. 임신해서 낙태한 사람도 있고…. 징징 울고 불응하겠다고 해서 배우 K모, H모양은 오지 않은 일도 있었지만 간호여성이 임신해서 애먹기도 하고…”(강신옥의 접견메모)
김 부위원장에 따르면, 박선호씨가 이 집에 대해 암살사건으로부터 10년 전인 1960년 대 말 이후락(6대 중정부장)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부터 그런 용도로 쓰여져 왔다고 진술했다. 박씨의 여인 선정작업에 대해 김 위원장은 “주로 주간지 표지 사진이나 TV시청에서 시작됐다”며 “대상선정이 끝나면 주로 궁정동에서 가까운 내자호텔로 불렀다…1979년 10·26 당일 오후 5시20분 가수 심양은 내자호텔 커피숍에서, H대학생 모델 신양은 프라자호텔에서 각각 궁정동으로 인도됐다”고 전했다.
박선호씨는 또 “차실장이 TV를 보거나 하다 지명한 경우가 30%쯤 된다. 이름을 대고 돈은 얼마든지 준다고 하면서 다음 번에 부르라고 한다. 돈이라곤 10원도 주지 않으면서…”라고 차지철을 탓했다고 김 위원장은 기술했다.
박선호씨는 궁정동을 드나든 여인에 대해 “1979년 겨울 배우, 탤런트가 대부분이어서…저기 걸린 달력에 나온 미녀 모두가 안가를 다녀갔다”고 진술하기도 했다고 김 위원장은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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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0·26 궁정동 사람들> ⓒMB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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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박정희의 야간 사생활과 달리 그 시절 대한민국 사회는 유신과 긴급조치에 의한 극심한 질식상태에 놓여있었다. 김 부위원장은 유인태 국회의원이 74년 1월 긴급조치 1, 4호가 공포되자 철저히 도피생활을 해오다 넉달여 만에 체포된 김지하와 이철의 고문사례를 증언한 대목을 전하기도 했다.
“밤낮으로 신발을 벗겨 얼굴 머리를 때리거나 몽둥이찜질,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기, 몽둥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뭉개는 고문을 했다. 몇날 며칠이고 잠을 못자고 하고 흰 벽을 쳐다보게 하는 고문도 있었다. 물고문도 했다. 발가벗긴 몸을 나무 사이에 묶어 대롱대롱 매달리게 한 뒤 수건을 얼굴에 씌우고 주전자로 물을 붓는 것이었다. 숨이 막혀 발광하면 ‘너, 군대에 있을 때 이북 갔다 왔지?’해서 견디다 못해 고개를 끄덕이면 물붓기를 중단하고 진술서를 쓰라고 했다. 거부하면 또 물고문…. 지하실에서 사정없이 로프로 등을 후려갈기기로 했다. 터진 살갗에 뭔가 조금만 닿아도 맞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며칠 지나 안티프라민을 발라주고….”
김충식 방통위 부위원장은 박정희와 박근혜 후보의 사생활 등을 기록한 근거에 대해 “김재규를 변호했던 강신옥 변호사의 접견메모와 재판당시 기록한 내용을 근거로 작성한 것”이라며 “아직도 당시 자료를 갖고 있다. 20년 전에 책을 냈을 때도 박정희의 유족들은 아무도 책 내용에 문제를 삼은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김 부위원장은 이 같은 내용의 저서를 2012년 대선 직전에 다시 개정증보판으로 내게 된 이유에 대해 “유신을 이끌었던 박정희의 딸이 대선의 선두주자로 나오는 상황은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일”이라며 “박 후보는 당시 퍼스트레이디였으나 어리기도 했고, 대통령 의전행사 뒷바라지의 역할을 했으나 이제는 정치인이자 대선후보가 돼 있다. 따라서 지금의 박근혜는 그 때 보다 많이 업그레이드 돼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김 부위원장은 “그런데도 박 후보는 지금 인혁당을 민혁당으로, 김지태에 뺏은 정수장학회를 잘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평가이자 적반하장”이라며 “그림자에 대해 명확히 직시하고 역사 앞에 진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핏빛 과거사를 대변하는 반유신 데모하다 잘린 제적생 문재인, 유신의 딸 박근혜, 아이티 총아인 안철수가 주도권을 다투고 있는 게 지금의 대선 상황”이라며 “박정희 시대에 대한 직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