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국회에서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이므로, 국민을 대신하여 일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과연 정직한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나라의 발전과 국민생활 향상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인지 등을 꼼꼼하게 따져본 후에 선택하기를 당부하고, 우리나라의 민주정치가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선거일에 한분도 빠짐없이 투표….”

김능환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지난 10일 투표참여를 독려하는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선거가 대의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교과서적 말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투표 행위는 온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다. 투표하지 않는 것도 의사 표현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투표하지 않은 국민을 두려워하는 정치인은 없다.

 

그렇다면 누구나 투표를 독려하고 투표하지 않은 이들을 설득해 투표장으로 이끄는 일은 민주 시민의 상식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정부와 국회 등 정치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언론과 그에 종사하는 언론인이 투표 행위를 격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총선 투표당일인 11일, 조선일보에는 다소 기묘한 칼럼이 실렸다. 조선일보 최보식 선임기자가 쓴 칼럼 <“젊은 친구, 현실에는 ‘메시아’가 없네”>이다.

 

   
한 유권자가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조선일보는 칼럼에서 ‘젊은 친구’란 화자에게 “화창한 날씨면 공휴일에 놀러갔을 것이 아닌가”며 “민주적 선거제도에 대한 책임과 의무감은 눈곱만큼도 없다”고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글 쓴 목적은 역대 선거마다 유난히 투표율이 낮은 젊은 세대의 무책임함을 탓하는 것 같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자네에게 모든 걸 갖다 줄 수 있는 ‘메시아’도 현실에는 살지 않는다”며 “이런 자네가 투표장으로 몰려가면 야당은 ‘이겼다’고 환호할 것이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이어 “자네는 ‘여당은 특권 부자정당이니 우리 편이 아니야’고 답할 것이다”며 “하지만 야당 후보도 23억원 이상 가진 ‘상위 1% 부자’가 30명쯤 된다”, “어느 후보도 ‘말’로만 서민이지 자네 처지와는 다르다”고 지적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조선일보의 메시지는 “자네가 정말 알아야 할 ‘현실’은, 투표하는 순간 자네 손으로 ‘고액 연봉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여야 구분없이 6억원짜리 의원들이다. 이들은 수족 같은 비서를 7명까지 부린다. 면세에다 자동차 유지비와 기름값이 나온다”에서 드러난다.

 

   
조선일보 11일자 칼럼

 

조선일보는 국회의원이 받는 혜택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에 그치지 않고 이들이 국회의원 이름값을 가지 못한다고 맹비난했다. 조선일보는 “이들은 선거 때면 ‘국가를 위한 봉사’를 합창하지만, 막상 되고 나면 대부분 있는 둥 마는 둥 임기를 보낸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런 ‘불로 소득자’를 양산할 공산이 높다”고 전했다.

 

‘고액 연봉을 챙기면서 태업을 일삼는 국회의원’이란 문구에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정치혐오주의일 것이다. 하지만 299명의 국회의원들을 모두 이렇게 지칭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옳고 그름의 관점이 아니더라도 ‘팩트’라고 볼 수 있을까.

 

정치와 정치인에 대해 비판할 수 있지만 무턱대고 그들은 ‘모두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감정적인 논리이며 정치 불신을 조장할 뿐이다. 정치 불신은 유권자의 무관심과 냉대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이 유발하는 결과는 위험천만하다. 바로 ‘견제 받지 않은 권력’의 탄생이다.

 

지금 SNS 상에서는 투표하고 자발적으로 올린 투표인증샷과 투표독려 메시지로 가득하다. 4년 만에 한 번 돌아온 정치적 권리로 그 거대한 권력을 견제하려는 이들이 있다. 서울의 한 투표소 앞에서 만난 젊은 유권자들은 "20~30대 투표율이 70%가 돼 비정규직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대학등록금 문제가 해결됐으면 한다"고 했다. 이제껏 행사하지 않은 표로 자신들을 위한 정치가 이뤄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이런 날 조선일보가 정치혐오주의적 언어를 구사했다. 이유가 뭘까. 의도적으로 젊은 층의 정치 불신을 조장하려고 했다면 젊은 층의 투표를 바라지 않은 특정 정치세력 혹은 정당을 위해 마지막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헌신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